만국기가 펄럭이던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였다.
청군 백군 머리띠를 두르고 양 팀의 치열한 응원이 쏟아졌다.
스케치북에 적은 응원가를 넘겨가며 우리는 목이 터져라 각자 팀을 응원했다.
"따르릉따르릉 전화 왔어요. 백군이 이겼다고 전화 왔어요. 아니야 아니야 그건 거짓말, 청군이 이겼다고 전화 왔어요."
친구들보다 학교를 한 살 일찍 들어가 몸이 작고 가벼웠던 나는 가장 자신 있는 종목이 달리기였다.
공기의 저항을 덜 탔는지 큰 요령이 없이도 잽싸게 달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가을, 나보다 더 작은 아이가 나타났다.
키는 작지만 나보다 통통했고 가을볕 아래 결승선을 바라보는 눈빛은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그 아이는 달리기의 요령까지 체득한 것처럼 보였다.
둘 다 숏다리였지만, 그 아이의 보폭은 이상하리만치 컸고, 아무렇게나 휘휘 내두르는 내 팔보다 더 계산한 듯한 각도로 절제 있게 앞뒤 같은 간격으로 움직였다.
땅! 소리가 나면 시원하게 바람을 가르며 앞서 있는 아이들을 한 명씩 뒤로 보내는 쾌감이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날은 아무리 애를 써도 나보다 작은 아이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두발에 온 힘을 실어 땅이 꺼져라 구르며 박차고 나아갔지만, 나는 여전히 간격을 좁히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저 앞에 결승선이 보이는데, 내가 힘껏 배를 내밀며 일등으로 치고 나갔던 그 줄인데, 양갈래 머리의 뒤통수가 떡하니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던 그 간격을 결국 줄이지 못하고 일등 자리를 내어주었다.
선생님이 팔목에 2등이라는 도장을 찍어주는데 정말 씁쓸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본 감정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그래서 그날의 기분이 열 살도 채 안 되었을 내 어린 가슴속에 생생히 새겨졌다.
두 번째 기억은 고등학교 특별활동 시간이었다.
글과 관련된 동아리는 문예부와 교지 편집부 두 개가 있었는데 난 책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주저 없이 교지편집부를 택했다. 이과임에도 문학소녀였던 나는 동아리의 활동 중 아이들의 원고를 모아 읽고 싣는 일을 참 좋아했다. 한참 교지 편집 작업이 마무리돼갈 즈음, 어느 대회에선가 상을 받았다던 문예부 3학년 선배의 글이 도착했다.
그 글을 읽으며 느꼈던 전율이 아직도 생각난다.
'아... 이 감동은 뭐지..'
무수히 많은 책 속에서 느꼈던 작가들에 대한 경외심 말고, 내 눈앞에 살아있는 나와 같은 십 대 언니의 글이 이렇게 소름 돋도록 잘 쓸 수도 있구나.
그 원고를 수십 번도 넘게 읽으며 제일 좋았던 마지막 문장을 외우다시피 했고, 그 언니가 옆을 지나가면 나도 모르게 언니에 대한 경례를 하고 싶었다.
그날의 기분도 생생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런 재능은 내가 따라갈 수 없을 거라는 걸.
어린 시절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었던 게 어디 그 한 두가지였겠나.
고무줄놀이부터 수수깡으로 집 만들기, 롤러스케이트 뒤로 타기, 팝송 따라 부르기 등등 안 되는 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럼에도 유난히 그 두 기억이 어린 내 가슴에 남은 건 아마도 내가 잘하는 분야라고 생각한 데서 오는 현타였던 것 같다.
대학생 이후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들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는 걸 깨달아서 충격도 덜했다.
"난 있잖아. '해보고 아님 말고'가 내 삶의 모토야. 시도해 본 게 어디야. "
셀프 충격 방지 쿠션을 장착, 쿨한 척 말하고 다니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노력해도 안 되는 것들은 다 떠나보냈다.
그렇게 떠나보냈는데도 다시 돌아온 것들이 있다.
바로 글쓰기이다.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여전하지만, 내가 정말 좋아한 것이어서 돌아왔나 보다.
그리고 내 가슴을 뛰게 했던 달리기.
제이브래드님의 책 ' 거북이 엄마의 달리기' 를 읽으며 내 가슴이 얼마나 두근거리던지.
이젠 누군가를 이기기 위함이 아닌 달리기의 순수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나이인 것도 맘에 든다.
내 부실한 도가니만 잘 받쳐주길 바라며 최근 달리기를 시작했는데 안타깝게 무릎 부상을 입어서 잠시 쉬고 있다. 열정은 넘쳤으나 요령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회복되고 나면 아장아장 느리더라도 다시 잘 시작해보고 싶다.
떠나보낼 수 없어 다시 돌아온 것들에 대해 더욱 진심이고픈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