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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나라나 Jan 07. 2022

떠나보낼 수 없는 것들

 

만국기가 펄럭이던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였다.

청군 백군 머리띠를 두르고 양 팀의 치열한 응원이 쏟아졌다

스케치북에 적은 응원가를 넘겨가며 우리는 목이 터져라 각자 팀을 응원했다.


"따르릉따르릉 전화 왔어요. 백군이 이겼다고 전화 왔어요. 아니야 아니야 그건 거짓말청군이 이겼다고 전화 왔어요."


친구들보다 학교를   일찍 들어가 몸이 작고 가벼웠던 나는 가장 자신 있는 종목이 달리기였다.

공기의 저항을  탔는지  요령이 없이도 잽싸게 달릴  있었다.

그런데  가을나보다  작은 아이가 나타났다

키는 작지만 나보다 통통했고 가을볕 아래 결승선을 바라보는 눈빛은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아이는 달리기의 요령까지 체득한 것처럼 보였다.

  숏다리였지만 아이의 보폭은 이상하리만치 컸고아무렇게나 휘휘 내두르는  팔보다  계산한 듯한 각도로 절제 있게 앞뒤 같은 간격으로 움직였다.


소리가 나면 시원하게 바람을 가르며 앞서 있는 아이들을  명씩 뒤로 보내는 쾌감이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날은 아무리 애를 써도 나보다 작은 아이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두발에  힘을 실어 땅이 꺼져라 구르며 박차고 나아갔지만나는 여전히 간격을 좁히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앞에 결승선이 보이는데내가 힘껏 배를 내밀며 일등으로 치고 나갔던  줄인데양갈래 머리의 뒤통수가 떡하니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던  간격을 결국 줄이지 못하고 일등 자리를 내어주었다.


선생님이 팔목에 2등이라는 도장을 찍어주는데 정말 씁쓸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본 감정이었다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있다는 .

그래서 그날의 기분이  살도   되었을  어린 가슴속에 생생히 새겨졌다.


 번째 기억은 고등학교 특별활동 시간이었다.

글과 관련된 동아리는 문예부와 교지 편집부  개가 있었는데  책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주저 없이 교지편집부를 택했다이과임에도 문학소녀였던 나는 동아리의 활동  아이들의 원고를 모아 읽고 싣는 일을  좋아했다한참 교지 편집 작업이 마무리돼갈 즈음, 어느 대회에선가 상을 받았다던 문예부 3학년 선배의 글이 도착했다.

 글을 읽으며 느꼈던 전율이 아직도 생각난다.


'아... 이 감동은 뭐지..' 


무수히 많은  속에서 느꼈던 작가들에 대한 경외심 말고 눈앞에 살아있는 나와 같은 십 대 언니의 글이 이렇게 소름 돋도록   수도 있구나.

 원고를 수십 번도 넘게 읽으며 제일 좋았던 마지막 문장을 외우다시피 했고 언니가 옆을 지나가면 나도 모르게 언니에 대한 경례를 하고 싶었다.

그날의 기분도 생생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런 재능은 내가 따라갈  없을 거라는 .


어린 시절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었던  어디   두가지였겠나.

고무줄놀이부터 수수깡으로  만들기롤러스케이트 뒤로 타기팝송 따라 부르기 등등 안 되는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그럼에도 유난히   기억이 어린  가슴에 남은 건 아마도 내가 잘하는 분야라고 생각한 데서 오는 현타였던  같다.


대학생 이후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들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는  깨달아서 충격도 덜했다.

" 있잖아. '해보고 아님 말고'  삶의 모토야시도해   어디야. " 

셀프 충격 방지 쿠션을 장착쿨한  말하고 다니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노력해도  되는 것들은  떠나보냈다

그렇게 떠나보냈는데도 다시 돌아온 것들이 있다.

바로 글쓰기이다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여전하지만내가 정말 좋아한 것이어서 돌아왔나 보다.

그리고  가슴을 뛰게 했던 달리기.

제이브래드님의  ' 거북이 엄마의 달리기 읽으며  가슴이 얼마나 두근거리던지.

이젠 누군가를 이기기 위함이 아닌 달리기의 순수한 즐거움을 맛볼  있는 나이인 것도 맘에 든다.

 부실한 도가니만  받쳐주길 바라며 최근 달리기를 시작했는데 안타깝게 무릎 부상을 입어서 잠시 쉬고 있다. 열정은 넘쳤으나 요령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회복되고 나면 아장아장 느리더라도 다시 잘 시작해보고 싶다.


 떠나보낼  없어 다시 돌아온 것들에 대해 더욱 진심이고픈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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