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요…
아주 오랫동안 입에 붙어, 매 순간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마다 중얼거리던 말이 있다. 멈추고 싶을 때마다, 내가 잘못 선택한 것 같아 후회되고 자책할 때마다 주문처럼 외웠다.
“그래서 … 죽을 거야? 그게 아니면 일어나서 살아야지. 살 거면 열심히 잘 살아야지.”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골목으로 발을 내디뎠다. 나무로 된 담과 집집마다 장식해 놓은 꽃들이 소박하고 아기자기했다. 꽃으로 집을 꾸민다는 것은 이 도시 사람들의 특징인 것 같았다.
따뜻한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잎이 넓은 식물과 슬레이트 판으로 된 지붕과 잔뜩 엉킨 전깃줄 모두가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낯선 길에 잔뜩 긴장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낯선 골목을 걸을 때면 미로에 갇힌 것 같다. 이 미로를 내가 빠져나갈 수 있을까? 혹시 끝이 막힌 막다른 골목은 아닐까? 혹시라도 무서운 개가 나타나거나 하면 어떡하지? 나는 혼자고 여긴 말도 통하지 않는 먼 나라의 작은 도시다. 생각해 보면 항상 그런 말부터 했다. 나는 혼자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내가 해야 한다. 그럴 때마다 습관처럼 중얼거린다.
“그래서 이대로 멈출 거야? 그럴 게 아니면 계속 가야지.”
톡... 톡.. 톡.
검은 구름이 몰리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택시를 타다 잃어버린 양우산이 떠올랐다. 우산을 살만한 곳이 있나 살펴보았다. 편의점은 보이지 않는데 빗줄기는 순식간에 도시를 뒤덮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열대 나라의 스콜인가 싶었다.
뚫고 지나갈 수 없는 빗줄기에 어딘지도 모르는 건물 앞의 처마 아래 숨었다. 신기하게도 빗소리가 좋았다. 거리를 가득 채운 빗소리와 땅을 때리는 빗방울의 움직임도 좋았다. 비에 젖어가는 오래된 건물을 바라보는데 편안했다. 그러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래서 여기 계속 있을 거야? 그게 아니라면 비를 맞더라도 밖으로 나가야지.”
나는 거센 비를 그대로 맞으며 우산을 사기 위해 편의점을 찾았다. 고요한 거리에 가끔 차가 지나가고, 미리 준비한 우산 안에서 평온한 사람들이 지나가고, 우비를 입은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스쳐 갔다.
그때, 작은 가게 하나가 보였다. 우비와 축구공이 진열장에 놓인 것을 보니, 생활용품을 파는 가게 같았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서 주인 여자에게 물었다.
“엄브렐러?”
다행히 나의 한국식 발음을 알아들은 주인이 우산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선택을 위한 시간은 필요 없었다. 밖에는 폭우가 쏟아지는 중이고, 우산은 모두 무늬 없이 어두운 색상뿐이었다. 우산 하나를 들고 계산대로 가 지폐를 내밀었다.
돈을 받아 든 사람은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였다. 거스름돈을 내민 할머니는 너무나 부드러운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컵쿤 카아 ….”
태국의 미소는 바로 이게 아닐까? 할머니의 미소에 나는 태국어로 감사 인사를 전할 용기가 생겼다. ‘컵쿤 카’하고 나오는데, 쑥스럽지만 즐거웠다.
우산 하나를 샀을 뿐인데, 환영받는 기분이 들었다. 예쁘지 않은 우산을 들었는데도, 기분이 좋아졌다. 우산을 들고 치앙마이의 올드시티를 걷는데, 도시 전체가 나를 환영해 준다는 기분에 긴장이 사라졌다.
오늘의 목적지인 왓 프라싱이 나왔다. 본당 안에 들어가려고 안내판을 보니 신발을 벗어야 한다고 쓰여있었다. 밖에는 비가 내려 조금 망설여졌지만, 운동화를 벗어 최대한 처마 안의 자리에 내려놓고 본당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은 했지만 기도하고 나왔을 때, 운동화는 비를 잔뜩 머금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운동화를 신는데 꼭 바닷물이 밀려오는 모래사장을 밟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은 없었다. 젖은 운동화를 신은 채 사원 안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질퍽한 운동화는 금세 양말까지 축축하게 만들었다.
우산까지 써서 탑도 불상도 하늘도 제대로 보기 어려웠다. 옷도 젖고 신발도 젖어 컨디션까지 별로였다. 호텔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 상태라면 어딜 가도 민폐다 싶었다. 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식당에 앉아 있기도, 카페에 들어가기도 망설여졌다.
“그래서 돌아갈 거야?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멈출 거야? 그게 아니라면 가 봐야지. 가서 그곳에 뭐가 있는지 봐야지. 보고 경험해야지. 좋은 거든, 나쁜 거든.”
나는 여행 중 꼭 하고 싶었던 ‘아카아마에서 더티 라떼 마시기’를 향해 걸었다. 사진에서 본 그대로인 카페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북적였다. 긴장하지 않은 척 더티라떼를 시키고 계산을 했다. 작은 잔에 나온 더티라떼를 들고 2층으로 가서 다이어리에 생각과 기분을 정리하고 사진을 찍었다.
혼자라는 것이 좋았고, 또 싫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어 좋았지만 아무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 조금 쓸쓸해졌다.
비 쫄딱 맞고 운동화 질퍽이지만, 로망의 카페에서 더티라떼 한 잔.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다가 더티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지금껏 마셔본 적이 없는 커피였다. 이렇게 맛있는 커피는 먹어 본 적이 없다고 호들갑 떨다가, 다 마시고 나선 양이 적다고 아쉬워했다. 그 후로는 하릴없이 시간이 흘렀다. 꼭 해야 할 일이 없는 게 이상했다. 이래도 되나 싶었다.
창밖으로 비 내리는 하늘이 보였다. 멋졌다. 카페 안의 음악 소리도 멋졌다. 다이어리에 적힌 글을 읽는데, 치앙마이 할머니의 나비 날갯짓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컵쿤 카아아아….’
그 목소리를 떠올리니 오늘의 내가 꽤 괜찮았다. 멈추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서 꿈꾸던 더티라떼 한 잔을 마셨다. ‘컵쿤 카아….’
또 창밖을 보며 비가 만들어준 것들에 감사했다. 빗속의 사원은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컵쿤 카아….’
눅눅한 비 냄새와 서늘한 에어컨 바람 아래서 낯선 나라의 카페를 경험한 것은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감사할 것이 많았다. 비를 맞아도 좋다며 거리를 걸은 나에게. 도망치지 않은 나에게. 포기하지 않은 나에게. 이왕이면 하얀 머리의 치앙마이 할머니 목소리로 말해줘야지.
“컵쿤 카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