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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과 May 25. 2022

붉디붉은 5월의 장미

혼자 살기로 했다(9)


드디어 장미꽃이 피었다. 5월의 햇살이 또 예쁜 색깔을 만들었다. 낮에는 뜨겁다가 밤이 되면 추웠던 초여름의 날씨 덕분에 참 붉은 꽃이 여기저기 뭉텅뭉텅 피었다. 나는 또 걸음을 멈추고 빤히 보고 만다. 장미꽃을 보고 있으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


왜 이렇게 크고 붉어야 하는 걸까?


동네에 작은 시장이 하나 있다. 작은 시장을 둘러싸고 오피스텔 같은 아파트들이 여기저기 뭉텅뭉텅 올라오고 있다. 덕분에 큰 마트가 50미터 간격을 두고 2개나 생겼다. 일 년 내내 싱싱한 채소와 예쁜 과일들이 마트에 넘쳤다. 모난 것도 없이 반짝이는 채소와 과일들을 볼 때면 ‘이게 진짜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예쁜 것들은 가격도 비싸다. 그래서 시장 안의 채소 가게를 자주 찾는다.


채소 가게에는 못난 것들이 많다. 크기가 다른 단호박, 얼룩덜룩한 피망, 너무 작거나 너무 커서 제각각인 고구마. 그래서 좋다. 사람이 키운 것 같고, 자연에서 얻은 것 같다. 싼 가격은 덤이다. 채소가게에서 이리저리 살피다가 당장 먹고 싶은 토마토를 샀다. 붉게 익은 토마토를 몇 개 사고, 나무를 잘라낸 것 같은 포기 상추를 샀다.

그다음엔 그 녀석을 보러 갈 생각이었다. 요즘 눈인사를 시작한 고양이 한 마리를 보려고 시장을 가로질렀다.


두부집에는 여름이 시작되며 나온 콩국물이 파란 아이스박스에 잔뜩 담겨 있었다. 막 담근 겉절이와 열무김치가 시원해 보였다. 살까? 그러다 참았다. 며칠 전에 담근 깍두기가 아직 잔뜩이라 냉장고를 더 채울 수 없었다.



닭집에는 얼음이 더 많아졌다. 잔뜩 쌓인 얼음 위에 누운 생닭 옆에 닭똥집과 닭발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나는 그 닭 집에서 이제 닭을 사지 않는다.


“엄마는 어때요?”


닭 한 마리를 사러 갔다가 뜻밖의 질문을 받았었다. 이제 이 동네서 엄마를 모르는 사람은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요양원에 들어갔다는 대답을 들은 주인은 철판에 지지고 있던 수수부꾸미 5개를 담아 주었다. 그냥 주는 거란다. 닭과 수수부꾸미를 들고 집으로 온 날 이후 나는 그 집에서 더는 닭을 사지 않는다.


그 골목을 돌면 좀 더 낡은 골목이 나온다. 고춧가루를 갈고, 참기름과 들기름을 파는 방앗간 골목이다. 골목을 천천히 걸을 때면 계절마다 다른 냄새가 난다. 매운 냄새가 골목을 채울 때도 있고, 고소한 냄새가 골목을 채울 때도 있다. 그 골목의 반은 아파트 외벽이다. 묘목과 씨앗 등을 팔던 자리는 없어지고, 아파트가 되었다.




하나씩 하나씩 사라지는 것 같다. 녹두를 직접 갈아서 빈대떡을 만들던 가게도 사라졌다. 건강원들도 간판만 남았다. 잔치국수와 우무 무침을 하던 식당도 문을 닫았다. 시장에서 큰길 쪽은 이제 철거 직전이다. 안은 뻥 뚫린 채로 빛도 없이 컴컴했다. 가끔 지나다 보면 손님이나 식당 주인이 모여 담배를 피웠다. 음식 냄새보다 담배 냄새가 더 독한 골목이다. 왜 그곳에서 담배를 피우는지 이유는 알 것 같다.


어둡고, 아무도 오지 않으니까. 그런데다 천장은 지붕이 없어 골조가 그대로 드러난 채이기 때문에 환기는 잘될 것이다.

동네에 하나뿐인 이 시장도 곧 사라질 것 같다. 시장을 포위하듯 건물이 올라서고 있다. 길거리에서 아파트 홍보용 행주도 자주 받고 있다. 덕분에 따로 행주를 안 사도 될 정도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빛이 들어왔다. 빨간 장미꽃이 잿빛의 벽을 배경으로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피어도 꼭 아름답지 않은 벽 옆에 피어 붉은빛이 더욱더 도드라졌다.

이렇게 예쁘게 피어 생명 있는 모든 것의 발길을 붙들고 싶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겠지. 일 년 내내 싱싱한 과일과 채소를 갖다 놓고 고객의 발을 잡아당기고 싶은 것도 당연한 것이다. 넓은 땅에 빈대떡 가게를 두는 것보다 고층의 아파트를 올리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데, 좀 서운했다.




사라지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하나하나 사라질 때마다 그때의 나도 사라지는 기분이다. 추석 전날 아침에 녹두 간 것을 사려고 줄을 섰던 것, 매콤 새콤하게 무친 우무를 동생과 같이 먹던 추억도 사라지는 기분이다. 좀 남겨줬으면 좋겠다. 대충 그 정도 했으면 몇 개는 좀 남겨놔도 되지 않나? 그런 마음이다.


여름이 오고 있다. 장미처럼 사로잡아서 다른 생각은 못하게 할 계절이 오고 있다. 모든 것이 빛나고 푸르고 뜨거운 계절 속에서 또 태풍이 불고 한 달 내내 비만 올 지도 모르겠다. 그 비속에서 바람 속에서 장미는 꽃잎을 다 떨구고 붉은색은 사라질 것이다.


핀 것은 진다.


곧 사라질 이 시장처럼 말이다. 그러니 붉게 피어야 한다. 지는 것이 아깝지 않도록 피어야 한다.


아주 잠깐의 계절이라도 괜찮다. 갑작스레 핀 붉은 꽃이라도 괜찮다. 금세 피면 어떤가. 금세 진다고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  시장이 곧 사라진다고 추억까지 소멸되는 건 아니겠지. 장미가 진다고 그 색깔이 마음에서 파랗게 변하는 건 아니니까.


5월이 벌써 지나가고 있다. 뜨거운 여름이 오면 장미는 진다. 지지만 지는 건 아니다. 붉은 색깔은 장미의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붉겠지만 바라봐주지 않는다면 붉은 것을 알까?

내 마음에 담지 않는다면 어느 것도 색깔을 갖지 않는다. 의미는 장미가 만드는 게 아니라 걸음을 멈추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붉디붉은 것은 장미가 아니라 바라보는 사람이다.


오늘도 미용실 앞에는 그 녀석이 나와 있다. 주인 대신 손님을 기다리는 건지, 손님을 못 들어오게 쫓는 건지 알 수 없는 이 녀석은 내가 지금껏 본 적이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름이 오는 게 무척이나 싫은 표정이다. 하긴 그런 털을 하고 여름을 나려면 꽤나 생각이 많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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