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떠나와
이 생활이 몇 개월이나 되었을까
까마득한 속세를 눈 찌푸려 쳐다보다
파란 거울과 눈이 마주친다
나는 점점 승려가 되어가고 있었다
정수리에 작은 구멍이 생겨난 것도
밥 한 풀 남기지 않고 식판을 비우는 습관도
알고리즘이 법륜스님의 영상을 끊임없이
밀어 올리는 것도 그 조짐이었을까
괜한 의심을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스물아홉의
어느 야구장에서 문득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날부터 꾸준히 글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나의 계시는 달랐다. 스물한 살,
군대를 애써 지우고 있던 내게
입영통지서가 날아든 날부터
나는 하이네켄 44캔을 마셨다
비좁은 노래방에서는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 가 입구까지
구슬프게 터져 나왔고
남은 친구들의 동공에는 눈물이 고였다
배웅해 줄 친구들은 이미 떠나
연락이 닿지 않는 오후
내공이 느껴지는 미용실에서
소중한 흑발들이 힘없이 떨어진다
부모님과 마지막 식사를 하고
돌멩이를 삼킨 듯 애매하게
채워진 배를 문지르며 사진을 찍었다
칙칙한 밀리터리,
무거운 군복 앞에 이름이 지워진다
현실을 잊기 위해 비워냈던
빈 캔들보다 두 배가 된 번호
훈련병 88번
나란히 앉은 낯선 동자승들 사이에서
이제 나는 꾸준히 편지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