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여운 것들>과 <아가씨>의 페미니즘
*이 글은 영화 <가여운 것들>과 <아가씨>의 주요 장면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제의식에서 두 영화는 닮아 있다. <가여운 것들>의 주인공인 벨라 백스터(에마 스톤 분)가 맞닥뜨리는 남성권위의 다양한 형태는 영화 속 색감의 변화와 초현실성으로 재현되는 주인공의 발달과정과 평행을 그리며 흥망성쇠의 곡선을 따른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지는 대유는 바람둥이 변호사 던컨 웨더번(마크 러팔로 분)의 인물로, 그의 화술, 신분, 지위, 외모, 교양, 인맥 혹은 사회적자본이 갖는 정형화된 남성적매력은 벨라 자신의 정신적 성장에 주요한 주춧돌임과 동시에 그녀 자신의 비판적사고를 통해 쾌락주의의 이면에 있는 공허감과 물질만능주의의 얄팍한 밑천을 드러내며 해체되어야 하는 남성적 로맨스의 캐리커처이기도 하다. 육체적쾌락을 긍정하고 섹스로써 여성에 대한 우위를 점유하려는 캐릭터는 <아가씨>의 후지와라 백작(하정우 분)의 그것과 비교되는데, 둘 모두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음각기법으로 정의하며, 처음에는 이성(理性)으로써 금지된 사항을 허용하며 자유와 해방을 미끼로 유혹하나 시종일관 도피의 과정에서 능동적인 여성을 부정하고 후에는 결혼을 통해 여성성을 지배하려는 '진짜 의도'를 드러낸다. 두 영화에서 각 주인공 벨라와 히데코는 달콤한 속임수로 접근하여 남녀관계를 일방적인 설득과 협력의 비대칭으로 정의하고자 하는 유창한 로맨틱의 캐릭터를 극복함으로써만 자주적인 성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캐릭터는 벨라의 아버지-하나님인 가드윈 백스터(윌렘 대포 분)로, 상기한 로맨틱이 어기는 '법', 혹은 가부장적권위의 알레고리이다. 정신분석이 가르치듯 아버지의 이름(Nom-du-père)은 아버지의 "안돼!"(Non-du-père)이며, 가드윈이 고추가 잘린 성불구자라는 설정은 이러한 금기가 '태초의 거세'로서 우회적인 놀이하기(Jouissance)의 지향점이 된다는 이론의 구체적 고증이다. 가드윈은 외과의-냉혈한의 페르소나로 정중한 사회(polite society)를 살면서 잃어버린 성기를 수술과 합리화의 전략으로써 되찾고자 한다. 따라서 강의실에서 장기이식을 시연하는 그에게 학생이 던진 "왜 하느냐"라는 질문에 그는 "재미로 한다"(for my amusement)고 답한다. 하지만 이런 그의 노력, 혹은 상상적해법은 결코 거세된 것의 회복이라는 목적지에 닿을 수도, 실재의 위협에 대한 영구적인 안전보장이 될 수도 없다. 이 영화에서 그가 실재를 맞닥뜨리는 순간이 딱 두 번 있는데, 첫번째는 그가 본인의 양녀 또는 피조물인 벨라가 규칙을 어기고 바깥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할 때 그녀의 행복을 위해 금기를 일시적으로 허용하는 대목이다.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합리화와 더 많은 수술로 극복되지 않는다. (두번째는 그가 본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즉, 금기와 놀이하기라는 상상적해법은 사랑과 죽음 앞에 무력하다.)
이러한 가부장적 권위의 도착(perversion)은 <아가씨>에서 코우즈키 이모부(조진웅 분)의 책수집과 일본상류사회 에티켓실천으로 구체적 형태를 찾는다. <가여운 것들>의 벨라가 처음 자위를 통한 쾌를 발견하자마자 그것이 금지되는 맥락을 함께 맞닥뜨려야 했듯, <아가씨>의 이모부가 일본상류사회를 열망하며 일궈놓은 집안에서는 "ちんぽ, まんこ"(자지, 보지)의 외설에 키득대는 여성을 가학행위로 벌하는 한편 금지된 욕망의 대상을 비밀지하실에 수집 및 전시해놓는 방법으로 성기상실과 부재에 대한 욕망의 역학이 유지된다. 귀한 손님을 모아 낭독회 및 경매를 벌이는 모습은 남성적판타지의 육화이며, 이모와 히데코의 여성성은 그것의 유지 및 보수를 위한 장치로 축소된다.
성적갈등이 계급의식을 통해 극복되며, 그 과정에서 동성애가 저항에 주요한 채널이 되는 것 역시 두 영화가 가진 공통점이다. <아가씨>에서 상류사회의 성 안에 감옥처럼 발이 묶여 있는 히데코와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에 규범으로부터 상대적인 자유를 누린 숙희 사이에서 트는 사랑은 기성사회가 규정해놓은 경계를 초월하며 여성과 여성의 관계를 숙원의 과업을 함께 이루는 동지애로 새롭게 정의한다. 이들이 하녀와 아가씨로서가 아닌 애인, 친구, 동료로서, 더이상 일본집, 영국마당으로 상징되는 이모부의 욕망회로와 백작의 이간질을 매개로 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서로를 응시하고 알아볼 때, 비로소 히데코의 구조에 대한 지식(문해력, 지하실에 대한 기억)과 숙희의 실천(노동력, 행동할 용기)이 협력하여 혁명의 불꽃을 지핀다. 그들이 지하실에 있는 값비싼 문헌들과 수집품들을 훼손하는 장면은 상아탑안에 갇혀있던 엘리트의 지식권력이 해체되는 순간을 그린 알레고리이다. 이 때 작가가 비판하고자 하는 '식민지 남성' 이념의 마법이 풀린다 (따라서 살아있던 뱀의 목을 쳤을 때 딱딱한 조각으로서 깨진다). "나의 삶을 망친 구원자"라는 숙희에 대한 히데코의 코멘트는 '해방으로 가는 길이 사랑을 통한 자기부정'이라는 작가의 정치적 포지션, 혹은 헤겔현상학의 값진 유산을 한 번더 강조하는 대목이다.
<가여운 것들>의 구성과 전개는 조금더 복잡한 편이다. 계급의식의 첫 관문이 되는 사건은 유람선 위에서 만난 냉소주의자 해리 애슬리(재러드 커마이클 분)를 만나고 "세상을 보여주겠다"라고 말하는 그를 따라 알렉산드리아의 빈민들을 높은 성 위에서 멀찌감치 내려다보며 느끼는 대목이다. 이 장면에서 벨라와 해리의 뒤에 있는 성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중간이 파괴되어 더이상 내려갈 수 없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이것은 관광객신분으로 '지역의 삶에 대한 무지'라는 특권을 누리는 유람선 위의 그들이 속한 상류사회와 매일의 노동과 빈곤을 온몸으로 버티며 살아가야 하는 정착민들의 현실 사이를 잇는 다리가 끊어져있다는 계급의식의 알레고리이며, 스스로 누리는 기득권에 대한 의식은 주인공 벨라 백스터로 하여금 깊은 죄책감과 연민을 자아낸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방 안에 있는 돈을 전부다 기부하는 벨라의 행동은 현실문제의 구체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여 당장의 죄책감을 덜어내고자 쉬운 방법, 즉 각종 자선단체에 기부함으로써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는 중산층의 상호수동적 태도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배에서 쫓겨난 후 바닥의 삶을 직접 체험하고자 하는 벨라가 파리의 매음굴에 취직하는 대목이 이 영화에서 제시하는 혁명의 구체적순간이다. <아가씨>에서처럼 벨라는 이 곳에서 투아네트(수지 벰바 분)와 동업자, 친구, 애인의 관계로 발전하며 저항적인 여성성을 실천하는 계기를 맞는다. 다만 <아가씨>에서 지배계급의 지식과 노동계급의 실천이 이분법적인 구조로 비교적 정적인 다이나믹을 구성했다면 <가여운 것들>의 벨라가 사창가에서 맞닥뜨리는 구조는 선과 악, 남자와 여자, 진보와 보수, 지식과 실천, 지배와 피지배가 특정캐릭터에 영구적으로 귀속되지 않은채 복잡하게 얽혀 끊임없이 새로운 균형점을 찾고 있는 동적 상호관계의 재현이다. 벨라의 고용주인 마담 스위니는 '여자가 남자를 선택해야 한다'는 벨라와 투아네트의 요구에 보수적인 태도와 신체적형벌로 대응하면서도 그녀 스스로도 동일한 구조 안에서 아이를 먹여살려야 하는 숙명에 처해있기도 하다. 주인공 벨라는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를 맺고 있는 그녀 역시도 동일한 생산구조에서 필연적인 반응을 하는 것임을 깨달으며 구조의 혁신이라는 이상적정의의 실현을 토론과 주장이 아닌 참여와 실천으로써 해내고자 한다. 곧 그녀는 손님이 섹스를 하기전 자기의 속얘기를 털어놓는 것을 의무화하는 룰을 제시하여 성적인 육체로 격하당한 여성을 교감하는 주체로 승격시키고 남녀간의 섹스를 남성의 일방적인 성욕해소가 아닌 쌍방의 유희로 전환함으로써 이성(異性)관계를 재정의한다.
<가여운 것들>에서 다뤄지는 동성애의 테마는 사회주의모임을 함께 다니고 여성인권회복의 사명을 공유하는 동지와의 유대관계로 환원되어 던컨 웨더번의 캐릭터로 대유되는, '억압하는 남성'에 대한 저항을 가능케 하는 주요매체가 된다는 점에서 <아가씨>와 비슷하나 벨라와 투아네트의 로맨스가 영화전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점, 또 두 사람이 단독적인 연인관계로 발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욕망에 대한 자율적인 충성'이라는 목적지로 나아가기 위해 사랑을 경유하는 전자의 '사과하지 않는 여성주체'의 저항윤리는, 사랑과 도피를 모든 갈등에 대한 최종답안으로 내놓고 여객선 위의 기약없는 방황과 열정이라는 은신처에서 성급히 끝을 맺는 후자의 그것에 비해, 냉철한 관점을 고수하며 끈기있게 문화적 액티비즘의 마라톤을 완주한다.
<가여운 것들>의 결말은, 성적쾌락, 정신의 교감, 계급의식, 정치적실천을 겪은 여성이 거세당한 권위인 아버지-하나님의 이성(理性)과 화해하며, 마침내 억압되었던 과거, 전남편 알피 블레싱턴 장군(크리스토퍼 애벗 분)의 인물이 상징하는 경직된 공포정치의 트라우마를 상기하고 직면하는 것이다. 이 트라우마는 여성의 성욕과 감정적경험을 치료해야 할 병으로 인식하는 남성적응시에 관한 것이다. 알피가 아내의 우울에 대한 설명으로 제시하는 '히스테리'(hysteria)라는 병명은, 자궁을 뜻하는 그리스어 ὺστέρα (휘스테라, hystera)에서 파생한 것이다. 두려움으로써 다스리는 권력에게 음핵과 자궁은 문제의 원인이며 제거대상이다. 이런 권위를 벨라는 아버지의 유산인 수술이라는 폭력적 수단을 동원해, 스스로를 이성적가학의 가해자로 격상시킴으로써 굴복시킨다. <가여운 것들>의 페미니즘은 기성구조의 희생자라는 굴레를 벗고 과거의 트라우마를 재구성하여 고통의 기억을 '여성식합리'라는 이념으로 승화시킨다.
<가여운 것들>은 남성 성권력의 해체매뉴얼로서 기성체제의 물질적조건에 대해 공감하는 분석을 통해 복수심에 눈이 먼 비판과 피해경험의 역설을 하는 대신 기성구조의 재편성을 통한 체제내 권력확보라는 다소 어려운 길을 택하며, 여성권리신장에 있어 보다 현실적인 이미지와 구체적인 슬로건을 제시한다. 한편, 체제의 대안에 대한 기대에 부풀었던 지난날 저항의 해가 지고 눈을뜬 다음날 아침이 기성체제에서 지적되었던 부조리의 필연성에 대한 깊은 공감으로 이어지는 포스트-68 숙취의 고증은 더이상 바깥이 없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체제에서 가능한 자유의 역설적인 조건에 대한 뼈아픈 비망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