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받은 범인(凡人)의 비극

엘리트의 언어로 훈련받고 민중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

by 임찬수

교육의 기원: 지배를 위한 지식 체계


인류의 교육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 가지 명확한 사실과 마주한다. 교육은 처음부터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의 파이데이아, 중국의 경학, 중세 유럽의 스콜라 철학, 조선의 사서삼경—이 모든 교육 체계는 지배계급이 스스로를 재생산하기 위해 설계한 지적 훈련 시스템이었다.

왜 그랬을까? 엘리트는 복잡한 통치, 전쟁, 외교, 대규모 의사결정을 처리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추상적 사고, 개념적 사유, 논리적 조작 능력이 필요했다. 교육은 이러한 능력을 길러내는 기술적 시스템이었다. 즉, 인류 교육의 뿌리는 “사회 운영자 계층의 사고 체계를 전수하기 위한 도구”였던 것이다.

문제는 근대 국가가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보편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원래 극소수 엘리트를 위해 설계된 이 지식 체계가 모든 시민에게 내려왔다. 마치 F1 레이싱카 운전 매뉴얼을 모든 운전자에게 나눠주고, “이제 너희도 프로 레이서처럼 생각하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불일치의 구조: 엘리트의 경험을 가르치고 범인의 삶을 살게 하다


현대 인문·사회 교육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 불일치는 더욱 선명해진다.

경영학은 CEO의 의사결정을 모사한다. 전략, 경쟁, 리더십, 거버넌스—이 모든 개념은 조직의 최상층에서나 의미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현실의 대다수는 직원, 팀장 수준에서 일한다. 이는 마치 축구 선수 대부분은 수비수와 미드필더인데, 교육은 감독의 사고방식만 가르치는 것과 같다.

역사는 왕, 장군, 정치 엘리트의 삶과 선택을 다룬다. 기록이 남는 것은 “기록될 만한 일”이고, 그것은 곧 엘리트의 행동이다. 일반 백성의 삶은 사료가 적기 때문에 역사교육에서 주변부로 밀려난다. 우리는 나폴레옹의 전략은 배우지만, 그의 군대를 먹여 살린 병참 담당자의 고민은 배우지 못한다.

철학과 정치학은 더 극단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마르크스—이들은 평범한 개인이 평생 한 번도 겪을 수 없는 추상적 수준의 사유를 수행했다. 이들의 사유는 원래 극소수 지식인을 위한 것이었는데, 그 결과물이 모든 대학생의 필수 교양이 되었다.



졸업 후의 충격: 왜 배운 것이 쓸모없다고 느껴지는가


대다수 사람들이 사회생활에서 느끼는 혼란은 바로 이 “원천적 불일치” 때문이다. 이 불일치는 여러 층위에서 작동한다.

첫째, 교육은 추상을 다루지만 현실은 구체적이다. 교육에서는 전략, 의사결정, 윤리, 역사적 교훈을 배운다. 현실에서는 인간관계, 조직의 감정 정치, 자원 부족, 정보 부족, 압박에 직면한다. 추상적 모델을 배워 현실에 적용하려 하면 현실이 모델과 맞지 않아 스트레스와 자기 비난이 발생한다.

둘째, 교육은 엘리트의 ‘최적 해법’을 가르치지만, 현실은 ‘제약 조건 속에서의 최선’을 요구한다. MBA에서 배우는 전략은 모든 정보가 공개된 상황의 합리적 선택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현실 조직에서는 정보, 권력, 자원, 시간 모두 부족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모델 자체가 현실을 전제로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 차이를 모른 채 스스로를 탓하게 된다.

셋째, 교육은 개인의 능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현실은 구조가 우선한다. 역사 수업은 위대한 지도자들이 역사를 만들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현실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조와 제도의 영향을 받는다. 대중은 이러한 신화를 믿고 “왜 나는 세상을 바꾸지 못할까? “라고 자책한다.

넷째, 교육은 엘리트의 언어를 가르치지만, 현실은 민중의 언어로 돌아간다. 교육에서 배우는 말은 합리성, 윤리, 전략, 사명이다. 현실 조직에서 필요한 말은 눈치, 관계, 비공식 권력, 조직문화다. 두 언어 체계의 불일치를 모르면 졸업생은 충격을 받는다.



자책의 메커니즘: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실패로 내면화하기


이 불일치가 특히 잔인한 이유는, 사람들이 이것을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무능함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경영학을 배웠는데 왜 회사에서 쓸모가 없을까?”

“나는 역사를 공부했는데 왜 현실 정치를 이해하지 못할까?”

“나는 철학을 배웠는데 왜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

이러한 질문들은 모두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다. 교육이 현실에 직접 적용 가능한 도구를 제공한다는 전제, 엘리트의 사고방식을 배우면 엘리트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전제, 추상적 지식이 구체적 상황에서 즉각 유용하다는 전제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전제는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다. 엘리트의 사고방식은 막대한 자원, 권력, 정보라는 조건을 전제로 한다. 그 조건 없이 사고법만 배우면 체계적 실패와 자기 비난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의 극단적 사례: 불일치의 증폭


이 문제는 한국에서 특히 심각하다. 한국 사회는 과도한 추상교육, 현실과 사회구조의 비탄력성, 성취 중심 문화, 엘리트 언어의 과다가 결합되어 “교육과 현실의 구조적 불일치”를 극대화하고 있다.

한국의 대학 교육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추상적이고 이론적이다. 그러나 졸업 후 마주하는 노동시장은 경직되어 있고, 위계적이며, 연공서열적이다. 학교에서는 창의성, 비판적 사고, 전략적 의사결정을 배우지만, 직장에서는 복종, 인내, 눈치가 요구된다.

더 심각한 것은 이 불일치를 토로할 언어조차 없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에서 “배운 게 쓸모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곧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침묵하고, 혼자 괴로워하며, 스스로를 책망한다.



그렇다면 이 교육은 무의미한가?


그렇다면 엘리트적 교육은 범인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교육은 현실의 지도(map)가 아니라 현실의 보이지 않는 구조를 보는 렌즈(lens)다. 렌즈를 들여다본다고 해서 바다에서 바로 항해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렌즈 없이는 수평선 너머를 볼 수 없다.

엘리트의 사유를 배우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 평생 경험하지 못할 세계를 간접 체험하게 한다. 그것은 인간의 사유 능력을 확장하는 중요한 도구다. 문제는 그것을 직접적 실용성의 관점에서 평가하려 할 때 발생한다.

교육의 가치는 즉각적 적용 가능성이 아니라 개념적 방향감각을 제공하는 데 있다. CEO의 전략을 배운 평사원은 CEO가 될 수 없지만, 조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역사에서 왕의 결정을 배운 시민은 왕이 될 수 없지만, 권력이 어떻게 행사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즉, 엘리트들이 쓰는 언어(논리, 개념, 담론)를 배우면, 그들과 대화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얻는다. “나는 모르니까 너희 마음대로 해라”가 아니라 “너희 논리를 내가 이해하고 있으니, 여기서 이건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엘리트 텍스트를 배우는 순간, 그것을 엘리트에게 되돌려 주는 무기가 된다.



결론: 불일치를 인정하고, 교육의 의미를 재정의하기


우리는 솔직해져야 한다. 교육과정은 엘리트의 사유 방식의 산물이다. 그것은 범인이 일상에서 직면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 경영학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최고경영자의 언어이고, 역사는 왕과 특권계급의 이야기이며, 철학은 천재들의 추상적 사유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대신 우리는 두 가지를 해야 한다.

첫째, 교육받은 범인들이 느끼는 불일치와 자책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임을 인정해야 한다. 당신이 배운 것을 현실에서 쓸 수 없다면, 그것은 당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교육 자체가 다른 목적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교육의 의미를 재정의해야 한다. 교육은 현실의 매뉴얼이 아니라 현실을 보는 관점이다. 그것은 삶을 직접 해결해주지 않지만, 삶을 이해하는 깊이를 더해준다.

문제는 엘리트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유일한 언어인 것처럼 가르치고, 그 언어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을 실패자로 만드는 사회 구조다. 교육받은 범인의 비극은 여기에 있다. 엘리트의 언어로 훈련받고, 민중의 현실을 살아가며, 그 간극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엘리트들의 사고를 배우는 것은 ”적의 무기를 빼앗아서 적을 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동시에 “내 삶이 그들에 비해 초라해 보이는 고통”을 동반한다.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만이 결국 구조를 바꾸거나, 적어도 구조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삶을 지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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