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왜 제도가 될 수 없는가

그리고 왜 위선은 사회를 지탱하는가

by 임찬수

사랑은 본래 사적인 감정이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 사이, 연인 사이, 혹은 신과 인간 사이처럼 비대칭적 관계에서 가장 잘 작동한다. 사랑은 자발적일 때만 사랑이며, 강요되는 순간 그 본래의 의미를 잃는다. 문제는 이 사랑을 사회 전체를 규율하는 제도의 원리로 끌어올릴 때 발생한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명제는 곧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 자는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판단으로 전환된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무가 되고, 의무를 다하지 않는 자는 배신자가 된다.


이때 사랑은 폭력으로 변질된다. “내가 이렇게 너를 사랑했는데,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라는 말은 개인적 관계에서는 슬픔의 표현이지만, 집단의 언어가 되는 순간 처벌의 선언이 된다. 사랑을 명분으로 한 공동체는 배은망덕을 가장 큰 죄악으로 규정하고, 배신자를 제거함으로써 자신들의 도덕적 순결을 증명하려 한다. 그렇게 사랑은 점차 광기로, 헌신은 충성으로, 공동체는 린치의 장으로 변해간다. ‘어버이’처럼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지도자는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그 사랑에 응답하지 않는 자를 인간 이하로 취급한다. 독재는 증오보다 오히려 사랑의 언어를 통해 더 잔혹해진다.


반면 시장주의는 인간을 훨씬 냉정하게 바라본다. 이 체제는 인간이 선할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것이라 전제한다. 그러나 바로 그 냉정함 덕분에 제도는 정교해진다. 시장은 인간에게 진심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예측 가능한 행동을 요구한다. 상대를 사랑하라는 도덕적 명령 대신, 계약을 지키고 규칙을 어기지 말라는 조건을 내건다. 이기심은 숨겨야 할 결함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변수로 다뤄진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난다. 시장 사회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진심으로 위하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최선을 다해 배려하는 척한다. 이 위선은 흔히 도덕적 타락의 증거처럼 비판받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위선이야말로 사회를 작동시키는 규범이 된다. 무례하면 손해를 보고, 공정한 척하지 않으면 거래에서 배제된다. 사람들은 착해서가 아니라 이익을 위해 예의를 지키고, 그 결과 사회적 폭력은 최소화된다.


그럼 이제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한 사회주의/공산주의…”인간의 이기심을 전제한 체제”인 시장주의/자본주의…이 구분은 직관적으로 매력적이다. 사랑은 고귀하고, 이기심은 비열해 보인다. 그러나 인간 사회의 실제 작동을 들여다보면, 이 도덕적 직관은 종종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중요한 점은, 도덕이 반드시 진심에서 나올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진심을 강요하는 사회가 더 위험하다. 사랑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공동체는 언제든 그 증명이 불충분하다고 판단할 수 있고, 그 순간 폭력이 정당화된다. 반대로 위선을 허용하는 사회는 개인의 내면을 심문하지 않는다. 어떤 마음을 품고 있든, 규칙만 지키면 된다. 형식과 절차는 인간을 차갑게 만들지만, 동시에 보호한다.


결국 문제는 사랑과 이기심 중 무엇이 더 고귀한가 가 아니다. 사랑은 개인의 삶에서는 숭고한 미덕일 수 있으나, 제도가 되는 순간 폭력으로 변질되기 쉽다. 이기심은 추해 보이지만, 제도화될 때 오히려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을 제공한다. 오래 지속되는 사회는 인간의 선의에 기대지 않는다. 대신 선의가 없어도 무너지지 않는 구조를 만든다.


도덕은 마음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도덕은 마음이 나빠도 견딜 수 있는 장치 속에서 비로소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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