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예민한 하루다. 이런 날은 보통 조증에 가까워진다. 말도 세지고 세상도 쉬워진다.
아프리카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직원과 케이크를 먹으며 신나게 담소를 나눴다. 업무에 지친 우리에게 지나간 여행담은 비타민 100알 이상의 효과를 준다. 평소에 문제 행동이 잦은 직원과 얽혀있던 일도 유쾌하지도 더럽지도 않게 그럭저럭 마무리 되었다. 오후 회의에 참석해서 한껏 올라간 기분이 취해 잘난 척하며 떠들다 보니 늙어 초라해졌던 말발도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래! 이거지.’
내 멋대로 해도 누구 하나 터치하지 않고, 나는 틀림없이 잘하고 있다는 출처 모를 자신감에 도취된 순간 이러한 일들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직원이 전해준 수화기 너머에 말도 안 되게 자신의 일을 은근슬쩍 토스하려는 거래처 사람의 얕은 속내를 눈치채는 순간 나는 급발진 공격 모드로 전환된다. 위험할 때 위험을 눈치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위험을 눈치 채고도 막나가는 무모한 사람은 더욱 드물다. 내가 그 드물고 드문 사람 중 하나다.
‘지지 않아. 절대로!’
살아난 말발과 내 맘대로 논리로 '다다다다' 실컷 퍼부어대고 정신이 돌아올 때쯤, 나는 약간의 어색함과 민망함을 느낀다.
뭐지? 수화기 너머 소름 돋을 정도의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는 저 얌체는…….
세상 교양이란 교양은 다 장착한 듯,
‘난 알아볼 것 다 알아봤으니 맘껏 흥분하렴! 이 대화 끝의 결론을 이미 나는 알고 있어.’ 라며 여유를 부리는 상대방에게 이미 패배를 인정한 우스운 꼴이라니.
인간의 나약함에 대해 작가 한강은 ’저 살과 장기와 뼈와 목숨들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끊어져버릴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라고 썼다. 100퍼센트 공감한다.
간혹 찾아오는 ’대략난감조증‘을 조용히 비껴가기 위해 오늘의 나는 잠시 멈춰선다. 퇴근 후에도 이어지는 평범하지 않은 자잘한 사건, 사고들에 나의 조증이 힘없이 꼬리를 내린다. 커피숍 구석 자리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마음을 적는다. 나약한 나는 오늘 하루도 베이지 않기 위해, 부서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다독여 제대로 조율된 조악한 선 위에 초라한 자신을 끌어다 놓고 무사히 하루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