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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도 결국은 인생 1회차

사실 나도 잘 몰라요

by 구르미


"르미 팀장, 이거 본 거야?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잖아.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몰라? 신경 안 쓸래? 가이드를 해줘야 할 거 아냐? 자꾸 이러면 다른 팀에 시킨다!"


벌써 네 번째 보고였다. 오늘도 결국 깨졌고, 보고서는 다시 처음부터 싹 다 뒤집어써야 했다. 이번 보고의 담당은 소정님이었지만, 소정님이 다른 일로 바빴기에 내가 대신 자료를 만들고 보고만 소정님이 했다. 결국은 내 보고였다.


상무님이 "이거 본 거 맞아?" 하고 물었을 때, "사실 제가 만들었습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나 싶었는데 말한다고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도 않았기에 결국 꿀을 머금은 듯 옆에서 입을 다물었다.


회의가 끝난 뒤, 빈 회의실에서 소정님과 마주 앉았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 건 정말 어렵네요. 저도 이 정도면 될 줄 알았는데…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전에 내가 팀원이었을 때, 내 위에 있던 팀장님은 이런 상황에서 늘 화부터 냈다.


"르미야, 네가 잘했어야지! 알아서 딱 잘 못해? 너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잖아? 오늘 밤까지 다시 해서 보내!"


그때는 알아서 잘하라는 말이 너무 싫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알잘딱깔센 몰라? 이럴 땐 그냥 때려치울까 하는 현타까지 왔다.

제대로 알려주고나 시켜야지, 명확한 설명 없이 그냥 다시 하라는 말만 들으면 멘붕에 빠질 수밖에 없다.

알잘딱깔센이라지만, 적어도 사과를 그릴지 포도를 그릴지는 알려줘야 색을 칠하든 명암을 넣든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왜 매번 말이 바뀌는 건지. 이렇게 하라고 해서 했더니 그게 아니란다. 그래서 한 번은 녹음을 한 적도 있었는데, 밥상뒤집기 할 때 전에 이렇게 말하셨잖아요.라고 대꾸하려다가.. 결국 내가 다음에 가야 하는 문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이기에 그냥 꾹 참았다. 만약 그분이 다른 팀으로 가지 않았다면 난 그 자료를 다 모아서 언젠가 인사팀에 보내고 퇴사를 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런 최악의 상황은 안 벌어졌기에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나 싶다.


그래서 나는 내 팀원과 일할 때 잘못한 게 있으면 먼저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 당시 난 정말 그 말이 듣고 싶었으니까. 생각이 있다면 잘못한 걸 알 텐데, 자기반성을 안 하는 건지, 자기는 언제든 옳다고 생각하는 건지, 일부러 강해 보이려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집에 가서 와이프에게도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하긴 했다. 요즘 같으면 그랬다간 바로 쫓겨날 테니까.




옛 생각에 잠겼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하면 되죠?'라고 묻는 듯한 소정님의 눈빛이 날 향하고 있었다. '팀장님은 분명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죠?'라는 듯 눈을 더 깜빡이는데.. 왠지 무섭기까지 했다.


왜냐면, 나도 모른다고. 나도 너랑 똑같이 멘붕이고 답이 없어. 나도 어차피 똑같은 월급쟁이고 팀장 1 회차라고..


하마터면 입 밖으로 푸념을 쏟아낼 뻔했지만 다행히 정신을 차리고 입 밖으로는 다른 말을 꺼낸다.


"자, 소정님이라면 여기서 어떻게 말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이걸 이렇게 바꿔 말하면 어떨까요?"

"아, 그 생각 좋네요. 그럼 이렇게 변형해 볼까요?"

"네, 거기에 이걸 더 넣어도 좋겠어요. 제가 정리해 둔 게 있어요."

"아, 다행이에요. 그나마 이제 좀 방향이 잡히네요!"


오늘 끝낼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대화를 하며 브레인스토밍을 했더니 다행히 희망이 보였다.

내 자존심만 내세우며 깊은 생각 없이 독단적으로 지시했다면 오늘 있었던 게 그대로 반복될게 불 보듯 뻔했을 것이다. 그럼 그때는 상무님은 폭발하고, 이 일은 다른 팀으로 가고 난 무능한 팀장이 되겠지.


물론 이런 방식 심적으로 쉽진 않다. 내가 잘 모른다는 걸 인정해야 하니까. 하지만 팀플레이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내가 안다고, 내가 잘나서 혼자 다했다고 월급이 두 배로 오르는 것도 아니니까. 특히 팀장은 팀의 결과가 좋아야 결국 내 성과도 좋아진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도 잘 모른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협업이 필요하다.


조금만 내 자존심을 내려놓으면, 훨씬 쉬운 길이 열린다. 그게 내가 인생 1회 차에서 찾은 작은 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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