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모를 싸함이 밀려온다. 누구지?
예전에 팀원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일이 끝났으면 얼른 퇴근들 하세요. 나도 일 끝나면 여러분들이 바쁘게 일을 하든 말든 집에 갈 거예요. 퇴근은 미안할 게 아니라 당연한 겁니다."
"그리고 퇴근할 때 인사하고 가지 마세요. 만약 제가 일이 바쁜데 누가 집에 간다고 하면, 저도 모르게 기분이 안 좋아질 것 같거든요."
그 말을 하고 혼자 뿌듯해했다.
'그래, 난 깨어 있는 리더야.'
그런데 금요일 오후,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니 사무실이 텅 비어 있었다.
같이 나눠서 해야 할 일이 잔뜩 생겼는데, 이미 다 퇴근한 사람들을 다시 부르기도 그렇고, 혼자 하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독박 야근을 선택했다. 그것도 금요일 저녁에.
공허한 마음에 뱃속까지 허전해져 일단 밥부터 먹기로 하고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스마트폰을 보는 것도, 음악을 듣는 것도 아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일 생각뿐이었다. 좀비처럼, 눈은 뜨고 있었지만 로봇처럼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유난히 한산한 금요일 저녁, 식당 가는 길에 어린 친구 한 명이 걸어오길래 그냥 스쳐 지나가려 했다. 스치며 눈이 마주쳐서 예의상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 친구는 신입사원 같았다. 더 깍듯하게 인사하는 걸 보니, 역시 신입사원 교육 때 ‘인사는 잘하라’는 말이 있었나 보다. 대부분의 신입사원은 인사를 잘한다. 그렇지만 그 열정도 반년쯤 가려나? 매년 신입이 들어와서 인사 총량이 유지되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쟤는 언제까지 인사를 잘할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지나치는데, 갑자기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뭘 떨어뜨렸나?’ 하고 돌아봤다.
"저, 혹시 저 면접 보셨던 면접관님 아니신가요?"
"아, 네. 맞아요. 기억나네요."
사실 수십 명을 면접하다 보니 바로 기억나진 않았지만, 다시 보니 그 친구였다. 지식이 아니라 논리적 추론으로 전공 심화 문제를 풀어냈던, 인상 깊었던 지원자.
그때도 합격할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입사한 모습이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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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가 이렇게 입사할 수 있었어요."
‘아, 나 혼자 정한 게 아닌데… 서류전형도 있었고, 다른 면접관도 있었고, 임원 면접도 있었는데.’
과한 감사 같아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 별말씀을요. 어차피 다들 보는 눈은 비슷해요. 면접을 잘 보셔서 뽑힌 거예요. 입사 축하드려요. 저는 될 줄 알았어요."
"그때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 네. 혹시 어느 팀이에요?"
이름을 물어봤다간 까먹을 것 같아서 자연스럽게 팀을 물었다. 조직도에서 찾기 쉽겠다 싶어서.
"네, 전 소형 패널 설계팀입니다."
"아, 좋은 팀이네요. 축하해요!"
그렇게 짧은 대화를 마치고 나는 식당으로, 그는 사무실로 갔다.
마치 오래전 무한도전에서 "오빠 나 몰라?" 하던 장면처럼 멍했지만, 다행히 기분 좋은 멍함이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마치 내 지인이 입사에 성공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리로 돌아와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일을 끝내고, 조직도를 검색했다.
‘아, 얘구나.’
아마 큰 의미 없이 인사한 걸 텐데, 괜히 고마운 마음이 들어 메신저 창을 열었다.
"먼저 아는 척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면접 때 대부분 외운 대로 답하거나 엉뚱한 답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아주 정확한 추론으로 답을 찾아내서 기억에 남았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건 회사에서 배우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많이 배우고 물어보고 성장하시길 빕니다. 입사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오후 10시라 월요일 오전 8시로 예약 발송을 걸고 퇴근했다.
그리고 다음 주.
8시가 지나자 답장이 왔다.
"이렇게 메시지를 주실 줄 몰랐습니다. 면접 마지막에 제 질문에 좋은 피드백을 주셔서 저도 기억에 남습니다. 말씀해 주신 대로 더 많이 배우고 성장해 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물론 오늘도 깨질 일은 산더미지만, 괜히 아빠 미소가 지어졌다. 회사 생활 18년 차와 1년 차. 아직 영화 인턴만큼의 세대 차이는 아니지만 기분이 좋았다.
아마 앞으로 그 친구를 다시 볼 일은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나랑 연관 없는 부서고, 협의할 일이 있더라도 팀원들이 할 테니까. 그래도 왠지 잘 컸으면 좋겠다. 회사에서 많이 배우고, 똑똑해지고, 18년 뒤엔 나처럼 이런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오늘도 우리 팀원들은 다 갔구만.
홀로 남은 사무실의 한기가 귓가를 스친다.
모르겠다. 나도 그냥 가야지.
그 신입사원보다 더 귀여운 아이와 아내가 있는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