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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대기업 임원의 생존 게임이 시작된다

누가 죽고, 누가 살고, 누가 새로 임원이 될 것인가?

by 구르미

선선한 바람에 더위가 한풀 꺾이고, 카디건을 찾게 되는 걸 보니 벌써 가을이다. 달력을 보니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 연휴는 개천절 연휴까지 더해져 기본이 일주일을 쉬고, 금요일에 휴가를 낸다면 장장 10일의 연휴를 쉴 수 있어서 팀원들은 어떻게 연휴를 보낼까 즐겁다.


하지만, 임원분들에게 날씨가 선선해지고 추석이 가까워진다는 건 내년에도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없을까 하는 평가의 시즌이 가까워 짐을 의미하고, 임원과 엮인 팀장들에게는 그들의 긴장감과 불안감이 그대로 투영된다.


임원이 바뀐다는 것은 우리 부서에서 과거/현재/미래에 진행한/할 프로젝트를 zero-based로 설명하고 설득하고 재수립하기 위한 끝없는 야근과, 새로운 임원과 친해지기 위한 회식과, 잘 보이기 위한 눈치 싸움을 의미하기 때문에 나에게도 매우 민감한 문제다. 올해는 어떻게 지나갈까?


누가 남고, 누가 갈까? 생사의 기준


옆 팀에 경력 입사 동기 이수 팀장이 오랜만에 메시지를 보내왔다.


"르미야, 혹시 우리 임원 내년에 어떻게 된다는 이야기 들은 거 있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내가 무슨 인사팀이냐? 그나저나 최상무 님은 그럴 걱정 없는 거 아냐? 순혈이잖아. 공채로 승승장구해서 올라오신 분."

"최상무 님 말고, 그분이야 뭐 자리는 바뀔 수 있어도 계속하시겠지. 올해 새로 온 김상무 님 말이야. 나 업무 바뀌어서 지금 김상무 님 밑에서 일하잖아."

"아, 올해 전문가로 새로 초빙돼서 오신 분? 근데 그분 영 눈치가 없는 거 같아. 사장님 보고 내용 전해 들을 때 있는데 사장님이 원하시는 걸 제대로 캐치 못하고 헛소리만 해서, 요즘은 사장님도 안 찾으신다던데?"

"그러게 말이야. 여긴 국책기관이 아닌데 너무 예전에 자기가 대장이었던 시절을 못 버리시나 봐. 그래서 내가 걱정이 많다. 그분 교육시키는 데에도 한참 걸렸는데, 또 바뀌면 다시 시작인 거잖아. 그분 가면 누가 올런지. 너도 알잖아. 내 업무가 좀 전문적인 거라 다른 계열사에서 일하던 임원들도 올 자리가 못 되거든. 매년 이러는 거 아닐까 걱정이다."

"그래도 언젠가 괜찮은 사람이 오겠지. 민수가 있는 개발팀에 온 상무 봐봐. 그래도 잘 적응하잖아."

"그 상무님이야 경쟁사에서 왔으니까 더 떠 받들어 주는 것도 있지. 대하는 거 자체가 다르잖아."

"그러게. 그래도 너네 상무 내년까지는 하겠지. 임원 계약이 보통 3년 이잖아."

"그렇지. 근데 요즘 인사팀 보면 계약 기간 그런 거 의미 없는 것 같더라고. 전에 수잔 상무 그냥 위약금 주고 보냈잖아."

"그러게나 말이다. 우리도 언제 잘릴지 모르니 닭 튀기는 거라도 배워놔야겠다."

"난 닭 싫다. 차라리 삼겹살을 구우련다."

"뭐든 애들 대학까지는 보내자! 얇고 굵게!! 그런 의미로 내일 술이나 한잔 하자~"


나 살기도 바쁜데 임원의 생사까지 신경 써야 하니 더 서글프다. 임원이 되어도 위 눈치를 봐야 하니 그냥 창업을 하는 게 나을까도 싶다가, 돈 될만한 아이템이 없기에 그냥 포기하고 실적보고서를 작성한다.


겉으로 보이진 않지만 명백한 임원의 계급도


오너가 경영하는 회사의 경우, 겉으로 명확히 보이는 구분자가 있다. 오너와 같은 성씨 이거나, 오너와 닮았거나, 오너와 친하다면 진골이고, 그 외는 지방호족쯤 될 것이다.


말만 잘 듣는다면 지방호족도 계속 유지할 수 있겠지만, 여간하면 진골의 영역까지는 넘보기 어렵다.


하지만 전문경영인 체제의 큰 회사는 조금은 다른 계급도가 있다. 몇 가지를 나눠보면,


1. 깊이 박힌 돌 (고인물)

공채로 회사에 입사해서 오랜 기간 회사에 충성을 바친 인물. 성과가 좋기도 했지만 그만큼 회사에 올인했고, 정치도 잘했고, 회사가 곧 자신인 사람. 어느 정도 운도 따랐지만 그 노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장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정년까지는 갈 가능성이 높은 사람. 언제나 성과 중심으로 사장과 그룹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에 맞춰 기민하게 반응한다.

이런 임원 밑에 있으면 갑작스럽게 엄청난 업무가 밀려오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편안한 기분이 든다.


2. 살짝 박힌 돌 (덜 고인물)

똑같이 공채로 와서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임원 된 지 얼마 안 된 사람. 아직 확실한 신임을 받은 것은 아니므로 성과에 집착하지만 윗분들의 니즈를 완벽히 이해하긴 경험치가 부족해서 헛발질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아래에 있는 팀장들이 고생지만 현타가 오는 경우도 많다. 간혹 나보다 더 젊은 사람이 발탁 승진되어 족보가 애매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어쩌겠는가, 반말을 해도, 하대를 해도 참아야지.


3. 굴러온 돌

공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온 사람. 크게 관계사에서 온 분과 타 회사나 학교에서 온 분으로 나뉜다.


3.1. 관계사 전배

관계사에서 전배온 분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실력을 인정받고 경영자 코스로 계열사를 로테이션하는 경우와 은퇴를 앞두고 안식년 개념으로 오는 경우가 있다.

전자의 경우 프라이드가 엄청나고, 뭔가 하려는 의욕도 강하다. 내심 옮긴 계열사의 수준을 기존 계열사 대비 낮게 보는 경향이 많아 우리 회사 사람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후자의 경우 실무보다는 지원 부서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고, 있는 듯 없는 듯 있다가 퇴직하시는 경우가 많다. 간혹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는 경우도 있지만, 주변에서는 이미 잠정적 은퇴로 보기 때문에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도, 호응해 주지도 않는다.


3.2. 외부 채용

외부에서 데려오는 경우는 신사업일 경우가 많다. 요즘 가장 핫한 AI도 내부에서는 전문가를 찾기 어렵기 때문에 외부 인재를 채용했다. 그런데 문제는 회사에 대해서 이해도가 낮은 경우가 많다. 학교나 해외 회사에서 다니다가 온 경우 국내의 극한 희생정신에 대해서 공감하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초기에는 외국인을 채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검머외(검은 머리 외국인)를 채용하는 경우가 더 늘고 있다. 실제 국내에서 일하지 않았더라도 그들은 한국어를 할 줄 알고 한국 문화를 익히 들어왔기에 그나마 노란 머리 외국인보다는 적응이 양호하다.

이런 분들은 결국 3년이 고비다. 3년 내에 적응하고 결과를 내면 남겠지만, 그때까지도 정신을 못 차린다면 3년 전에도 집에 갈 수 있다.


어떤 임원이 오래 다닐까?


그럼 과연 어떤 임원이 오래 다닐까? 내가 지켜본 바로는 눈 있는 임원이 오래 다닐 가능성이 높다. 사장님과 인맥이 끈끈한 사람도 오래 다닐 수 있지만, 오너 회사가 아닌 이상 사장님도 언젠간 바뀌게 되고, 인맥으로만 엮인 임원들은 순장처럼 같이 사라진다. 그래도 눈치가 있는 임원은 그런 상황에서도 미리 준비하고 자기가 꼭 필요하단 사람이란 걸 보여줘서 연명하기도 한다.


사실 어떤 임원이 오래 다닐지 안다고 해도, 내가 내 위에 임원을 고를 순 없는 거 기에 일단은 내 위에 임원분이 좋은 보고를 할 수 있게 좋은 아이디어를 모으고, 그 아이디어를 보기 좋게 가다듬는 게 내가 할 일이다. 더 생산적인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지금 날 원하는 곳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최대한 잘하는 게 임원뿐 아니라 내가 오래 다닐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임원이 되자는 생각은 한 적도 없고, 지금 생활도 어차피 힘드니, 무시받지 않고 오래 다니기만 해도 좋겠다. 지긋지긋한 임원 driven life. 그 끝은 은퇴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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