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한 부하직원을 망치는 방법

그 많던 똑똑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by 구르미


예전에도 그렇지만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임금 차가 커지고, 공무원에 대한 선호도도 낮아지면서 취업시장에서 대기업 쏠림 현상이 더 커졌다. 심지어 코로나 이후 경력 선호 현상이 더 심해지면서 대부분의 대기업은 공채를 없애고 수시채용으로 전환하는 추세다. 외형적으로는 대기업이라고 하기 민망하지만 대기업 계열이란 이유로 우리 회사도 지원하는 친구들을 보면 스펙이 어마어마하다. 상위권 대학을 떠나 해외대도 많고 다들 학점도 엄청나고 해 왔던 경험도 각양각색이다. 그런 친구들을 2차, 3차에 걸쳐 선별하니 그래도 나름 괜찮은 친구들이 뽑힌다.


그런데, 그렇게 똑똑하고 날고 긴다는 친구들이 일 년 정도만 지나면 왜 의욕을 잃고 그냥 그냥 기계적으로 회사를 다니는 식물인간이 되어 버리는 걸까?


난 이 이유가 전적으로 리더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리더가 부하직원을 망치고 바보로 만드는 걸까? 내 위에 계셨던 분들과 내가 옆에서 봤던 분들을 떠올려 보며 일부 과장을 섞어 유형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요즘은 이렇게 막말 했다간 바로 인사팀 고발각이다.)


1. 알아서 잘해


"르미야, 신규 투자 관련해서 보고서를 만들어야 해. 사장님 취향 알지? 내용이 명확하게 보이고 깔끔하게 잘 만들어봐. 믿는다."

오후 5시, 이렇게 말하고 그는 떠나버렸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거지? 무엇을 얘기해야 하고 무엇을 강조해야 하지? 모호한 상황에서 과연 원하는 게 뭐일지 상상의 나래를 펴가면서 자료를 만든다. 상상으로 만들다 보니 불안하지만, 퇴근 후에 팀장님에게 전화하는 것은 괜한 욕을 먹기 십상이다.

"내가 말하는걸 왜 이해 못 하지? 알잘딱깔센 몰라? 너 MZ잖아?" 이런 답이 돌아올게 안 봐도 뻔하다.

다음 날 아침, 충혈된 눈으로 팀장님에게 밤새 만든 보고서를 내민다.

팀장님은 첫 페이지만 보고 바로 책상을 두드린다.

"르미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이건 이게 아니지. 이렇게 했어야지. 다시 해와!"

'야, 네가 제대로 말을 해줘야지 알지, 내가 무슨 독심술이 있냐? 그냥 네가 해! 더러워서 원.'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이것 때문에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었기에 참고서,

"네, 다시 해보겠습니다. 혹시 뒤에 준비한 것까지 한번 봐주실 수 있을까요?"

"사장님이 시간이 많은 줄 알아? 첫 페이지가 아니면 뒤에까지 가지도 못해. 다시 해와!"

그렇게 밤새 준비했던 12장짜리 보고서는 첫 장에서 까이고 나머지는 읽히지도 못하고 내 수고도 헛수고로 돌아갔다. 진심 도망치고 싶었다. 왜냐면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모르는데, 난 또 상상의 나래를 펴야 하니까.

내가 호감 가는 이성의 마음을 얻기 위함이라면,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펴도 즐겁겠지만, 나를 탐탁지 않아 하는 팀장에게 보고해야 하는 자료는 다시 들춰보기도 싫다.

그렇게, 내 의욕과 창의성은 사라졌고, 판단력은 퇴근해 버렸다. '아, 어떻게 다시 해야 하지.'


2. 오늘의 날씨, 아니 오늘의 기분


조용한 사무실, 허공을 가르는 키보드와 마우스 소리만이 이 정적을 가른다. 얼마 전까지 같은 사무실을 쓰던 영업팀은 업무의 특성인지, 외국 출신이 많아서인지 하루 종일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업무 이야기뿐 만 아니라 팀원 간의 스몰톡과 그 피드백으로 큰 웃음. 시끄럽기도 했지만 부럽기도 했다. 우린 다들 할 말이 없었으니까. 영업팀 마저 다른 팀으로 이사한 지금, 사무실에는 고요함만 남았다.


그 고요함을 깨는 소리가 들린다.

"이걸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해? 내가 이거 다시 써야 해? 어떻게 일을 맡길 수가 없잖아. 너 이거 이제 하지 마. 야, 민수. 이거 네가 해."

망했다. 오늘 팀장님의 기분은 흐림인 듯하다.

다음 보고가 내 보고인데, 보통 흐린 날씨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잔뜩 긴장감을 갖고, 애써 웃음을 지으며 집무실로 들어간다.


"그때 지시하신 현황조사 결과 보고드립니다."

"그거 사장님 보고할 건데, 잘한 거 맞아? 저번처럼 또 대충 한 거 아냐? 제발 나 좀 살려줘라. 바로 보고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자료를 만들라고."

"네, 그때 주셨던 코멘트 모두 반영했습니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 그럼 한번 봅시다. 이거 말고 그거 현황은 어떻게 되지?"

"아, 그건 지금 바로 찾아보겠습니다."

"너 이거 담당 아냐? 담당이면 물어보면 바로바로 튀어나와야지. 너 요즘 일 신경 안 쓰는 거 같다?"


역시나, 흐린 날씨는 갤 기미가 안 보인다. 보고한 거 말고 다른 것으로 옮겨가더니 결국 보고서의 방향이 또 새롭게 바뀌었다. 내가 뭔 GPT인가? 나한테 물어보면 다 답이 나와야 하게?

부디 다음 보고 때는 맑은 날씨이길 바라본다. 다음 사장님 출장이 언제지?


3. 성과는 내 것, 실패는 네 것


내가 맡았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실적 관리였다. 실적이 늘면 왜 늘었는지, 실적이 줄면 왜 줄었는지 그 이유를 보고해야 했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존에 정리했던 실적이 줄거나 느는 이유를 다른 지표랑 연계해서 실적이 늘지, 줄지 전망하는 시뮬레이션을 해보면 어떨까? 였다. 물론 귀찮기는 해도 이렇게 해두면 실적 관리도 더 쉬워질 수 있을 듯했다.

예전에 배웠던 파이썬을 이용해서 자동화 로직을 걸고 조촐한 시뮬레이션을 만들고 팀장님에게 보고했다. 팀장님은 시큰둥하게 반응하더니, 보고 자료를 간단히 만들고 시연 동영상을 찍어 달라고 했다. 나도 내가 한걸 자랑하는 자료기 때문에 하루 만에 기분 좋게 만들어서 드렸다. 나중에 팀 주간회의에서 보고하는 정도라도 내 수고를 인정해 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며칠 후 총무팀 동기에게 연락이 왔다.

"르미야, 너네 팀 이번에 공적상 받더라? 실적 시뮬레이션 만들었다고 받는다던데."

"아, 그거 내가 만든 거야."

"어? 아니던데, 너네 팀장이 대표로 만든 걸로 되어 있던데?"

"아...... 그래. 뭐 다 상금 받는 거니 좋은 게 좋은 거지."

"그거 대표가 50% 받고 나머지가 50%를 나눠 갖는 거라 넌 10만 원 정도 나오겠네."

"그럼 우리 팀장이 500 받는 거야?"

"아마 그 정도 될걸?"


신고해야 하나 싶었는데, 그랬다간 내 자리가 없어질 것 같았고,

협박해야 하나 싶었는데, 그런 걸 들어줄 사람이면 자기 이름으로 올릴 리도 없겠거니 싶었다.

잔다르크처럼 다 터트리고 쿨하게 떠나고 싶었지만,

난 의욕을 잃은 채 그냥 그런 x무원이 되었다.


4. 내가 니 아바타야?


지독한 워커홀릭 팀장과 능글능글 뺀질이 팀장 중에 그래도 워커홀릭 팀장이 나을 거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일에 미쳐 있으니 뭔가 배울 게 있을 듯했다. 그런데 뺀질 팀장만큼 워커홀릭 팀장도 최악이었다. 워커홀릭 팀장은 모든 일에 다 참견했다. 보고서의 문구 하나하나, 심지어 줄간격, 표 높이, 색깔, 여백...

팀장님에게 초안을 보내면 팀장님이 추적옵션을 켜놓고 혼자 검토하며 수정하시는데, 답장을 받아보면 옆에 수정된 사항이 한가득이다. 이럴 거면 뭐 하러 나한테 시켰지?


수정한 내용을 다 반영하고 나면 현타가 오며 자괴감이 든다. 난 왜 있는 거지? 이럴 거면 더 고민 안 하고 대충 해도 될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잘할 수 있는데, 그래봤자 팀장님이 다 고칠 테니. 난 또 의욕이 없는 팀장님의 아바타가 되었다.


그 외에도 '말 바꾸기 달인', '자신의 최애만 챙기는 최애의 팀장', '자신만 크길 바라는 새싹 밟기 달인', '절대 타인을 믿지 못하는 무한 의심', '귀를 닫은 사오정' 등 유능한 신입의 의욕을 떨어트리고 반짝임을 잃게 하는 팀장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래서 그렇게 똑똑했던 신입사원은 왜 망가지나?


여러 사례에서 정리하면, 결국 ‘심리적 안전감’과 ‘자율성’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신입사원이 의욕을 잃는 지점은 바로 “이제는 말해도 소용없다”, “내가 뭘 해도 바뀌지 않는다”라는 체념 상태이다.


이게 쌓이면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으로 이어져, 유능한 사람조차 평범하거나 무능해 보이게 된다.


“결국 부하를 망치는 가장 큰 이유는, 의견을 말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것”


항상 난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데, 나도 그런 나쁜 팀장이 아닐지 항상 스스로를 반성하게 된다. 나 역시도 크게 힘들고, 아프고, 어려웠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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