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함만으로는 팀을 지킬 수 없고, 냉정함만으로는 사람을 이끌 수 없다.
이번 추석 연휴는 유래 없이 길었다. 다들 어디로든 떠난다며 들떠 있었지만, 나는 여행 일정을 잡지 못했다. 이런 연휴에는 늘 긴급한 일이 생기기 마련이었고, 하루 이틀만 쉬고 출근하는 게 예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정말 오랜만에 특별한 일 없이 온전히 쉴 수 있었다.
급하게라도 여행 계획을 세워봤지만, 이미 숙소는 예약이 끝난 지 오래였다. 남은 곳은 가격이 유럽 수준이었다. 결국 부모님 댁에 들렀다가, 가까운 곳으로 바람이나 쐬러 가기로 했다.
그렇게 여유로운 연휴를 보내고 있는데, 초등학생 아들이 글러브를 사달라고 했다. 엄마와 이미 마트에서 봐둔 게 있었는데, 아빠의 허락을 받으려는 모양이었다. 어릴 적 동생과 공을 던지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외동인 아들이 왠지 안쓰러워서, 그날 저녁 바로 마트에 가 제일 저렴한 글러브를 사줬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야구 지옥이 시작됐다. 아파트 단지, 처갓집 거실, 공원… 연휴 내내 공을 던지고 또 던졌다.
연휴 마지막 날, 아이가 문득 이런 말을 했다.
“아빠, 내가 그렇게 짜증내고 화내도 항상 친절하게 해줘서 고마워. 나라면 그렇게 못할 것 같아.”
“넌 내 아들이잖아. 네가 짜증을 내도 화를 내도, 그 모습이 다 예뻐서 화가 안 나.”
“이상해.”
“그게 아빠 마음이야.”
그날 밤, 아이의 잠든 얼굴을 보며 근래 함께 시간을 많이 못 보낸 게 미안해졌다. 이번 주말에도 꼭 같이 놀아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이 방을 나와 서재에 앉았다. 내일부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회사 시스템에 접속하니, 휴일임에도 생산라인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혹시 모를 이슈가 있으면 미리 알아두는 게 낫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지만, 한 통의 메일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팀원 평가 진행 일정 공지’
불편한 시즌이 시작된 것이다. 누굴 S로, 누굴 D로 줄 것인가.
연휴 전, 상무님께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르미야, 진수 있잖아. 요즘 성과가 너무 안 나와. 이런 식이면 D 줘야 해.”
“아, 네. 잘 챙겨보겠습니다.”
“조심해. 니네 팀에 D가 두 명 나올 수도 있어.”
진수님은 우리 팀에 자원해서 온 지 아직 1년도 안 된 분이다. 민식님이 화려한 스트라이커라면, 진수님은 조용한 센터백 같다. 시키지 않아도 오류를 막기 위해 꼼꼼히 검토하고, 묵묵히 일한다. 하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정기 면담 때마다 “성과가 드러나는 일도 해보면 좋겠다”고 조언했지만, 쉽게 변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낮은 평가를 줄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사실, 누구에게도 낮은 평가를 주고 싶지 않았다. 다들 자식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난 ‘아빠 같은 팀장’이 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빠 같은 팀장’이 정말 좋은 팀장일까?
아빠는 자식을 쉽게 혼내지 못한다. 부족해 보여도 스스로 깨닫길 기다리고, 대신 방향을 잡아준다. 팀장이 이런 태도를 가지면, 팀은 따뜻하지만 성장하기 어렵다. 일의 기준이 애정으로 흔들리기 때문이다.
반대로 떠오른 건 ‘조교 같은 팀장’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에겐 낯설겠지만, 예전에 수련회에 가면 항상 조교가 있었다. 빨간 모자를 쓰고, 엄하게 지시하던 그 사람. 그는 개인 감정을 섞지 않았다. 오늘 만난 사람도, 내일 떠날 사람도 똑같이 엄하게 대했다.
매번 같은 레퍼토리였지만, 그 말이 떠오른다.
“여러분이 하는 것에 따라 전 악마가 될 수도 있고, 천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목소리가 작습니다. 정신 차리기 위해 팔벌려뛰기 10회 합니다. 10회! 몇 회? 9회! 시작!”
어찌 보면, 그게 그들의 역할이었다. 정은 없지만, 정해진 원칙에 따라 냉정하게 최선을 다했다. 말을 안 들으면 겁을 주고, 말을 들으면 풀어주는 식이었다. 어쩌면 로봇처럼 일관된 존재들이었다.
아빠 같은 팀장은 따뜻하지만, 때론 성과가 낮을 수도 있고, 때론 불공정할 수도 있다. 팀원을 아끼다 보니 싫은 소리를 못 하고, 그게 성장을 방해한다. 의리를 따지다 보면 친밀도나 개인 사정에 따라 평가가 흔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팀장은, 결국 성과를 내야 하는 자리다. 조직을 운영하는 사람이지, 가족을 돌보는 아빠는 아니다.
나는 요즘 냉정과 열정, 그 사이에서 고민한다. 팀원들의 성장을 돕고 싶지만, 감정이 개입되면 판단이 흐려진다. 그렇다고 마음을 닫고 조교처럼 일만 따지자니, 팀의 온기가 사라진다.
결국 좋은 팀장은,
‘아빠의 마음을 가진 조교’가 아닐까 싶다.
따뜻한 눈으로 사람을 보고, 냉정한 손으로 일을 다루는 사람.
그런 팀장이 되기 위해, 오늘도 서재에서 늦은 밤까지 앉아 있을 듯 하다.
내일 진수님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현실을 직시하라 말할까, 아니면 좋은 말로 다시 잘해보자고 할까.
이래서 다들 팀장하기 싫어하는 모양이다.
이럴 때면, 나도 팀장하기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