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통해 삶을 비추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톨스토이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이런 거대한 작품들이 따라붙는다.
언젠가 꼭 읽어야지 하면서도, 막상 손이 가지 않았다.
왠지 너무 무겁고, 딱딱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던 중, 그가 인용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눈에 들어왔다.
죽음 앞에서 불안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를 이야기하던 그 문장.
묘하게 마음에 남았다.
며칠 뒤, 민음사 창고 세일에 들렀다가 우연히 그 책을 만났다. 책 표지의 검은색 활자들이 이상하게도 조용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런저런 핑계로 사두고 한참을 묵혀두었다가, 어느 날 문득 책을 펼쳤다.
그리고 단 두 시간 만에 마지막 장을 덮었다.
짧았지만, 깊은 여운이 남았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제목 그대로, 한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의 시작이 이미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후라는 것이다.
그의 동료와 지인들이 그의 부고를 듣고 각자의 계산과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문이 열린다.
죽음의 순간조차도 철저히 사회적 계산 속에 놓인다는 사실이, 시작부터 섬뜩했다.
그 후에야 독자는 이반 일리치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똑똑하고 성실했던 그는, 사회적으로도 성공적인 인생을 산다.
법관의 자리, 반듯한 가정, 사교 모임, 안정된 삶.
겉보기엔 완벽했다.
하지만 어느 날, 설명할 수 없는 통증이 찾아온다.
그는 그것을 단순한 근육통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통증은 점점 깊어지고, 불안이 그의 일상을 잠식해 간다.
의사는 무심하게 병명을 말하지만,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는다.
희망을 가졌다가, 다시 절망으로 떨어지는 순간이 반복된다.
“왜 하필 나인가?”
이반 일리치의 절규가 종이 너머로 전해졌다.
그의 분노와 원망, 그리고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몸부림은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누구나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 같았다.
이반 일리치가 살던 시대에는 병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커튼을 치다 삐끗한 것이 아닐까, 맹장일까, 신장일까 하며 불안에 시달린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어떤 병인지, 얼마나 살 수 있는지 너무도 빨리 알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빠름이 때로는 잔인하다.
작은 희망조차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죽음 그 자체보다, 죽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더 날카롭게 보여준다.
동료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는 승진을 계산하고, 가족은 의무감으로 곁을 지킨다.
죽음조차 사회적 관계 속에서 소비되는 모습.
그 잔인한 현실감이 책을 덮은 후에도 오래 남았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결국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이야기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야 깨닫는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남들이 옳다고 말한 방식’이었다는 것을.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진짜 삶을 바라본다.
책을 덮고 나서 생각했다.
나는 얼마나 ‘살아 있는 삶’을 살고 있을까.
누군가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할 수 있을까.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진실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의 이야기이지만, 결국 삶을 말하는 책이었다.
우리가 외면해온 삶의 본질을,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비춰주는 거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