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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nna Dec 20. 2021

아들과 바꾼 이름

 내 이름은 참 흔하다. 학창 시절엔 한 반에 같거나 비슷한 이름이 서너 명은 꼭 있을 만큼 흔해 빠진 이름이며  고등학교 절친이었던 친구도 똑같은 이름이라 학교 선생님들께서는 우리를 큰 아롱이, 작은 아롱이라고 부르셨다. 내 친구가 나보다 딱 1센티가 더 컸기 때문이다. '82년생 김지영'이란 책을 처음 보았을 때 그 내용보다 흔해 빠진 지영이란 이름에 공감해 "거 참 제목 한번 끝내주게 지었네..."하고 중얼거렸었다.




 난 첫째라서 많은 사랑을 참으로 넘치게 받았다. 기대하던 아들은 아니었으나 막내 고모 이후 오랜만에 등장한 아기였으니 딸이어서 대접이 하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첫째 딸은 살림 밑천이니 괜찮으나 둘째는 기어코 아들이어야 한다는 할아버지께서는 엄마에게 몇 가지 이름  후보를 제시하셨다. '말자', '말숙','말연' 등 죄다 말(末)자로 시작하는 그 이름들은 지구의 종말도 이끌어낼 만큼 엄마에겐 충격적인 후보들이었다. 엄마는 이름을 안 지어주셔도 괜찮으니 그 이름들만큼은 안 되겠다고 강하게 못 박으셨다. 할아버지의 말씀이 곧 법이었던 우리 집에서 참으로 파격적인 행보였다. 예상치 못한 며느리의 반격에 할아버지는 한발 물러섰으나 엄마가 지은 이름을 동사무소에 출생 신고를 하시며 한자를 바꾸어 버리셨다. 일말의 자존심이셨을까? 그래서 참 희한하게도 내 이름의 뜻풀이는 고운 잔디이다. 지혜롭고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뜻이 대개인데 고운 잔디라... 그래서 내가 골프장만 가면 그렇게 신이 나는가 보다.


 둘째도 딸이었을 때 할아버지께서는 또 '말' 시리즈 이름을 꺼내셨으나 엄마는 이번에도 요지부동이었다. 주변의 강한 압박에도 동생은 다행히 나와 비슷한 돌림자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이번엔 예명을 지어 불렀다. 드라마로도 유명했던 '꼭지'. 꼭지는 또 왜 아들을 낳게 되는 이름인지 모를 일이지만 내 동생은 꼭지였고 엄마는 오랜 시간 동안 꼭지 엄마로 불렸다.


 이 꼭지가 효험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아들을 낳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했는지 셋째는 떡두꺼비 같은 딸! 동생이 병원에서 돌아온 날,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던 집은 다섯 살 나의 눈에도 적막과 비통함 그 자체였다. 누구도 기쁘게 아이를 안고 들어오지 않아 주변에 사시던 친척분께서 '자~~ 얼라 들러갑니데이!' 하시며 재빨리 방으로 들이시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 와중에도 아기가 예뻐 엄마는 나에게 이쁘지 않냐며 연신 물어댔는데 난 '아기가 넘 뚱뚱하고 못생겼는데?'라고 답해서 이마에 콩! 알밤을 맞기도 했었다. 솔직히 대답했구먼...


 할아버지는 '말' 시리즈가 먹히지 않자 아예 전술을 바꾸어 작명소를 찾으셨다. 엄마가 납득할 만하되 아들을 낳는 이름을 짓겠다 나름 합리적인 선택을 하신 것이다. 그래서 셋째는 우리  중 최초로 돈을 주고 이름을 짓게 되었고 같은 자매임에도 돌림자를 벗어나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머리가 길어 묶고 다니던 첫째, 둘째와는 다르게 셋째는 머리도 짧고 옷도 중성적이었다. 그래야 아들을 낳는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을 것이고 아들을 낳고도 한동안 동생은 짧은 머리였었다. 그 작명소가 용한지 이쯤 되면 확률적으로 아들이 나올 때가 되었는지 엄마는 마지막에야 바라던 아들을 낳았다. 이름은 사람의 운명도 바꾼다는데 그 아들 하나 보자고 세 딸의 운명이 휘청인 시절이었다.




 요즘 보면 개명한 분들이 주변에 꽤 있다. 몸이 아파서, 하는 일이 안 풀려서,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 등 여러 이유들이 있으나 엄마 주변 분들의 개명 이유는 거의 모두 그 시절 딸이라고 성의 없이 지은 이름에 한이 맺혀서이다. 세빈이, 예나, 아린이 등 우리 딸아이 또래의 이름을 뒤늦게 본인의 의지로 얻게 된 이모님들에게 행정상의 번거로움 따위는 숨기고 싶던 긴 세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나는 다행히 아주 평범하고 무난한 보통의 이름으로 평생을 살았다. 그러나 내 세례명이 말지나! 아니 마르티나가 어떻게 말지나가 되는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2000년부터 마르티나로 정정해 부르라고 하나 "마르티나 입니다~"라고 해도 모두들 말지나, 말지나 하는 통에 되도록이면 내 본명을 밝히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피했으나 하늘에 계신 그분의 뜻은 거스를 수 없어 피하지 못한 '말(末)'의 인연이라니... 세상의 모든 말숙, 말연, 말자, 말진아들께 심심한 위로와 응원을 함께 보내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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