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제22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극장가에선 보수와 진보 색채가 담긴 대표 영화들이 극장가를 휩쓸었다. 그중에서도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은 예상외로 선전하며 대중들의 인식에 각인되기도 했다. 그것이 관객의 정치 성향에 따라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를 떠나 적어도 상영 시기에서만큼은 상당한 파급력을 일으켰던 것은 분명했다. ‘건국전쟁’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현 우리나라의 정치 주소처럼 극명하게 갈렸다. 소위 태극기 부대라 불리는 극우세력에선 ‘국부(國父)’로 칭송받는가 하면, 민주화 투쟁을 주도했던 좌파 운동권에선 ‘미제의 앞잡이’ ‘독재자’로 불리는 이승만. 반세기가 지난 현재까지도 그의 공(功)과 과(過)에 대한 논쟁은 끊이질 않고 있다. 진부한 정치이념을 떠나, 그는 과연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제2차 세계대전 및 한국전쟁 전후의 현실 속에서 나타난 그의 공과(功過)를 실용주의 관점에서 다시금 논의해본다.
미국도 놓친 일본의 침공…태평양전쟁 예측한 외교 천재
이승만은 미국과 일본이 전쟁할 것으로 예측하며, 1941년 여름 “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라는 저서를 통해 미국의 대일정책 변화를 촉구하고 일본과 미국 간 전쟁의 불가피성을 경고했다. 그의 경고는 1941년 12월7일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입증됐다. 그는 전쟁 대비 시기를 놓친 미국의 고립주의 노선과 미국 내의 평화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도,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 더이상 지체하지 말고 실효성 있는 제재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미국은 각종 군수물자 수출을 전면 금지하고 자국 내의 모든 일본 재산을 동결하는 등 대일 압박을 강화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일본은 미국과의 협상을 추진했지만 결국 결렬되고, 12월7일 극단적 선택에 몰린 일본은 진주만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미국과 일본은 충돌을 피하거나 혹은 더 오래 연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주장한 이승만의 예측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그의 저서 “Japan Inside Out”은 매진됐다.
“미국을 쥐락펴락” 반공포로 석방으로 한미수호방위조약 체결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남침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파죽지세로 밀리던 국군은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황을 바꾸며 38선을 넘어 북진통일까지 바라볼 수 있었으나, 중공군의 참전에 의해 점차 후퇴하며 38선 부근에서 약 3년간의 교착상태를 이어갔다. 1953년 4월 한국전쟁의 휴전회담은 제네바협정에 따라 양측의 병약 및 부상 포로들의 교환이 합의되면서 급물살을 타게 됐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휴전을 수락할 전제로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당시 미국은 여전히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미국은 휴전회담을 조속히 마무리하기 위해 한국 정부의 협력이 필요하면서도 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대해 난색을 비췄다. 해당 조약이 체결되면 유엔군의 참여도가 축소되고, 공산주의자들의 지배를 법적으로 인정하게 되는 등 복잡한 리스크를 미국이 온전히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한국 정부는 휴전협정 체결 이전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대한 미국의 확약을 얻기 위해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강경 수단까지 동원했다. 사실상 한국을 배제한 채 포로 교환을 골자로 한 휴전회담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미국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즉각 수용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바꿨다. 양국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안을 발표하고 공식 서명함으로써 사태를 일단락시켰다.
부산정치파동·사사오입 개헌 감행…‘독재자’ 오명
이승만은 무리한 개헌으로 재선을 넘어 3선을 이어가려 했다. 먼저 국회의원을 협박하는 ‘부산정치파동’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을 억지로 통과시켰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을 철폐한다’는 2차 개헌도 과감히 단행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죽을 때까지 대통령 선거에 나올 수 있도록 그 자격을 스스로에게 부여한 셈이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독재’다. 개헌에는 국회의원의 2/3 이상의 동의가 필요했다. 당시 재적의원 203명의 2/3에 해당하는 총 136명의 개헌 찬성표가 필요했던 것이다. 개헌 투표 결과, 정확히 135.333명의 찬성표가 나왔다. 그러나 “사람은 소수점으로 존재하지 않기에 4이하는 버리고 5이상을 취하는 수학 논리 ‘사사오입’을 적용해야 한다”는 당시 저명한 학자의 주장에 의해 개헌 정족수는 135.333에서 135명으로 계산되며, 부결됐던 개헌안은 다시 통과됐다. 이를 통해 이승만은 세 번째 출범하게 됐다. 그의 소원대로 집권 연장을 이뤄냈지만, 이는 정치적 위기를 초래하는 발단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이승만 제거계획
한국전쟁 중 이승만이 자신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일으킨 1952년 부산정치파동은 전시 독재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이렇게 헌정 파괴 행위가 입안될 즈음 전시 독재에 환멸을 느낀 미국은 급기야 이승만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한미관계의 악화 속에서, 뼛속까지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은 1953년 4월 휴전을 반대하고 단독으로 북진을 선언한 한편 미국에선 ‘에버레디 계획’ 이른바 ‘이승만 제거계획’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상호방위조약체결에 동의할 경우, 정전협정에 합의할 의향을 보였지만 미국은 그의 요구를 부분적으로만 수용했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정전협정이 성립되지 않을 경우, 이승만의 단독 북진을 막기 위해 그를 제거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의 강경한 태도와 국내 지지를 고려해 이를 실행하지는 않았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됐다. 이승만 제거안은 현실적으로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미국 정부와 유엔군사령부에서 심각하게 고려한 대안이었다.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이후 미국은 이승만의 하야를 유도하기 위해 이승만에게 압력을 가하고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도록 유도했다. 이를 위해 새로 부임한 주한미대사 맥카나기가 이승만과 만나 메시지를 전달하며 하야를 유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필자는 이승만에 대해 ‘친미(親美)주의자’라기 보단 ‘용미(用美)주의자’에 더 가깝다고 판단한다. 그가 독립운동에 힘썼던 시기에서부터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미국은 하나의 도구였던 셈이다. 국제체제의 실용주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의 업적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우선 그의 저서를 통해 알려진 태평양전쟁 발발에 대한 예측은 사실상 예언에 가까웠다. 이승만은 당시 태평양전쟁 발발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상황을 철저히 파악하고 미국과 일본의 갈등에 대한 국제적 정세를 정확하게 분석했다. 철저히 미국 중심에서 취해야 할 실효성 있는 대일 압박정책(제재조치 등)을 상세히 기술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한국의 역할과 안보를 강화하는 방법에 대해 깊이 탐구했다. 한국의 국익을 우선시하면서도 현실적인 안보 전략을 고려한 결과, 미국과의 동맹 및 협력 노선을 선택했고, 이를 통해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강화하고자 했다. 이는 다른 국가와의 협력을 통해 국가의 이익을 실현하고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 실용주의적인 입장에 해당된다. 비록 미국과 완전한 대등한 위치에서의 동맹관계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강경책으로 한국 미국을 압박해 ‘한미수호방위조약’을 이끌어내는 등 일방적인 외교관계를 탈피하려는 노력도 돋보였다. 이를 통해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담보된 안보를 얻어낼 수 있었고, 미국은 동북아 공산 세력을 봉쇄하는 동시에 이승만의 무력 북진통일 의지도 단념시킬 수 있는 ‘이중적 봉쇄효과’를 얻어냈었다.
그의 실용주의적 사고와 관념은 외교 및 안보 부문에서 상당한 업적을 이뤄냈지만, 국내 정치에선 그의 업적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과오(過誤)들이 쌓여갔었다. 이승만은 국회를 탄압하면서 부산정치파동·사사오입 개헌 감행 등 비헌법적인 내치로 독재의 길을 걸었다. 또 미국과의 실용주의적인 안보 정책이 오히려 향후 한국의 자주성을 희생시킨 결과로 평가될 수 있다는 점도 고민해 볼 만하다. 결국 독재적인 통치와 외부 국가에 대한 종속성으로 인해 국내 여론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 했다.
현재도 주변 강대국들의 입김에 큰 영향을 받는 한국이 온전한 국가 자주성을 지킨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동반한다. 하지만 단순한 이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가를 고민한다면 지금보다 부강한 국가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적어도 외교 부문만큼은 특정 국가들에 대한 사대적인 자세를 버리고 때론 협력으로, 때론 견제와 협상으로 실용주의적 입지를 다져야 할 때라고 강조하는 바이다.
< 참고문헌 >
이승만, 『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 (New York : Pleming H. Rovell), 1941.
이완범,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의 관계에 관한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2007.
김남균, 『태평양 전쟁기의 ‘이승만 외교’ (1939-1945)』(한국공공정책학회), 2007.
홍석률, 『집중분석 한국전쟁 직후 미국의 이승만 제거계획』(역사비평사), 1994.
김보영, 『한국전쟁 시기 이승만의 반공포로석방과 한미교섭』(이화사학연구소),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