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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은 Jun 24. 2024

공황장애 진단을 받은 날

삼십여 년이라는 시간 동안 남들 눈엔 별 탈 없이 평범한 사람처럼 살아왔다. 초등학생 시절 엄마가 돈을 벌기 위해 나를 혼자 집에 두고 일하러 갔던 날도, 중학교 때 친구들 사이에 외톨이가 됐던 날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크게 배신당하고 마치 내 잘못인 양 손가락질 당할 때도. 영원히 곁에 있을 것처럼 말한 사람이 떠나갈 때도, 누구보다 믿었던 가족이 나를 배신할 때도 누구나 다 겪는 괴로운 날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내가 힘들어할 때면 주변에선 “너 정도면 괜찮은 인생인데 왜 이렇게 괴로워해?”라는 말을 듣곤 했었다. 마치 나의 아픔은 남들에게 내밀 수도 없이 작은 아픔처럼 느껴졌다. 세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항상 눈치 보고, 착한 아이 증후군을 달고 살았다. 남에게 피해주는 일은 어떻게든 기피했고, 혹여나 누군가 나로 인해 상처를 받진 않을까 수많은 고민을 하며 밤을 지새운 적도 많다. 나보단 가족이, 나보단 남이 중요했던 나날들로 성장기와 성인기를 채워나갔다. 나를 오래 본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처음 본 사람도 내가 참 착한 사람이라고 칭해줬다. 칭찬인 줄만 알았던 나는 늘 미소 지으며 더 착하고, 더 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내가 착하고 바른 사람이 될수록 내 안에 내가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니 나를 지키는 건 더 어려워졌다. 상사의 요구는 무엇보다 거부하기 힘들었고, 성실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체력과 건강을 쏟아내며 일했다. 역시나 돌아오는 말은 성실하고 친절한 사람이라는 칭찬이었다. 그렇게 1년, 2년, 3년이 지나자 내 안에 나는 없었다. 이대론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아니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아서 일을 관뒀다. 주변에서 말하던 좋은 직장은 나에게 지옥 같은 곳이었고, 내가 사랑해서 시작하게 된 일은 나를 집어삼켰다.


일을 그만 두자 숨 쉴 구멍이 생긴 기분이었다. 원하는 시간에 일어나고, 하고 싶은 것을 해내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우연처럼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게 되었다. 고민했던 글쓰기도 시작하게 되었고, 꿈꾸던 여행도 가며 나를 되찾아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부터가 문제였다. 인생 중 이렇게 긴 기간 쉬어본 적이 없는 나는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동굴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상상할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여태 살아온 삶의 모든 문제가 몸의 증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게. 어느 날부터 무엇인가 내 심장을 콕콕 찌르는 듯한 느낌과 숨 쉴 수 없이 답답한 느낌, 몸이 긴장되고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한 불안함에 휩싸였다. 집중력이 떨어져 한 가지 일을 제대로 마무리할 수 없었고, 모두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시선에 뒤덮였다.


처음엔 심장 쪽에 이상이 생긴 줄 알았다. 심장 통증은 코로나19가 성행했던 2020년부터 증상이 있었기에 백신의 부작용인 줄로만 생각했다. 인터넷에 검색했을 때 공황장애 증상 중 하나라는 결과가 나와도 그럴 리가 없다고 장담했다. 아니, 아마도 그때의 난 그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몇 주를 고민하던 나는 심장내과를 방문해 피를 뽑고 심전도를 검사하는 등 심장과 폐에 관련된 검사는 대부분 했다.


이틀 후 병원에서는 결과가 나왔으니 방문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생각보다 결과가 일찍 나와 다행인 듯싶은 마음과 걱정되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오랜 대기를 마치고 들어간 진료실은 공기가 무거웠다. 의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심장과 폐는 모두 정상입니다. 검사 결과와 현재 상황을 종합적으로 봤을 때 공황장애 가능성이 높으니 우선 안정제를 먹고, 경과를 지켜봅시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진료실에 나온 나는 갖가지 생각을 했다. 약국에서 받은 약 봉투엔 ‘신경안정제: 불안장애, 우울증, 공황장애 등의 증상을 완화시켜 줍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고, 나는 누가 보기라도 할까 겉옷 속에 숨겨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어두운 지하 주차장 속 차 한 대. 그날 그곳에서 나는 가장 큰 소리로 울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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