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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무디 Jun 09. 2022

감기의 하루

여행지의 생활이 평범해진다는 것


스미냑에 와서 처음으로 종일 숙소에서 시간을 보냈다. 금방 지나갈  불쑥 찾아온 감기가 머리를 지끈지끈 누르더니 눌러앉아버렸다. 물에만 안 들어가면 낫겠지 했는데 생각해보니 물이 문제가 아니라 냉방병인  같았다. 때문에 나는 무더위에 에어컨 바람 없이  안에 꼼짝 않게 되었다. 어제 얕게 보고 까불다가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라, 이렇게 해서 낫기만 한다면야 무엇이든 하겠다는 마음이었다.


원래 오늘은 서핑 강습 선생님 부부와 점심을 먹기로 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샤부샤부 집에 갈 예정이었는데, 에어컨 바람이 감기의 원인이라 단정한 이상 어디 에어컨 빵빵한 좋은 가게엔 갈 수 없는 게 나의 현실이었다. 앞으로 남은 날들을 위해 오늘 하루와 샤부샤부쯤은 기꺼이 포기하겠다며 남편이 시켜준 그랩을 점심으로 정하고, 사다준 약도 꼬박 챙겼다.


나는 못가도 남편은 가서 먹고 오라며 등을 떠밀었다. 이 더운 곳에 나랑 있어봤자 내 몸이 낫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나보다 더위를 더 타는 사람이 아프지도 않은데 이 방 안에 틀어박혀 있다간 서로 감정 상할 일만 생길 게 분명했다. 나는 여행 와서도 집에서 할 일을 잘 찾아 하는 편이지만 남편은 여기저기 못 돌아다녀서 안달인 사람이라, 내가 마음이 불편해서라도 그는 다녀오는 편이 나았다. 너무 아파서 사경을 헤매는 것도 아닌데 남편, 가족, 사랑하는 이라고 해서 오직 나만을 위한 결정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득 없이 서로를 힘들게 할 뿐이다.


남편이 나가기  받아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원래도 뜨거운 물엔  못 들어가서 우나도  안 가는데, 혈액순환이 된다며 받아준 목욕물에 감기가 나을까 하는 희망을 갖고 몸을 풀었다.  한여름에 뜨거운 물이라니, 지글지글 끓는 인내심을 이기지 못하고 5분 만에 박차고 나왔다. 그도 나름 오래 버틴 것이었다. 갑자기 나지 않던 땀이 주룩주룩 흐르며 두통이 조금 가셨다. 나는 효과 빠른  좋아하는  한국인, 그래 이 정도 효과를 바로 보여준다면 두 번 세 번   있다며 조금 회복된 근육들을 쭉쭉 펴보았다.


배달 온 음식을 먹으며 유튜브를 켰다. 혼자 있을  존재감이 더욱 돋보이는 요소들이 있다면 그건 단연 핸드폰이다. 어디서든 어떤 콘텐츠도 손쉽게   있는 장소를 제공하는 작은 기계에 새삼 감탄하며 조용한 적막에 노래를 틀었다. 사실 너무 더워서 얼른 밥 먹고 누워야겠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식탁에서 홀로 밥 먹으며 영화 보는 로망 따윈 실현되지 못했고 아이유의 노래를 메들리로 들을 뿐이었다. 게다가 한 번에 두 가지는  못해서, 나는 밥 먹을  밥만 먹는 사람이란  다시금 깨우쳤다.


문득 이상하게도 나는 이 상황이 그리 아쉽거나 우울하지 않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장기간의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며칠 아플  있어도 며칠  시간이 있기 때문에. 오늘은 별로였어도 내일이 있기 때문에 괜찮다는  마음에서 오는 여유를  좋아한다. 내게 여행의 의미는 여유라는 것을 확정 짓는 대목이기도 하다. 여행 와서 방안에만 있는  아무래도  그렇지만,  시간도 여행지에서의  장면이라고 받아들일  있는 이유는 앞으로 남은 시간이 내게 주는 긍정의 여유라   있다.  유연한 마음을 얻고자, 일상  나의 손이 닿아야 하는 것들을 떠나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날아온 것이기도 하다.


‘사고’보다 ‘감정’이 앞서는 나는 여행지에서 무얼 하는지 보다 무엇을 느끼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여행에선 어떤 상황에서도 좋은 쪽으로 이끌어가는 힘을 키우기에 더없이 좋다. 매일 똑같이 주어지는 하루임에도 여행을 오면 더 소중하게 느껴지지 때문이다.


오늘따라 바람도 안 불고 새들도 조용해서 시간이 흐르는지를 의심했건만, 금세 해가 넘어가 있다. 감기에 걸렸다고 해서 특별히 안 좋았던 일은 없었던 평범한 하루. 여행지의 생활이 평범해진다는 것, 이곳에 풀었던 마음의 집합이 둥지를 틀었다는 것. 돌아온 남편이   자는 모습을 지켜보다 글을 남긴다. 남편의 오늘은 어땠을까, 다른 하루를 보낸 우리가 느낀 것들을 나누는 것으로 오늘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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