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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가 Jun 16. 2024

전동차를 치우다가

오락가락 비와 비냄새에 대하여.

오늘은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 제주도에서 이색 자전거&전동차의 직원으로 일하는 나에게는 고된 하루가 예정되어 있다. 장마철처럼 하루 종일 비가 쏟아지면 손님이 없어 마음은 불편해도 솔직히 몸은 편하다. 하지만 오늘같이 변덕스러운 날씨는 옛날말로 '똥개 훈련'을 받는 것과 같다.


아침에는 멀쩡하던 하늘이 정오부터 심술을 부리기 시작하면, 배터리로 움직이는 어린이용 전동차 관리에 비상이 걸린다. 빗방울이 떨어지면 재빨리 지붕 아래로 옮겨야 누전으로 인한 고장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형 자전거들로 꽉 찬 공간에 10대가 넘는 전동차를 옮기는 일은 마흔여덟 허리디스크 통증을 달고 사는 나에게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작은 아이들에 맞춰 디자인된 전동차를 옮기려면 매번 허리를 90도 이상 굽혀야 하니,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난다. 아이들 눈높이에서 아이들처럼 생각하고 이해해 주며 같이 행동하고 놀아주기는 이렇게나 힘들고 힘들다. 그래서 '부모 등골 빠진다'는 말도 생겼겠구나 하고 생각해 본다.


가뜩이나 좁은 지붕 아래에 대형 가족 자전거와 전동차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도, 이미 이용료를 지불한 손님들은 사뭇 필사적이다. 이때의 손님들은 40분이라는 시간 동안 본전을 뽑겠다는 신념에 사로잡힌 듯하다. 더욱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의 소중함이라는 명제 앞에서는 웬만한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빗속으로 주저 없이 뛰어든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애잔함과 존경심이 뒤섞인 감정과 함께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가고 전동차 운행을 재개하려 전동차들을 다시 밖으로 꺼내면, 이번에는 또 다른 폭우가 기다렸다는 듯 쏟아진다. 마치 나를 시험에 들게 하려는 얄궂은 하늘의 장난 같다. 허겁지겁 전동차를 다시 지붕 아래로 옮기고, 장화와 우비를 챙겨 입고 나머지 자전거까지 죄다 옮겨 놓고 나면 온몸은 비와 땀으로 범벅이 된다. 마지막으로 젖은 안장이며 손잡이를 닦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날씨가 개는 건 이제 지겹도록 반복되는 일상이다.


'똥개 훈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임하시어 고르지 못한 도로 곳곳에 물웅덩이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아스팔트 위에 고인 빗물을 플라스틱 삽으로 퍼내고 웅덩이를 없애야 비로소 한숨 돌릴 수 있다. 이렇게 비 오는 날은 여러모로 고충을 겪지만, 그래도 작은 위안이 되는 게 하나 있다. 바로 빗물이 우리 업장 내의 모든 땅에 빗방울을 새기기 시작할 무렵이면, 승마장에서 화산송이가 부서지면서 가루 되어 날아온 황토에서 피어오르는 짙은 흙냄새가 바로 그것이다.


건조했던 땅이 비를 만나 숨을 쉬며 '페트리코(Petrichor)'라는 이름의 비 냄새를 퍼뜨린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메마른 땅에 스며드는 빗물이 만들어내는 그 촉촉하고 원초적인 냄새, 페트리코. 그것은 어린 시절 비 오는 날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토양 속 박테리아가 만들어내는 지오스민(Geosmin)이라는 화합물이 들려주는 진화와 생존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은 태초부터 생명 유지와 식량 생산의 근원이었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의 흙냄새는 언제나 편안한 안도감을 준다. 그것은 마치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낸 오아시스 같은 느낌일 것이다. 비는 풍요로움을 예고한다. 비가 내리면 식물들은 무성해지고, 이는 곧 먹이사슬의 시작을 의미한다. 초식동물이 모여들고, 그 뒤를 이어 포식자도 찾아온다. 페트리코는 생명의 순환을 알리는 첫 신호탄과 같다.


하지만 비는 때로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 과도한 비는 생태계에 혼란을 주기도 하고, 어떤 생물들에게는 삶의 터전을 위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피부호흡을 하는 지렁이는 비가 오면 땅속에 물이 차 숨쉬기 힘들어진다. 특히 크기가 큰 지렁이일수록 산소 부족을 빨리 느껴 땅 위로 올라오는데, 자칫하면 아스팔트나 콘크리트 위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도 한다. 그렇다. 지렁이도 수재민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인간 역시 비로 인한 침수 피해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에, 페트리코라는 냄새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진화해 왔는지도 모른다. 자연의 메시지를 올바르게 해석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자연과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


비가 내린 후, 페트리코는 생명의 소중함, 자연의 경이로움, 그리고 때로는 그 경고의 목소리를 일깨운다. 오늘도 나는 비의 시작을 알리는 흙냄새를 맡으며, 자연과 나,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본다. 빗물이 만들어낸 웅덩이처럼, 내 삶에도 여러 굴곡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묵묵히 견뎌내고 다시 맑게 개인 하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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