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벽색(碧色).
맑은 푸름을 지닌 색.
산뜻하면서도 시원한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긍정의 색.
하지만─
짙은 파랑의 색깔 역시─
우리는 벽색이라고 부른다.
밤의 어둠을 머금고─ 빙해(氷海)의 저릿한 한기를 표현할 수 있는─
부정의 색.
그런 벽색의 이미지가 그려지는 곳은 바로 이곳이 아닐까?
온몸을 통해서 전해오는 돌바닥의 차가운 감촉.
동굴 안을 가득 채운 비릿하고도 텁텁한 냉기.
덥수룩해진 검은 장발 사이로 슬며시 비치는─
─벽안(碧眼).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이미 빛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릴리에게는 이제─ 살아갈 희망이 전혀 없으니까.
***
...
공허하다.
그래. 지금 내 상태에 가장 어울리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몇 주 전. 나의 부모님은 살해당했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두 분께서는 딸인 나를 만나기 위해 탐정사무소에 방문하셨고, 내가 돌아왔을 때는 아버지의 머리에─ 어머니의 심장에─ 총알이 관통되어 있었다.
탐정일을 하다보면 적이 생기는 건 당연한 거였는데. 보복의 가능성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는데. 두 분의 시신을 보니 그제서야 깨닫게 된 듯했다.
["릴리는 눈이 참 맑고 똘망똘망해."
"분명 나중에 세상을 아름답게 비출 수 있을 거야."]
어린 시절, 어린 나에게 말씀해주신 부모님의 진심 어린 칭찬. 그것 때문이었을까?
세상을 너무 밝은 시선으로만 바라본 것 같았다.
... 그래도 무너질 수는 없다.
그래도 나는 탐정으로서 할 일을 했다. 감정에 무너지지 않고 증거를 모았다. 아는 기사─ 유르하르드로부터 도움을 받아 범죄조직 [레드 라이트]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과거, 내가 해결한 사건으로 인해 조직이 큰 타격을 받은 것이 동기일 것이다.
단서만 모이면 매듭을 짓는 건 결국 나의 몫이다. 그렇게 나는 진범을 밝혀내고, 논리정연한 추리로 진실을 폭로했다. 그러한 나
의 노력으로 단두대에 세워진 범인은 바로─
["피고 릴리 그레이의 존속 살해 혐의를 인정한다. 현 시간부로 그녀의 성과 지위를 박탈하고, 사형에 처한다."]
─나다.
재판의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강선의 흔적과 현장의 지문은 이미 바꿔졌고, 이단심판관의 수사는 편향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거짓된 증언을 고하고, 재판장의 재산은 늘어나있었다.
레드 라이트는 꽤나 거대한 뒷조직이었던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비열하고 치밀했다.
...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강함을 추구하지만 명예를 중요시 여기는 기사. 그들은 나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귀족으로서의 권한은 사라졌다지만, 그건 어차피 형식적인 요소일 뿐. 집을 나와 탐정으로서─ [코델리 스트리트]에서 쌓았던 신의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죄인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권리─ [면회]를 통해, 유르하르드에게 더 넓은 조사를 부탁했다. 재판 자체에 존재하는 부정, 수사 과정에서 일어난 모든 불합리에 대한 재수사를 말이다.
그리고 나는─
후회하고 말았다.
그날─ 나는─ 수사 따위가 아닌─
─보호를 요청했어야 했다.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사형집행 직전까지 레드 라이트의 보복은 계속되었다.
부모님에 이어서, 하나뿐인 소중한 동생 플로라도 죽었다. 이것으로 그레이 백작가는 사실상 멸문.
아마 가까웠던 지인들이나 조수 역시... 피해를 받았을 테지.
... 이대로... 무너지면, 안 돼.
["미안합니다, 릴리."]
감옥 안에서 점점 초췌해가는 내게 다시 한번 절망이 들려왔다. 듣자 하니 내 부탁으로 인해 유르하르드 아래의 하급기사 몇 명이 본보기로 명예를 잃고 숙청당한 모양이었다. 사과 이후의 설명에서─
유르하르드는 더 이상 내게 존대하지 않았다. 더 이상 내게 명예를 찾지 않았다.
─더 이상 내게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 이대로... 무너지면... 안 되는데...
***
"교대다."
"근무 중 이상 무! 수고하십니다!"
몇십 번이고 보았던 경비의 교대. 유르하르드와의 면회 이후, 나
혼자 있는 감옥 앞에서는 24시간 밀착 경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정치범도 아니고, 흉악한 범죄자도 아닌데. 그냥 세상 모든 것들이 레드 라이트 놈들 아래인 건가? ... 존속 살해면 흉악범죄긴 한데.
'... 물론 난 절대 아니지만.'
경비가 들을 수 없게 속으로만 생각했다. 굳이 주의를 끌 필요가 없으니까.
'경비만 빡세게 돌리고, 정작 족쇄에는 [페톨리움]조차 쓰지 않다니.'
페톨리움. 자연 상태가 아닌, 수도의 공장에서 특별한 공정 과정을 통해 가공되어지는 검은 광석. 원래의 페톨리움은 오히려 마력을 증폭시켜주거나 골렘에 공급되는 훌륭한 에너지원의 역할을 하지만, 제 역할을 다한 페톨리움은 역으로 마력을 강제로 해제하는 부산물이 되어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된다.
─마법사들을 제압하거나 감금할 때 말이다.
물론 저들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내 몸에는─ 마나가 거의 없다는 것을. 마법을 쓰기에 나는 부적합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굳이 페톨리움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건 너희들의 오산이야.'
─나는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
손가락 끝에 마나를 싣는다. 별도의 영창도 없이─ 체내의 마나를 억지로 모아 겨우 날카롭게 정제해내었다. 태생적으로 얼마되지도 않는 마나를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왔으니까.
물론, 마나의 운용도 결국 재능의 영역 중 하나이지만 말이다.
틱─
탁.
작은 파열음과 함께 족쇄가 끊어졌다. 손가락으로 유연하게 그은 선은 마치 한 자루의 검과 같이 강철을 잘라내었다.
"흐으..."
고통에 신음이 새어나왔다. 지금 내가 발현하고 있는 마나는 온 몸의 것을 싹싹 긁어모아도 부족한 마나니까.
─생명력을 태울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염두에 둘 겨를이 없다. 나는 좀 더─ 심장의 마나를 최대한 끌어왔다. 수명이 몇십 년은 줄어들겠지만, 상관없다. 그렇게 바친 수명의 대가로 나는 철창을 조용히 잘라내고 탈출에 성공했다.
'─이대로 무너지면 안 돼. 반드시 확인해야 하니까.'
***
코델리 스트리트 외곽에 위치한 [베라트 산]. 릴리는 탈출 이후,
산 어귀에 있는 동굴까지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탐정과 조수가 서로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을 때,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기지였다. 릴리는 동굴에 가져다 둔 나무의자에 앉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동굴 입구 쪽으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탐정님!"
릴리 탐정사무소의 조수, 르코였다.
"르코...! 무사했구나!"
르코를 맞이하는 릴리의 낯빛은 상당히 창백해져있었다.
"탐정님이야말로, 괜찮으신 거예요? 감옥에서 어떤 험한 일을 당하셨길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하는 르코.
"흐으... 그래도, 역시 와줬구나, 르코."
릴리는 가쁜 숨을 내쉬며 작게 미소지었다.
"[약속]한 장소니까요."
르코는 말과 동시에 품 속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탕─!
한 발의 총성이 동굴 내부를 메아리치며 맴돌았다.
르코의 손에는 리볼버가 들려있었다.
릴리의 가슴 위로, 붉은 반점이 물들기 시작했다.
"미안~ 탐정님. 당신은 죽어야하거든."
총알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르코는, 그 순간부터 말투가 변했다.
"그래도 같이 일한 정이 있어서, 내 손으로 죽이긴 뭐했는데 말이야."
폐 쪽을 스쳤는지, 릴리의 입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
"명탐정 릴리 그레이─ 아니, 살인범 릴리의 최후가 설마 조수에게 배신당하는 거라니. 하하, 누가 알았겠어?"
르코의 표정은 명백한 비웃음과 조소였다. 그런 르코를 보고, 릴리는 남은 힘을 짜내어 겨우 입을 열었다.
"...... 르코. 난 탐정이잖아."
생명력까지 불태운 과도한 마나사용으로 인해─ 이미 릴리의 몸은 한계였다. 르코의 흉탄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반드시 죽었을 것이다.
"... 설마 몰랐겠어?"
일부러 가짜 웃음을 지으며 그 말을 끝으로 릴리는 동굴 바닥에 쓰러졌다.
릴리의 피에서 나온 비릿한 냄새는 동굴을 가득 채웠다.
공허한 벽색의 눈에─ 빛은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저─ 소중한 사람의 배신에서 일부러 눈을 돌리고 있었다는 것을.
'뭘... 기대한 걸까...? 나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그 순간부터─ 이미 내 눈에 담긴 벽색은, 맑은 하늘의 푸름이 아니었다는 것을.
─짙은 어둠의 파랑이었다는 것을.
'그냥... 죽어야겠다...'
그렇게 내가 삶의 미련을 놓는 순간은─
마치─
매듭이 끊어지는 듯했다.
***
"...... ......소거된 게 아니야?"
"...도 안 돼! ...리가 없어!"
"......가 좀... ...봐!"
눈을 감은 릴리는 야단법석에 가까운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 시끄럽다. 저승은 원래 이런가?'
"...쇄도 없이 ... ..."
"...로는 제압할 수가... ......!"
"......른 주술을... ......"
계속되는 난리에 정신을 차린 릴리는 문득 자신에게서 이질감을 느꼈다.
평소와는 다른 신체적 느낌. 그리고 괴이할 정도로 느껴지는 마나량.
'이건... 내 몸이...'
"... 눈동자도 하늘색으로 변했잖아!"
누군가의 외침에, 릴리는 그제서야 주의를 자신에게서 주위로 옮겼다. 더 이상 집중해서 [성찰]할 수 없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이번에는 탐정의 또 다른 습관, [관찰]과 [읽기]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무기를 들고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 그들의 표정은 명백히 [두려움]이었다. 마치 우리 안에 갇힌 사자가 풀려났을 때와 같은. 하지만 릴리에게 있어 아직까지는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추리력이 좋아도, 갑작스러운 상황은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으니까.
"음... 어라?"
본인이 말했음에도 어색하게 느껴지는 목소리. 원래 릴리의 것이 아니다.
주변시로 보이는 밝은 벽색의 머리카락. 원래 릴리의 것이 아니다.
자신과 주변─ 모두가 이질적이다. 어느 쪽에도 집중해서 판단할 수가 없다.
아무리 탐정이라도 이렇게 주의가 분산된다면, 결국에는 원초적인 의문을 표하게 된다.
"나... 뭐지? ... 왜 살았지?"
─매듭은 다시 이어졌다.
yes24, 북센, 알라딘에 검색하면 단행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브런치에 올라온 것과 내용은 똑같고, 대신에 미공개 일러스트와 본편에 나오지 않은 설정 등의 내용이 추가된 굿즈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