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분명 죽었다.
생명력까지 불사른 마나 사용과, 심장에 박힌 총알에 의해. 물리적으로는 확실히 숨이 끊어졌었다.
하지만 죽기 직전까지 느껴지던 고통이 찰나의 순간 사라졌다. 뿐만 아니다. 마치 중간 페이지가 사라진 극본처럼─ 배경, 상황, 도구, 등장인물 모두가 바뀌었다.
순식간에 전혀 다른 무대로 회전된 것이다.
어두운 동굴은 밝은 건물의 내부로─ 르코 대신에는 7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으며, 쓰러져 죽은 주인공은 어느새 일어나 서있다. 죄수복보다도 못한 거적때기 천 하나가 걸쳐져 있고, 주변의 사람들은 가만히 서있는 나를 적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빡 안 하다니…!"
"족쇄를 풀면 안 됐는데!"
"주술사는 아직인가?"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한 가지 확실한 점. 나는 지금 릴리의 몸이 아니다. 목소리, 마나량, 눈높이, 주변시로 확인한 신체적 특징, 그리고 주변인들의 반응 등... 근거는 차고 넘치기에 확실하다. 뒤바뀐 [등장인물]에는, 주인공인 나조차 포함된 것이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도, 일단은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상황을 풀어나갈 수 있다.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약간의 공간을 내어 주자, 여덟 번째 사람이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부터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다. [관찰]과 [읽기]로 보건대, 이들 중에서는 가장 리더에 가까운 인물이다.
"인격이 돌아온 모양이군."
아하. '왜 살았지?'라는 혼잣말을 그렇게 해석한 건가?
"아무리 기사라지만, 무기도 없는 계집이다. 최대한 흠집없이 제압하도록."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움직인 건 일곱 명의 사람들이 아닌─
"반대야."
나였다.
일부러 낮게 깔린 목소리로 진중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 덕분일까. 그 누구도 '제압하라'는 명령을 시작하지 않았다.
"아무리 무기가 없다해도─"
탐정의 습관, [스토리텔링]. 나는 지금 바뀐 무대에서도 이야기를 위해, 약간의 [연기]를 하기로 했다.
"나는 기사다."
리더격을 제외한 주변의 이들 모두가 움찔했다.
"손가락 하나로도 충분해."
나는 오른손 검지로 리더격의 인물을 가리켰다.
"허세다. 그냥 제압해라."
"[인격 소거] 당한 척하고─ 족쇄가 풀릴 순간을 노린 거야. 내가 이대로 노예로 팔려갈 것 같았어?"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아직까지 탐정으로서의 릴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저들의 대화를 '읽어' 보았을 때, 이 몸의 주인은 명예를 실추당한 기사. 그 후에 노예 경매장으로 끌려온 것이다.
굳이 그 내용을 입 밖으로 꺼내며 확신하는 근거는 따로 있다. 지금 내가 걸친 천 안 쪽은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으니까. 경매가 시작되면 소비자들에게 노예의 [품질]을 쉽게 공개하기 위함이고, 녀석들이 말한 '인격'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힘으로 다루기 힘든 기사를 통제하려고 한 것이거나, 아니면─
변태적인 귀족들 취향이겠지.
실제로 원래 주인의 인격은 죽어버렸고, 어떤 경로인지는 몰라도 그 비워진 자리에─ 탐정 릴리. 내가 채워진 것이다.
족쇄(아마도 페톨리움까지 포함된)에 묶인 채, 주술사들에 의해 인격이 소거─. 빈 껍데기만 남은 인형에는 굳이 족쇄를 채울 필요도 없고, 소비자들 앞에 [전시]할 때에도 보기 흉할 테니 구속 없이 그냥 맨 몸에 천 하나 걸친 상태로 그대로 경매에 올라가기 직전의 상황이─
지금이라는 결론이다.
손가락을 뻗기 위해 들어올린 팔이 천 밖으로 드러났다. 기사치고는 꽤나 하얀 피부. 그 피부 위쪽으로 손목 쪽에는 피멍이 심하게 들어있었다. 형태로 보아, 인격이 남아있고 족쇄를 차고 있었을 때 빠져나가기 위해 버둥댄 것. 무의미한 일임에도 살고 싶어서 몸부림친 것.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참 불쌍하게 여겨졌다.
난 죽으려고 했었는데.
너는 살려고 애썼구나.
그래.
'살고 싶다'는 너의 의뢰.
이번만 받아줄게.
"허. 내가 직접 해야하는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위치에 있던 리더격이 나섰다. 기사에게 겁먹고 있던 부하들(아마 노예 경매장의 하수인들)이 물러서고, 리더격의 몸에 마나가 발현되기 시작했다. 릴리였을 때는 [마나 감응]조차 하지 못해서 볼 수 없었던 마나의 흐름. 그것들이 나에게 해를 끼치기 전에─, 저 사람 역시 마나 감응을 시도하기 전에─
선수를 쳐야 한다.
피잉─
풀썩.
"엉?"
나와 리더격을 제외한 모두가 당황스러움을 육성으로 뱉어냈다.
내 손가락 끝에서─ 푸른 빛을 띤 탄환이─ 그대로 튀어나갔으니까. 그대로 조준 당한 이의 머리를 꿰뚫었으니까.
기존의 권총에서 총성을 없애기 위한 방법으로는 [진공 마법]이나 [분리]와 같은 5성급 이상의 고위 마법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넘쳐나는 기사의 마나와 릴리의 마나운용 능력이 합쳐져─ 단순한 [원소 방출]만으로도 무소음 마나 총탄을 발사하는 특별한 기술이 된 것이다.
물론, 발포 전까지는 손가락을 가만히 둬야하고, 손가락 끝에 마나를 조금씩 집중시키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도 이번엔 일부러 느리게 말하거나 대화의 간격을 두는 것으로, [장전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좀 더 개량할 필요는 있겠지만, 처음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대체 무슨...!"
리더격이 쓰러지고 남은 이들이 당황한 사이, 내가 취해야 할 행동은 단순했다. 일전에 감옥 안에서 사용했던 기술의 응용─ 마나로 만든 검. 그 검으로 순식간에 남은 잔당들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이미 쓰러진 리더격 녀석에게 근접 검술은 승산이 없었겠지만, 그저 부하직원에 불과한 이들은 기사가 아니더라도 릴리의 실력으로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촤악─
"끄아아악!"
그다지 넓지 않은 실내에서는 다수의 이점을 살릴 수가 없다. 하물며 오합지졸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 덕에 릴리는 손쉽게 그들의 숨통을 끊어낼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마법을... 쓸 줄 알았다고?"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이 겁에 질린 채 말했다. 뭐, 당연히 이 몸의 주인은 쓸 줄 몰랐겠지. 체내의 마나량은 소드 마스터 급으로 높은데, 정작 본인이 운용할 줄 몰라서 물리적인 힘만 단련한 경우였으니까. 그 정도는 처음 [성찰] 때 다 파악했었다.
"설마 몰랐겠어?"
항상 말버릇처럼 내뱉는 말을 툭 던지며, 자연스럽게 목을 그었다. 나름의 [정당방위]였다지만, 너무 과했나?
뭐, 탐정 릴리였을 때는 더 심했지만서도.
***
주위의 위험 요소를 전부 배제한 이후 잠깐의 휴식을 가지기로 했다. 신체의 피로도 피로지만, 정신적으로 쉬어갈 필요가 있었으니까.
지금 위치는 [보관실]과 [경매장]의 사이. 와야 할 [상품]이 오지 않아 걱정하는 경매장의 인원들이 이곳으로 오기 전에, 나는 보관실 방향으로 역행했다. 마침 보관실에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아무래도 내가 오늘 경매의 [하이라이트]였던 모양이다. 마침 거울이 있기에, 드디어 바뀐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
나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푸른색의 머리. 화장을 하지 않았음에도 하얗다 못해 창백에 가까운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기사에 대한 편견이 있는 건 아니지만, 거울 속 뚜렷한 이목구비와 갸름한 얼굴은 기사치고 꽤나 귀여운 모습이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릴리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을 미소녀(?) 탐정이었는데─ 눈 앞의 소녀는 그런 릴리조차 평범하게 만드는 이였다.
...... 하이라이트... 맞긴 하네.
... ...... 기사라 그런가. 키랑 몸매도 나보다 훨씬...
의미 없는 감상평은 그만 두고, 피 묻은 천 대신 주위에 널부러진 다른 옷을 둘렀다. 그리고 굳이 신경 쓰고 싶지 않지만, 신경 쓰였던 한 가지.
["눈동자도 하늘색으로 변했잖아!"]
이 몸에 깃들고 나서 또렷하게 들었던 말. 원래는 하늘색이 아니었던 건가? 확실히 벽안(碧眼)은─
릴리의 눈이었다.
알맹이가 바뀌면서 눈동자 색만 바뀐 건가? 라기에는...
실제 릴리의 눈과 같아 보였다.
뭐─ 본인도 확실하게 구분 못하는데, 나중에 누가 보더라도 '죽은 탐정 릴리의 눈과 같으시네요?'하고 문제삼을 일은 없을 것이다.
감상은 여기까지. 거울에서 눈을 뗀 뒤에는, 오른팔을 살짝 뻗어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상태로, [원소 발현]을 시도했다.
손바닥 위로 푸른 빛이 감도는 마나는 그대로 푸른 색의 원소가 되었다. 이리저리 회전하며 손 안에 생긴 작은 구체형태의 원소. 주변의 공기가 눈에 보일 정도로 조금씩─ 선명하게 밀려나고 있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냉기.
역시나 얼음원소인가.
오른손 손바닥으로 향하는 마나를 통제하니, 그 즉시 작은 회오리와 함께 구체는 증발했다. 그 영향이 보관실 전체에 퍼진 건지, 얼굴 피부 위로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마나를 응용하지 못했던 기사의 마나는─ 얼음 원소 발현에 특화된 마나였던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마법을 사용해 마나를 체외로 내보내는데, 이 몸의 주인처럼 마나를 잔뜩 지녔음에도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마나의 특성이 머리카락 색으로 발현되는 경우가 있다.
물 원소계라면 짙은 파랑으로 나왔겠지만, 얼음 원소계니까 이렇게 밝고 푸른 머리카락이 된 거겠지.
나는 괜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성찰]하면서 체내의 마나를 파악했을 때 물 원소 아니면 얼음 원소 특화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그 둘을 구분했던 방법은 머리카락의 색깔이었으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방금 전 싸움에서 마나를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제압당했을 것이었다.
마나 응용도 적응되었으니, 이제는 탈출할 시간이다. 탈출 계획은 간단하다. 하나, 출입구를 찾는다. 둘, 출입구로 가는 길에 방해 요소들을 제거한다. 셋, 추격자나 다른 기사, 이단심판관을 피해 은신할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
예전 같았으면 베라트 산 어귀의 동굴로 향했겠지만, 이제 그곳에 안식 따위는 없다. 게다가 불법을 비롯해서 수많은 노예 경매장 중에 어느 곳에 있는 노예 경매장인지도 모르겠다. 코델리 스트리트 근처... 이기를 바라는 건 너무 욕심이다. 결국 자력으로 은신처를 찾아야 한다.
"....... 어?"
잠깐 고민하는 사이, 보관실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그 위화감이라는 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은 변화가 아니었다.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변화. 앞을 볼 수만 있다면 찾아낼 수 있는 틀린그림찾기.
그렇다.
분명 닫았던 문이 열려있다.
그리고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어느새 들어온 건지 모를 침입자는 릴리의 바로 뒤까지 접근해왔다. 그리고는─
"킁킁"
"우왓─"
갈아입은 옷 위로 드러난 목덜미의 체취를 맡고 있었다. 릴리는 목 위로 느껴지는 숨결에 놀란 나머지 화들짝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온 건─
"빨간 눈 아님..."
─검은색과 밝은 회색이 섞인 투톤의 단발. 보통보다도 꽤나 작은 몸집의 소녀였다. 특이한 점으로는, 머리카락 위쪽으로 동물의 귀가 나와있으며, 엉덩이 쪽에는 길쭉하고 검은 꼬리가 뻗어져있었다.
"근데 냄새는 같음. 샤를로트 맞음."
아무래도 원래의 몸 주인을 알고 있는 듯했다. 반가운 듯 미소 짓고 있으니까. 그리고 역시 목적은─
"구하러 왔음. 가자."
"......"
릴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작은 고양이 소녀를 따랐다.
***
탐정의 습관 중에는 [수집]도 있다. 필요한 자료나 정보를 직접 얻는 것. 하지만 릴리에게는 [수집] 능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항상 조수 르코가 도맡아서 해주었는데.
... 아무튼─ 탐정은 정보가 없으면 추리를 할 수 없다. 추리력만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정보.
인격이 죽어버리고 노예로 팔리기 직전의 기사─
삶을 포기한 이에게 불쌍하게도 몸을 내어준 불운의 소녀─
'네 이름─ 샤를로트구나.'
고양이 소녀의 말을 듣기 전까지 몰랐던 [정보]였다. 이제는 그녀를 '몸의 주인'이 아닌, '샤를'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
하지만 아직 샤를로트의 원래 말투나 버릇, 대인관계 따위는 잘 모른다. 그래서 '샤를'을 구하려는 저 고양이 소녀가 건네는 말에는 그저 고개짓으로만 답할 뿐이었다. 일단은 나를 '샤를로트'라고 믿게 하는 게 나을테니.
그리고, 지금은 그녀의 안내에 따라 탈출 경로를 찾아가고 있다.
기사의 육체라 그런가, 지치지 않고도 수인의 스피드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여기."
한참을 따라 도착한 곳은 출입구가 아니었다. 그냥 평범하고 긴 복도의 끝 갈림길. 하지만 이동했던 경로를 생각하면, 건물 내부에서도 가장 외곽 부분. 그것도, 벽만 없어진다면 바로 외부로 이어지는 최적의 장소.
아무래도 출입구를 직접 '만들 생각'인 듯했다.
고양이형 수인이라면 혼자서 잠입하는 거야 쉬울 테지만, 나갈 때는 샤를로트까지 챙겨야하니 벽에 구멍을 만들어 탈출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생각일 것이다.
"위험함. 멀어져야 함."
텅 빈 벽에 무언가 [장치]처럼 보이는 물체가 붙여지자, 고양이 소녀는 곧바로 총총 뛰며 떨어졌다. 나는 대충 복도 중간의 장식품 뒤쪽으로 숨었다. 마나 감응을 통해 보았을 때 마나가 주입되지 않은 것을 보면 [폭발형 마도구]는 아니다. 버튼만 누른 것을 보면─
"더 멀어져야 함...!"
"우왓─"
순식간에 길고 검은 꼬리가 샤를로트의 몸을 감쌌다. 마치 동아줄에 묶인 것처럼, 그대로 꼬리에 묶여 고양이 소녀가 달려가는 방향 그대로 몸이 붕 뜬 채 끌려갔다.
"라키가 만듦, 못 믿는다...!"
그렇게 말하는 소녀의 얼굴은 묘하게 긴장된 표정이었고,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역시 물리적인 회로 장치였었나. 어지간한 공학자들도 사제 폭탄은 쉽게 못 만드는 건데.
"루루와, 죽기 싫음...!"
그래, 루루와. 널 그렇게 부르면 되는구나.
... 근데 뭘 그렇게 멀리 가는 거니?
루루와는 샤를로트를 꼬리에 장착(?)한 채, 네 발로 필사적으로 달렸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싶을 정도로 달렸지만, 루루와는 계속해서 달렸다.
폭탄을 벽에 붙인 지 5~6초 정도 지났을까, 순간적으로 섬광이 일었다. 그리고 고막을 뒤흔드는 거대한 폭음과 함께, 30m정도 되는 복도 전체가 무너져내렸다.
... 미친 놈들인가.
건물을 다 부술 생각인가.
...... 이럴 거면 왜 잠입한 거지?
벙찐 표정으로 무너진 벽면 너머 보이는 광활한 바깥 풍경을 보고 있는 와중에─ 루루와는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이 사단이 났는데, 당연히 노예 경매장의 모든 사람들이 모이지 않겠는가. 루루와가 꼬리를 풀어주지 않은 덕분에, 편안(?)하게 따라갈 수 있었다.
... 그래도 탈출했으니 상관없나?
노예 경매장은 [셰로키 스트리트] 외곽에 위치한 건물이었고, 코델리 스트리트와도 가까웠다. 하지만 샤를로트의 몸으로는 원래 릴리가 지내던 곳으로 갈 수 없기에(물론 지금은 릴리여도 갈 수 없다.) 일단은 루루와를 따라서 허름한 창고에 도달하였다.
"페이시. 샤를로트 데려왔음."
창고 내부로 들어선 루루와는 허공에 대고 말했다. 아무래도 [샤를로트 구조 작전]에 성공하면, 이곳으로 데려오기로 계획한 듯했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다.
일단은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풀어져서는 안 된다. 노예가 될 뻔한 소녀를 구해주는 정의의 조직일 수도 있지만─ 상품을 독점하려는 변태 귀족의 수하일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묶여있지 않지만, 루루와의 검은 꼬리라면 언제든지 다시 포박당할 수 있으니까.
"이번에는 늦지 않았군요. 다행입니다."
쌓인 상자들 사이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키의 작품은 어땠습니까?"
연보랏빛 머리의 젊은 여성─ 루루와가 '페이시'라고 부르는 사람. 눈빛에는 생기가 없고 미묘하게 초점도 어긋나있지만, 검은 바지와 흰 셔츠를 입고 마치 아카데미 교수와도 같은 세련된 분위기를 지녔다. 루루와에게 건네는 말투는 존댓말이었지만, 릴리가 [읽기]엔 페이시가 더 높은 지위를 가진 듯했다.
"라키, 미쳤음. 루루와, 지쳤음..."
루루와는 진심으로 힘들어했다.
"고생했습니다. 그런데─"
페이시의 주의가 그제서야 '샤를로트' 쪽을 향했다.
"진짜 샤를로트─ 맞습니까?"
눈 색깔이 빨갛지 않은 것에 대해 페이시가 의문을 품었다.
"수건과 냄새, 같음."
으쓱거리며 대답하는 루루와. 원래의 샤를로트가 쓰던 수건에 묻은 체취를 비교했던 건가? 뭐, 내용물은 릴리일지라도─ 겉은 샤를로트가 맞으니까. 수인인 루루와가 저렇게 말한다면 페이시도 납득하겠지.
"......"
페이시의 표정을 읽었다. 아직도 의심하고 있나? 뭐, 사실 다른 사람이라는 건 들켜도 상관없긴 하다. 그럴 땐 릴리가 아닌 가짜 신분을 내세우면 되니까.
"...... 음?"
페이시는 두 눈의 초점이 한 순간 맞춰졌다.
그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릴리의 푸른 눈과 마주쳤다.
"당신─."
페이시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명탐정─ 릴리의 눈과 똑같군요?"
[완전기억능력(Photographic Memory)].
─그녀는 숨은 릴리를 찾아냈다.
yes24, 북센, 알라딘에 검색하면 단행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브런치에 올라온 것과 내용은 똑같고, 대신에 미공개 일러스트와 본편에 나오지 않은 설정 등의 내용이 추가된 굿즈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