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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 아들과 함께한 지리산 종주

그래 떠나는 거야!!

by 꿈꾸는 나무

기억을 다시 떠올려 보면, 당시 2019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는 인생에 있어 정말 힘든 시기였던 것 같다. 집안 내 불화, 점점 병세가 짙어가는 할아버지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 졸이던 간병, 하고 있던 일들에 대한 고단함... 모든 것들이 힘들었고, 아무리 밀어내려 해도 밀쳐지지 않는 내 앞에 놓인 거대한 장벽들 같았다. 당시는 거의 매주 주말이면 계룡시에서 수원까지 혼자 계신 할아버지 댁에 다녀왔던 것 같다. 가서 잠시라도 할아버지를 뵙고 오면 그 주는 그래도 마음이 편했다. 파킨슨병은 참으로 무서운 병이다. 여러 가지 형태로 증상이 나타날 수 있는데, 할아버지의 경우 아주 조금씩 증세가 나빠지다가 어느 순간 지나면 그 진행 속도가 매우 빨라져, 몸의 주요 기능이 상실되고 더 이상 약도 소용이 없어진다. 지금 생각하니 지리산 종주를 계획한 그즈음이 할아버지의 파킨슨병의 마지막 단계였던 것 같다. 이제와 다시 애써 기억하려 해도 기억이 뚜렷하게 나지 않는다. 아마도 나의 무의식이 그 당시 기억들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그 당시는 참으로 우울했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4월 중순쯤 무엇에 이끌렸는지 모르겠으나, 불현듯 아들과 지리산 종주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아들과 지리산 종주”로 검색을 해 과연 3학년 아들과 지리산 종주가 가능한 일인지 확인을 해 보았으나, 아무리 찾아도 초등학교 3학년과 지리산을 종주한 이야기는 없었다. 다행히 중 1 정도 아들과 지리산을 종주한 아빠의 사연을 찾았는데, 아들과 함께한 종주 모습이 너무도 보기 좋았다. 중학생과 초등학교 3학년은 신체 발달 정도가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아주 불가능한 일을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아들에게 물어보니, 좋다고 했다. 녀석이 지리산 종주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고 대답한 걸 알면서도, 나 스스로에게 분명 아들도 동의한 산행이라는 정당성을 부여했다. 아들도 동의했으니, 지리산 여행을 본격적으로 준비할 명분이 생겼다. 아내에게 지리산 산장 예약을 부탁하고, 휴가를 잡았다. 그날부터 등산용품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대용량 등산가방, 코펠, 등산복, 스틱, 우성이 등산 바지, 티, 모자, 장갑 등 거의 매일 택배가 왔던 것 같다. 그리고 주말이면 아들하고 가까운 계룡산으로 등산 사전연습을 가곤 했다. 계룡산 등산 중 두 번을 길을 헤맸고, 드디어 세 번째 시도 끝에 계룡산 천왕봉을 성공적으로 등반했다. 이제 지리산 천왕봉을 정복할 차례다. 우성이의 체력도 이 정도면 힘들겠지만 지리산 종주가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산행이 끝날즈음 사실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2박 3일간의 음식과 입을 옷들을 챙기고, 종주 경로를 꼼꼼히 시간 단위로 계획했다. 혼자가 아니라 초등학교 3학년 아들과 함께 이동하기에 좀 여유 있게 일정을 잡았는데, 수립한 등산 계획들이 정말 여유가 있는 계획인지, 무리한 계획인지 나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다. 결국은 이제와 생각하니 초등학교 3학년에게는 조금은 무리한 계획이었던 것 같다. 짐을 다 싸서 배낭에 넣으니, 배낭무게가 20kg이 훌쩍 넘었다. 겁이 덜컥 났다. 잠시도 메고 서 있기가 힘이 드는데, 이 배낭을 메고 등산을 하면서 아들까지 챙겨야 한다는 것이 가능할지가 두려웠다. 예전에 등산을 하고 하산할 때면 항상 무릎에 통증이 생겨 걷지도 못할 만큼 아프곤 했는데, 이러한 경험을 이야기하니, 사무실 선배가 테이핑 요법을 알려주었다. 덕분에 종주가 끝날 때까지 무릎 때문에 고생하지 않았다. 아들과 함께하기에 정말 철저하게 준비했던 것 같다.

계룡역에서 출발 전 찍은 사진

그렇게 준비하는 하루하루는 참 설레었던 것 같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힘들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때까지는 그것이 어느 정도의 고된 일인지 몰랐으니 말이다. 퇴근 후 아들과 집을 나서는 기분은 정말 끝내줬다. 계룡역에서 출발을 기념하는 의미로 찍은 사진을 보면 얼마나 설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아들과 함께하는 기차도 참으로 즐거웠다. 구례역에 도착한 후 미리 예약해 둔 호스텔에 짐을 풀고 아들과 시내여행을 했다. 참으로 오래된 동네였던 것 같다. 몇 번을 돌고 돌아 국밥집에서 아들과 식사를 하면서 막걸리를 두어 잔 마셨는데, 참으로 꿀맛이었던 것 같다. 아들과 함께 한 번도 와보지 않은 낯선 곳에서 함께 길을 걷고, 식사하고, 얘기하는 것이 너무도 소중히 느껴지는 첫날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를 타고 성삼재로 가야 하니, 숙소로 일찍 들어왔다. 돌아와 샤워를 하고 공용 거실로 나가니, 마침 내일 지리산 산행을 준비 중인 나보다 연배가 있어 보이는 분이 혼자서 막걸리와 인스턴트 족발을 안주삼아 다음날 산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침 혼자여서 적적했는지 나를 보자마자 한잔을 권하기에 한두 잔쯤은 내일 아침에 영향을 주지 않겠지라는 마음으로 받아 마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보니, 그분은 현직 경찰이고 지리산을 참으로 많이 다녀간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날밤은 그렇게 아들과 보내고 내일을 기약하며 잠을 청했다. 아들과 하는 모든 순간순간이 소중하고 감사한 하루였다.

다음날 아침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아들과 버스터미널을 향해 길을 나섰다. 아직 등산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어깨가 끊어질 것 같았다. (아들의 의견 : 나는 아직 지리산이 얼마큼 높은지, 면적이 넓은지 아무것도 모른 체 시작했다 기대다 됐다. 아무것도 모른 체 아무것도... 지리산 뭐 그깟 거 얼마나 크겠어~? 그땐 남한에서 제일 면적이 크고 남한에서 두 번째로 큰 산인줄 몰랐다. 뭐 첫 번째로 큰 산이 한라산인 건 알았지만 말이다. 악몽과 희망의 시작은 이제부터다.) 버스를 타고 지리산 등산을 위해 성삼재행 버스를 탔다. 성삼재에 도착하니, 이미 등산을 위한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아들하고 호기 좋게 등산로 입구에서 사진을 남기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지리산 종주를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걷지 않고 문제가 발생했다. 우성이가 힘이 들었는지 쉴 수 있는 공간이 나올 때마다 쉬자고 했고, 나 또한 20kg 넘는 배낭을 메고 걷는 것이 이렇게 힘이 드는 것인지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처음 몇 백 미터 가는 길이 참 힘이 들었고, 과연 2박 3일 동안 종주를 잘 해낼 수 있을 것인지 두렵기까지 했다. 그렇게 앞만 보고 계속 걷기를 계속했는데, 배낭의 무게가 점차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원래 내 몸이 그렇게 무거운 몸이었던 것처럼 익숙해졌다. 노고단까지 가는 길은 참으로 무난했다. 노고단에서 가방을 잠시 풀고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체격이 왜소한 초등학교 3학년 남자아이가 조그만 배낭을 메고 스틱을 저으며 종주하는 모습이 신기하고, 기특했는지,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한 마디씩 하며 간식도 주시고, 격려해주시곤 한다. 아마 종주 내내 얻어먹은 간식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는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씀들이, “너는 아빠 잘 만나서 어린 나이에 지리산을 알게 된 거다. 앞으로 커서도 힘든 일이 있으면 또 찾게 될 것이야, 나는 다 커서 이제야 지리산을 알았는데 말이다.” 솔직히 나도 지리산은 처음이고 아들과 서로 의지하려고 시작한 종주인데, 졸지에 지리산을 조기 교육시켜 준 훌륭한 아빠가 된 것 같아 참으로 뿌듯하게 느껴졌다.

내 김밥까지 뺏어서 먹고 있는 아들

노고단을 지나 약수터 공터에서 아들과 먹은 김밥 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평소에 밥을 너무 조금만 먹어 늘 엄마의 잔소리를 듣던 녀석이 자기 김밥을 어느새 다 먹고 더 달라고 해서 내가 먹던 김밥을 녀석에게 주었다. 시장이 반찬이라 하더니, 우성이도 많이 허기지고 지쳐있었던 것 같다. 후딱 점심을 먹고 다시 첫 번째 숙소인 연하천대피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초등학교 3학년과 종주를 하다 보니, 속도도 느리고, 자주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간식을 3일 치로 지퍼백에 나누어 담고 첫째 날 먹을 간식만 우성이 배낭에 넣었다. 우성이 배낭은 우성이가 입을 겉옷과 간식, 그리고 물 이렇게 최소한의 것들만 넣었다. 결국 다음날은 우성이가 그마저도 내 배낭에 넣었다. 역시나 지나쳐가는 등반객들이 우성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격려의 한마디, 칭찬 한마디, 초코바, 간식.... 아마도 이러한 것들 때문에 우성이가 힘들어도 순간순간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도 덩달아 힘이 났으니 말이다. 배낭의 짐의 무게가 점차 더 익숙해지고, 걸음걸이도 익숙해질 즈음 이제야 지리산의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 내가 드디어 아들과 꿈에 그리던 지리산 종주를 하고 있구나.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아들에게도 감사했고, 내가 너무 기특하게 느껴졌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세 곳이 만나는 삼도봉의 이정표를 배경으로 아들과 사진을 찍고 계속 나아갔다. 중간에 혼자 지리산에 온 젊은 아가씨를 만났는데, 지리산을 아주 자주 다녀간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화엄사부터 올라오는 길이라 했다. 잠깐 인사를 나누고 아들과의 사진을 부탁했다. 오래간만에 지리산에서 셀카가 아닌 제대로 된 아들과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아들이나 나나 지리산 종주가 처음이다 보니, 점점 속도가 느려졌다. 내가 구간별로 여유까지 고려하여 예상했단 시간들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우성이도 시간이 지날수록 지쳐가고 연신 “연하천은 언제 나오냐”라고 묻는다. 나도 어깨는 끊어질 것 같은데,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고, 아들은 힘들다고 징징대기 시작한다. 우성이가 얼마나 남았냐고 물을 때마다 처음에는 GPS로 위치를 파악하여 알려주곤 했는데, 산길로 가다 보니 도무지 거리가 줄어들지 않았다. 나중에는 지도를 꺼내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쉬고, 우성이에게는 “이제 2km만 가면 돼 다 왔어”라고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들 : 그때 실제 거리는 4km 정도였을 거다.) 한참을 가도 1.9km, 또 한참을 가도 1.8km 남았다 하니, 우성이는 힘이 빠졌나 보다, 짜증이 더욱 심해졌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갖고 있던 물도 다 마시고, 지나가던 마음 좋던 남자분이 주신 음료수도 다 마신 터였다. 결국은 우성이 배낭을 내 배낭에 묶었다. 제대로 묶지 않다 보니 내 배낭에 매달려 흔들리는데, 그래서 그런지 배낭의 무기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게 느껴졌다. 할 수만 있다면 우성이를 들쳐 안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배낭까지가 내 한계였다. 그렇게 고개 몇 개를 더 넘어 간신히 연하천 대피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를 추월해 갔던 수많은 사람들은 이미 저녁준비를 거의 다 마치고 하루의 고단함을 담소로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날이 어슴푸레 어두워질 무렵 아들배낭을 매달고 힘겹게 내려오는 우리 일행을 사람들이 발견하고서는 일제히 환호성과 박수를 쳐서 우리를 맞아 주었다. 모두들 우리 일행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다. 대피소 마룻바닥에 쓰러지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얼른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예약된 우리 대피소 자리로 옮겨 짐을 풀었다. 짐을 풀다가 옆에 우성이를 껴안고 나도 모르게 흐느껴 울었다. “우성아 우성아 끝까지 와줘서 너무나 고마워”. 바로 저녁을 준비했다. 햇반을 끓는 물에 넣고, 다음에는 부대찌개를 중탕으로 끓였다. 이어서 스팸을 구우니 저녁준비가 다 되었다. 우성이 녀석은 눈 깜짝할 사이 햇반 1개를 비우고, 밥을 더 달라한다. 내가 먹던 밥 절반을 주고 다시 햇반 하나를 준비해서 우리 둘은 정신 나간 듯이 저녁을 해치웠다. 식사를 하고, 양치를 한 다음 자리에 누웠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우성이가 자리에 눕더니, 엄마 보고 싶다고, 너무 힘들어서 집에 가고 싶다고 울기 시작했다. 나도 겁이 났다. 첫째 날은 어찌어찌 오긴 왔는데,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과연 종주를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아들 먹을 식량까지 배낭에 넣고, 혹시나 몰라 옷가지들도 챙기다 보니 가방이 너무 무거웠고, 무엇보다 우성이가 마음이 약해져 있는 것 같아 걱정이었다. 그날 저녁 우성이는 울다가 잠들었다. 피곤했는지 여기저기 뒤척이면서 잠들었다. 발바닥에 쿨파스도 붙여 주었다. 나는 여분으로 가져간 테이프를 무릎에 붙여 혹시 모를 무릎 통증을 대비했다. 잠이 들었다가 잠자리가 불편하고 다리가 욱신거려 중간에 깨었다. 중간에 포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아들을 데리고 남은 일정을 도저히 해 낼 자신이 없었다. 연하천에서 중간에 내려가는 길을 휴대폰으로 검색해 보았다. 중간에 내려가는 길이 있었고, 콜택시를 불러서 기차역까지 가면 집에 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잠들었다.

연하천대피소에서 아들과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7시쯤 눈을 뜨니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이미 길을 떠난 뒤였다. 우성이를 깨워서 아침을 준비했다. 햇반에 스팸이었는데, 역시 꿀맛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우성이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힘들게 얘기를 꺼냈다. “우성아... 힘들면 그만 내려갈까?”. 우성이가 대답이 없다. 그리고는 나에게 묻는다. “아빠는 어떻게 하고 싶어요?”. “솔직히 아빠도 힘든데, 우성이만 괜찮으면 계속 가고 싶어.” 우성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럼 계속해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 녀석 정말 멋진 놈이구나. 참으로 고마웠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성이 가방을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두 끼 식사를 했으니 내 배낭도 그만큼 가벼워졌다. 아침에 간단히 생리현상을 마치고, 몸과 마음을 가벼이 한 다음 우성이와 둘째 날 숙소인 장터목을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아침에 연하천에서 시작해 걷는 종주길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길이었다. 아침 햇살은 따뜻했고 좌우는 지리산의 크고 작은 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종주길은 그리 힘들지 않은 산 능성을 따라 난 오솔길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를 행복하게 했던 것은 앞에서 스틱을 쥐고 걸어가는 우성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복잡한 집안일들과, 쌓여있는 사무실의 일들도, 스마트폰도 티브이도 다 잊고 지금 이 순간만이 있었다. 우성이 가방에 매달아준 스텐 컵은 종주 내내 딸랑 소리를 내며 우리 일행이 가는 길과 함께했다. 아직도 벽에 붙어있는 지리산에서 우성이 뒷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면, 그때의 스텐컵 딸랑거리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그날의 아침 햇살, 그날의 새소리, 그날의 우성이 뒷모습은 평생 나에게 힘들면 꺼내어 회상하며 웃을 수 있게 해주는 선물과도 같은 추억이 되었고, 아마도 우성이도 그러할 것이다.

점심은 벽소령 대피소에서 먹기로 했다. 메뉴는 사발면에 햇반이었다. 사발면의 스티로폼 용기는 버리고 비닐봉지에 라면 내용물만 가져왔다. 여기서는 쓰레기도 모두 가져가야 하니 최대한 짐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화살표가 약수터를 가리키고 있어 우성이에게 물통을 주고 물을 떠 오라고 했다. 나는 그동안 식사 준비를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우성이가 오지를 않아 약수터로 우성이를 찾으러 갔다.(아들 : 나는 그때 봤다. “약수터 300m”... 이런)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약수터는 대피소에서 한참을 가야 했다. 저기 멀리서 우성이가 씩씩거리면서 (아들 : 씩씩거리지 않았어요!) 물통 두 개를 힘겹게 들고 오고 있었다. 이렇게 먼 곳에 약수터가 있었는지 알았다면, 혼자 보내지 않는 건데, 그럴리는 없지만 혹시 지리산 반달곰이라도 만나면 어떡하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우성이에게 미안했다. 점심 역시 꿀맛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장터목을 향해 걸었다. 오후가 되니, 체력이 점점 고갈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리산의 풍경은 매번 새로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가는 길에 잠시 벽소령대피소에 들려 숨을 돌린 후 아저씨들이 주시는 오징어를 씹으며 다시 걸었다. 세석에서 장터목으로 넘어가는 길은 절경 그 자체였다. 해는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고, 몸도 피곤하여 잠시 바위에 배낭을 내리고 우성이와 서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천왕봉을 오르기 위한 마지막 목적지인 장터목은 멀게만 느껴졌다. 우성이도 지쳤는지 계속 얼마나 남았냐고 묻는다. 어제의 상황이 다시 반복되었다. 나는 곧 나올 거라고 얘기했는데도, 우성이는 계속 지도를 확인해 보라고 한다. 고작 10~20분 걸었는데, 얼마나 위치가 가까워졌을까... 그래도 지도를 확인해 보라고 한다. 그런데, 어제보다도 상황이 더 안 좋은 것 같았다.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벌써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곧 있으면 날이 어두워질 텐데, 걱정이다. 고도가 높아져서 그런지 날씨도 제법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날은 곧 어두워졌다. 전화 신호가 잡혀 아내와 통화를 했는데, 산장에서 우리 일행이 오는지 확인 전화가 왔다고 한다. 갈 테니 예약된 자리를 다른 사람 주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태양이 원망스러웠지만, 그때 노을은 너무 아름다웠다. 조바심과 경이로움, 두려움이 겹쳐진 정말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었다. 참으로 힘들고 더딘 장터목까지의 길이었다. 우성이를 달래 가며 한참을 걸어 드디어 천왕봉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했다. 이미 날은 어두워져 있었고 다른 등산객들은 식사들도 마친 터였다.

이제 90%는 끝낸 거다. 침소에서 짐을 풀고 우성이를 끌어안고 또 흐느껴 울었다. 어제와는 다른 눈물이었다. 어제는 우성이와 첫 번째 관문을 무사히 통과한 것에 대한 기쁨의 눈물이었고, 지금의 눈물은 지리산 종주를 곧 성공할 수 있다는 그래서 목표한 것을 바로 눈앞에 두고, 또 포기하고 싶지만 다시 한번 용기를 낸 우성이와 나를 위한 칭찬의 눈물이었다. 이번엔 우성인 안 울었다... 얼른 주린배를 채우기 위해 햇반을 사고 초코파이도 샀다. 원래 데워주지 않는데, 전기가 남아서 전자레인지로 데워주셨다. 짜장과 스팸이 반찬의 전부였다. 허겁지겁 먹고 있는데 부부로 보이는 중년의 등산객이 우성이에게 소시지를 주셨다. (아들 : 그러며 “기특하네 어린것이 장터목 까지 왔네” 그 말이 나 우성이에게 큰 힘이 되었다.) 우성이 덕분에 정말 잘 얻어먹었다. (아들 : 걸을 때 와는 달리 매우 기분이 좋다. 휴식하며 주고받는 말 “수고했어” “아빠도요” 서로 수고했다는 말은 하고 휴식을 취한다. 어느 때보다...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휴식 중)

잠들기 전 작은삼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느낌이 불길했다. 할아버지께서 119 응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입원을 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파킨슨병을 몇 년째 앓고 계셨다. 최근에 병세가 많이 악화되어 있던 상태였다. 매주 병문안을 드리곤 했고 지리산에 오기 전주에도 할아버지를 찾아뵙고 지리산에 다녀온다고 말씀을 드렸다. 마음이 많이 불안해졌다. 삼촌은 걱정하지 말라 하지만, 별생각이 다 들었다. 결국 우성이에게 내일 천왕봉 올라가지 말고 바로 내려가자고 했다. 아쉽지만 천왕봉은 다음을 위해 아껴두자고.... 지리산에서 마지막 식사를 하고 다음날 아침에 백무동쪽으로 내려왔다. 할아버지는 그 이후 응급실을 계속 전전하고, 병세가 악화되어 3개월 후 하늘나라도 가셨다.

늠름한 아들의 뒷모습

지리산에 다녀온지도 1년이 넘었다. 집안 한편에는 지리산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시간순서대로 벽에 붙여 놓았다. 이른 아침 고단한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옷을 찾아 입을 때마다, 그 사진들을 보며 잠시나마 아들과 함께 지리산 산자락을 걷는 꿈을 꾼다. 배낭을 멘 아들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아들의 배낭에서 딸랑거리는 그때의 스텐컵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때가 자꾸만 생각난다. (아들 : 벌서 1년 전이구나 지리산을 간지 1달쯤 지난 거 같은데 말이다... 아침에 백무동 쪽으로 내려간다. 천왕봉은 못 찍었지만 그동안 일들을 생각하면 아쉽고 아, 물론 천왕봉을 못 찍어서 아쉽기도 했지만 그동안의 재미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너무 좋았던 추억인 거 같다. 집에서 멍 때릴 때 지리산을 생각한다. 지리산에서 다리 힘도 풀렸는데 그것 또한 재밌었다. 석양보기도, 걷기도, 쉴 때도, 산장에 도착했을 때는 사람들이 박수도 쳐주셔서 기분도 좋았다. 거의 끝에 힘들다고 투덜댔지만 끝에 다가갈수록 즐기게 되고 아쉬어진다. 그래도 힘들어서 짜증 또는 화나고, 산장에 도착해서 기쁘고, 지리산이 엄청 크다는 거에 놀라고, 끝내려니 아쉬운 마음들이 자꾸만 생긴다. 드디어 도착이다. 산에서 내려와서는 아빠와 기념사진을 찍고 힘들었으니 망고빙수를 먹으러 갔다. 달콤하고 시원한 빙수가 더욱 달고 시원하게 느껴진다.)

결국 이듬해에 우성이와 천왕봉까지 올라갔고 우리의 종주를 마무리 했다. 그리고 우성이는 초등학교때 지리산 종주를 두번이나 경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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