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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인 Dec 08. 2021

우리나라 박물관의 시작

창경궁이라는 거 알고 계시나요?

박물관 언저리를 다니며 일을 한 지 어언 30년이 되어 간다. 

시작은 어린이 박물관 교육 강사였지만 지금은 박물관 이외에서도 어린이, 성인 가리지 않고

 “박물관 미술관에 많이 가자, 멋지고 좋은 것 많이 보고 즐기자”라는 말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유튜브와 같은 온라인 매체를 통해서든 좋은 전시를 알리고 좋은 작품을 함께 보며 감상하고 그 감상을 나누는 일을 할 때 신바람이 난다.     



지금과 같은 박물관의 시초는 언제부터였을까?     


이렇게 내가 즐기며 다니는 박물관의 시초는 언제부터일까? 

Museum이라는 말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인 ‘뮤제이온’ 즉 제우스의 여신들인 뮤즈에게 바치는 사원을 의미하는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박물관의 출발은 왕과 귀족들의 예술품이나 수집된 희귀한 물건을 보관했던 시설에서부터다. 프랑스혁명 이후에야 박물관은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그런데 이건 서양의 역사(歷史)이고,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언제 어떻게 박물관이 생겼던 것일까? 학자들은 왕의 물건을 보관했던 천존고나 귀비고와 같은 보물창고가 신라시대에도 있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우리나라 박물관의 시작을 삼국시대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일반인들이 드나들었던 우리나라 근대 박물관의 시작은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그 시작으로 조선 5대 궁궐의 하나인 종로구 서울대학교 병원 맞은편에 위치한 창경궁을 들 수 있다. 창경궁은 세종대왕이 상왕으로 물러나 계신 아버지 태종을 위해 세우고, 수강궁이라 하였다. 이후 성종이 세조의 비, 예종의 비, 성종의 아버지 의경세자(덕종)의 비인 세 대비마마를 모시기 위해 새롭게 중건하면서 창경궁이라 하였다. 창덕궁의 생활공간이 모자라 그 옆에 있던 수강궁에 몇몇 전각을 보태어 세운 궁궐이라 정문도 남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향해 있다. 전각의 규모나 배치도 경복궁이나 창덕궁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전각의 수가 많지 않고 규모가 아담해서 한 바퀴 산책하기 딱 적당한 곳이기도 하다.      



뚜벅뚜벅 창경궁의 흔적을 찾아보다.     


보물 384호인 정문 홍화문을 지나 들어가면 구슬처럼 맑은 물이 흘러간다는 옥천교가 나온다.  옥천교를 건너면 명정문이 나오고, 그 명정문을 지나면 명정전을 볼 수 있다. 본래는 경복궁이든 창덕궁이든 조선의 궁들은 건물들로 꽉 들어차 있어야 한다. 그러나 창경궁 역시 다른 궁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전각이 다 헐려버리고 덩그러니 잔디밭만 있다. 다행히 요즘은 여러 궁에서 열심히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창경궁은 명정전 이외에도 영춘헌, 집복헌, 양화당, 통명전, 환경전, 경춘전, 함인정 등 여러 전각이 그래도 남아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이 ‘통명전’이 그 유명한 장희빈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장희빈이 인현왕후에게 저주를 내리기 위해 흉물을 묻었던 곳이다. 이곳을 돌아보고 양화당과 집복헌 사이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 언덕에 다다르면 고즈넉한 창경궁이 한눈에 보인다. 언덕에서 왼쪽으로 돌아서면 나무가 우거진 곳에 ‘자경전터’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창경궁의 자경전은 정조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 씨가 머물렀던 곳으로 지금은 이렇게 빈터로만 남아있다.  

이 창경궁이 바로 우리나라 근대 박물관이 시작된 곳이다.      



창경궁의 오리지널리티가 훼손되다     


커피를 좋아했다고 알려진 고종은 개항 이후 외국의 근대문물을 받아들이던 중 박람회, 박물관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고종이 강제 퇴위되면서 덕수궁에 머물고 그 아들 순종이 황제를 이어받아 창덕궁으로 이어 하게 된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시기에 일본 정치가들과 친일세력들은 궁을 공원화하기 시작한다. 그중 창경궁에 박물관과 동, 식물원을 세울 계획을 세우면서 이토는 “왕실의 오락과 공중의 관람에 이바지하기 위해 세운다.”라고 기록을 남겨놓았다. 1908년 신문기사에 창경궁에 제실박물관 및 동, 식물원을 설치하기 위해 조사하고 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나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 창경궁은 어릴 적 소풍 갔던 곳으로 기억되고 있다. 동물원뿐 아니라 지금도 멋진 온실이 있는 식물원이 있던 곳, 벚꽃 놀이하러 엄마 손 잡고 놀러 갔던 곳, 벚꽃놀이 때면 많은 인파가 몰려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뉴스를 접하곤 했던 창경원으로 남아있다.      



초기에는 대부분의 건물을 그대로 전시실로 사용하였고 영춘헌은 박물관 사무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명정전에는 석각품을, 경춘전에는 고려품 진열장을, 통명전에는 회화 진열장 등이 설치되었는데 지금 우리가 전시장에서 보는 것과 비슷한 형태의 진열장 안에 유물들을 전시하였다. 

그런데 사실 이 창경궁에 세워졌던 박물관의 이름이 애매하다. 이곳은 무슨 박물관이다라고 현판을 건 것이 아니기에 명칭에 대해 아직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은 듯하다. 대한매일신보에 제실박물관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었으니 <제실박물관>이라고 하자는 학자도 있고, 창경궁에 있었으니 <창경궁 박물관>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는 상황이다. 


어찌 되었던 1908년 유물을 전시하기 시작하였고 그다음 해인 1909년 11월 1일 순종은 국민들과 함께 즐기기 위해 일반에 공개하여 ‘여민 해락’與民同樂 정신을 구현했다. 순종은 휴관일인 목요일에 관람을 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근대 박물관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유물들은 삼국시대나 고려 왕실의 무덤에서 발굴된 것들인지라 조선시대의 정서상 무덤 속 유물이 반가웠을 리 없다. 무덤을 손상한 것 자체가 조상께 죄를 짓는 일이고 그 무덤 속 물건을 궁에 들이는 것은 더 꺼림칙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존엄한 왕이 계신 궁에 일반인들이 모래바람 일으키며 드나든다는 것은 감히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일부 대신들은 격하게 반대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1910년 일제강점기의 시작으로  또한 목조건물로 인한 전각의 화재 문제 그리고 도난에 대한 안전문제로 지금 서 있는 자경전 터에 새로운 건물을 세웠다. 이후 서적을 보관하는 도서관으로 사용되다가 결국 1992년 철거되었다. 지금은 박물관이 있었다는 흔적도 없이 빈터로 남아있다.  

창경궁 한 바퀴 돌아보는데 이런 이야기가 아무짝에도 필요 없지만 그래도 창경궁은 자신의 이런 역사를 누구라도 알아주었으면 하지 않을까 싶어 적어 본다.     



자경전을 넘어 뒤뜰의 온실까지 다녀오다 보면 시간이 제법 걸린다. 아마 해가 뉘엿뉘엿해질 것이다. 창경궁의 전각들에 불이 켜지면서 아무도 없는 이곳을 바라보게 된다면 조선시대로의 시간여행을 온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마치 전각의 문을 열고 누군가가 나올 것만 같은·····.





#창경궁 #근대박물관 #제실박물관 #창경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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