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립박물관은 어디에 있을까요? 혹시 그곳에 가 보신 분 계실까요?”라는 질문을 가끔 한다. 사람들을 만나 박물관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초등학생부터 40대까지는 대부분 당연히 알고 가본 적이 있다고 답을 한다. 하지만 50이 넘어가면 어디 있냐? 경복궁에 있는 거 아니냐?라는 답을 간혹 듣는다. 아마도 중장년층 성인 남성들의 경우 더더욱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이 낯설지 않을까 싶다.
지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박물관은 용산에 있다. 본래 이곳은 미국 군사기지로 이용되던 곳으로 미군기지 남쪽에 있던 골프장이 용산가족공원이 되었다. 여러 후보지 중에 이곳이 박물관 부지로 결정되면서 공원과 박물관이 함께 있는 복합 문화단지를 염두에 두었던 듯하다. 이런 계획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은 2005년 10월 용산에 새롭게 둥지를 틀었다. 엊그제 같은데 개관한 지 벌써 15년이 넘었다.
이참에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의 해방 이후 역사를 한번 되짚어보려고 한다.
해방 이후 경복궁 안에 있었던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인수하여 개관하였고 한국전쟁 중에는 소장품을 부산으로 임시 이전하기도 하였다. 부산에서 경복궁으로 복귀한 후에는 국립 민족박물관이 있었던 남산분관에서, 남산분관에서 다시 덕수궁 석조전으로, 1972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현 국립 민속박물관 건물로 신축하여 개관하였다. 1986년 다시 중앙청(일제 강점기 시절의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새롭게 문을 열었고 1996년 11월 중앙청 건물이 철거되면서 현 국립 고궁박물관으로 이전 개관한다. 그 이후에는 용산의 새 건물로 이전하였다.
전시유물을 감상하고 즐기기 위해서 가는 박물관이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처럼 간단하게나마 역사를 조금 알고 가면 의미가 남다르지 않을까?
이곳 용산에 자리 잡기까지 숨넘어갈 만큼 어지간히도 이사를 자주 다녔다.
이사에 따른 박물관의 유물 포장만큼은 달인의 경지에 이르지 않을까 싶다. 유물이 한, 두 점도 아닌 데다가 그냥 이삿짐 싸듯 짐을 쌀 수도 없는 노릇이고, 소중한 유물 하나하나 분리하고 포장하려면 어디 일이 한 두 가지겠는가?
유물 포장만 어려운 게 아니라 보존하는 것에도 어려운 점이 많았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부산에 있었던 유물 임시 보관창고에서 불이 나 소중한 유물이 훼손되거나,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망실(잃어버리는 것) 되기도 하는 등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2005년 용산에서 국립중앙박물관 개관했을 때의 일들이 생각난다. 세계 6대 박물관이라는 문구가 박물관 벽면에 떡하니 쓰여있었다. 개관 당시에는 관람객들이 줄을 서 입장할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루기도 했다. ‘와우 대단할 걸. 세계 6대 박물관이라니.’라는 생각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시아 대륙의 끝에 있는 이 작은 나라의 국립중앙박물관에 과연 세계의 사람들이 올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세계 6대 박물관이라 함은 런던의 대영박물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과 같이 전 세계 사람들이 전시를 보기 위해 모여들어야 하는데, 이곳은?이라는 의구심이 든 것은 사실이다.
개관 이후 시간이 지나며 그 많던 관람객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수학여행 철이나 학생들 단체관람 또는 주말의 관람객 빼고는 평일이면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다. 오죽하면 나라도 매일 가서 박물관을 휑하게 만들지 말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또 사람들이 있어봤자 1층 정도만 모여 있어 2층, 3층으로 올라갈수록 확연하게 관람객 수가 줄어들었다. 이러다 보니 3층에 전시설명을 해주시는 선생님들이 관람객을 쫓아다닐 정도다.
세계 6대 박물관이라 함은 박물관의 소장 유물의 규모가 아니라 건물 규모가 아닌가 싶다. 박물관은 지하 1층에서 지상 6층까지의 건물로 동관의 1~3층에서 상설전시, 주로 서관에서 특별기획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다. 어린이 박물관, 도서관, 교육실이 있을 뿐 아니라 야외 전시장, 부설 극장까지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6대 박물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지진에 대비한 내진설계까지 완비된 곳이다. 실제로 가서 보면 박물관의 쾌적함에 한 번은 놀랄만하다. 그렇게 한적하던 박물관이 좋은 전시가 이어지면서 해가 갈수록 관람객 수가 늘어나고 있다. 요즘 같은 코로나 시기에는 해외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고 고 이건희 전 회장의 기증 유물에 대한 관심도 때문에 더더욱 인기가 높아졌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가 사람들 입에 많이 회자하니 박물관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무척 반가울 따름이다.
‘오시는 길’은 지하철 이촌역에서 내리면 박물관 앞마당까지 이어져 있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널찍하게 마련된 지하 주차장에 주차하고 위로 올라오면 바로 박물관 전시장 건물 앞에 다다르게 된다.
상설전시는 무료이며 특별전시의 경우 전시에 따라 관람료가 있는 경우가 있다. 상설전을 관람하다 쉬어가고 싶으면 상설전시가 있는 전시동 1층의 신라실 끝에 경천사 탑 식당으로, 2층에서는 서화실 옆 으뜸홀 카페로, 3층은 세계 도자실 옆에 사유 공간 찻집을 이용하면 된다.
전시동을 보고 나오면 이번에는 야외 전시장 유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야외 전시장에는 석탑, 석등, 석비 등 역시나 보물과 국보급의 석조물들이 구석구석 배치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종로에 있어야 할 보신각 종이 전시되어 있어 이 역시 볼 만하다.
야외 전시장까지 돌아보고 나면 ‘거울못’이라는 연못 안에 있는 ‘청자정’이 남아있다. 이곳에 들어가 박물관 전면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할 수도 있겠다.
박물관이 워낙 최신식 건물로 세련되게 건축되었으니 멋지지만, 그래도 유물 이외에 우리나라를 상징할 만한 것이 뭐 없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분께 ‘청자정’을 추천한다.
‘청자정’은 청자 기와를 얹은 정자라는 말이다.
청자 기와와 관련 있는 왕은 고려 18대 왕 의종이다. 의종은 유람 다니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유람하다 연못을 만들 수 있는 좋은 자리를 보면 민가를 헐어 연못을 만들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의종은 왕궁의 뒤편 연못에 ‘양이정’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청자기와를 덮었다고 한다. 그 당시 청자는 재료를 구하는 것부터 완성하기까지 최첨단의 고급 기술이 있어야만 만들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청자는 왕실이나 최상위 계층만을 위해 특별히 제작되었는데, 그런 청자로 정자의 지붕을 덮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의종이기에 가능했던 일인가 보다.
세계적이었던 자기 제작 기술로 만들어졌던 고려청자를 보여주고자 용산 박물관 연못에 ‘청자정’을 지었다. 하지만 실제 이 ‘청자정’의 지붕이 청자라는 사실을, 또 청자 제작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깊이 있게 아는 사람을 본 일이 거의 없다. 외국 유물은 관심이 있어도 우리 것은 잘 모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하철을 이용한 경우에는 전시실로 가는 계단을 올라갈 때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청자기와에 잠시라도 눈길을 줄 수 있다. 반면에 주차장을 이용한 관람객이라면 이마저도 보지 못하고 전시실로 향하게 된다. 동선이 이렇다 보니 청자 기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아주 적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실내 전시장, 야외전시장, 그리고 정자와 연못까지 갖춰져 있다. 수천 년에 걸쳐 우리만의 정서를 담고 있는 품격 있는 유물들이 박물관에는 무궁무진하게 있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유물들로 가득 찬 국립중앙박물관을 안 가볼 이유가 없다. 무료인 데다가 아무리 오래 있어도 나가라는 사람도 없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며 아주 쾌적하다. 한 바퀴 돌고 나면 두 눈 가득 수천억의 보물을 담아올 수 있다. 이렇게 좋은 문화시설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그러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일단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