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서울시립미술관
완연한 봄이다. 곧 여름이 될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파릇파릇 새잎이 나고 맑은 하늘을 보면 '봄바람난다'라는 말이 있듯이 이런 봄을 즐기는 일이 나에게는 전시를 보러 다니는 것이다.
좋은 전시가 있다 하여 부지런히 길을 나선 곳이 정동에 있는 서울 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은 일제강점기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재판을 받았던 경성재판소였다. 해방 이후 대법원 청사로 사용하다 1995년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 이렇게 건물의 앞면만 남기고 안과 뒷면을 현대식 건물로 리모델링하여 2002년 근대와 현대가 어우러진 미술관이 되었다. 정면을 보면 화려한 창문과 대형의 원형 아치 입구가 장중함과 우아함을 보여주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현대식 인테리어를 볼 수 있다.
점심시간이라 사람들이 따뜻한 봄볕을 즐기며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다. 인근 회사에 다니면 낮에 덕수궁 가서 한 바퀴 산책도 하고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나 시립미술관에서 감상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정작 직장인들은 세월 좋은 소리 한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날 좋은 봄날 점심시간이라 전시장 안까지는 아니라도 이렇게 밖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조각가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를 하고 있다.
2년간 이건희 기증유물에 대한 소식이 워낙 사람들에게 큰 뉴스였기에 지금도 이건희 기증유물 관련 전시는 전회 매진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코로나 시국에 삼성가의 유물만 기증된 것이 아니라 권진규기념사업회와 유족도 조각가 권진규의 작품 141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였다. 그리고 기증을 받은 시립미술관은 올해 2022년 권진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고자 이렇게 전시를 열었다.
우리나라 근현대 작가를 물어보면 그래도 이중섭, 김환기, 박수근과 같은 몇몇 사람은 알고 있지만 조각가를 물어보면 아는 작가가 거의 없다. 조각가 자체가 드물다. 그중에 권진규가 있어 학자들은 다행이다라는 표현을 한다.
외국의 조각가를 물어본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하는 사람의 로댕 정도는 알고 있는데, 로댕의 제자 부르델이 있고 이 부르델의 제자로는 현존하는 가장 핫한 조각가로 작품가 1000억을 넘는 자코메티가 있다. 권진규 역시 일본에서 이렇게 로댕이나 부르델 풍의 근대 조각을 배웠다.
권진규는 100년 전 1922년 함경남도에서 부유하게 태어났다. 춘천공립중학교를 다녔던 인연으로 얼마 전까지 잠시나마 춘천에 권진규 미술관이 있었다. 이후 일본에서 유학하던 형을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고 일본에서 무사시노 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하여 조각을 시작한다. 일본에서 그의 모델이자 아내가 되는 도모를 만나 조각을 하고 공모전에 입상도 하면서 작가로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홀로 된 어머니와의 생활뿐 아니라 스승을 벗어나 탈바꿈하고자 하는 내적 요청으로 일본인 부인을 두고 귀국을 결정했다.
동선동에 아틀리에를 직접 짓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 외 대부분의 시간을 수행하듯 아침, 오전, 오후, 밤으로 나누어 작업을 했다. 일본 전시회에서는 큰 호평을 받았지만 일본에서 8년 만에 다시 만난 일본인 부인의 재혼 소식과 국내 전시에서의 냉담한 반응은 권진규를 힘들게 하였다.
1970년대 불상 제작에 몰두하면서 테라코타 이외에도 건칠기법으로 다양한 작품을 제작한다. 흙으로 형상을 만든 후 여러 겹의 모시나 삼베를 겹쳐 옻칠을 하고 흙을 제거하여 만든 건칠 작품들은 아주 오랜 기간 보전이 가능하다. 2018년에 열린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특별전>에서 1000년이 넘은 <건칠희랑대사 좌상>을 보고 그 생생한 표현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권진규는 이러한 끊임없는 작업에 대한 열정을 뒤로하고 1973년 5월 51세의 나이로 자신의 자신의 작품을 소장하기로 한 고려대학교 현대미술실 개막식에서 자신의 작품이 전시된 것을 본 후 다음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이번 전시는 불교에 침잠했던 그의 생을 따라 전시의 소주제가 입산, 수행, 피안으로 전개되어 있고, 전시 제목은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노실의 천사>다.
소제목은 생을 마감하기 1년 전 1972년 조선일보에 실린 권진규의 시 <예술적(藝術的) 산보 – 노실(爐室)의 천사(天使)를 작업하며 읊는 봄, 봄>에서 따왔다.
노실(爐室). 화로(가마)가 있는 방에서 그의 손에서 탄생한 천사 같은 작품들.
처음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지원의 얼굴>이라는 여성 흉상을 보고 작가가 누구지? 하고 찾아보게 되면서 알게 된 권진규.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의 흉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상, 자신의 모습을 제작했던 자소상, 탈, 가면, 기물, 잡상뿐 아니라 불교와 함께 하면서 제작된 불상 또는 주문에 의해 제작했지만 거절당한 예수상 등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이런 작품도 있구나를 알 수 있다.
하마터면 위대한 이 작가의 작품이 어설프게 전시되어 그 빛을 발하지 못할 뻔하였다. 유족들이 권진규 미술관이 건축되길 바라는 마음에 한 사업가에게 유물을 양도하였지만 미술관 건축이 미뤄지고 오히려 대부업체 창고에 보관되며 법적 다툼이 벌어졌다. 다행히 소송에서 이기면서 작품들을 찾아올 수 있었고 권진규기념사업회와 유족은 141점의 작품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였다.
물론 이 특별전이 끝나고 나면 아마도 상설전시공간이 마련될 듯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조각 137점을 포함하여 회화, 드로잉, 아카이브 등 총 173점을 보는 전시는 다시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전시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꼭 시간을 내어서라도 보시길 적극 추천한다.
유족들은 안타까운 작가로 기억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한다. 나 역시 안타까운 작가라는 표현보다는 기억하고 싶은 작가라는 말을 쓰고 싶다.
전시기간 : 2022.03.24~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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