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 쪼개기는 왜 해야 하는가
흔히 사회 초년생들에게 통장 쪼개기는 기본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에 최근까지도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 통장 쪼개기의 필요성을 느꼈고, 해보니 장점이 많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
통장 쪼개기를 하기 전 나는 하나의 파킹통장에 내가 가진 모든 현금(주식 등을 제외한 순수 현금 자산)을 넣어놓고 1~2개의 신용카드와 하나의 체크카드를 이 계좌에 연결하여 사용했다. 이랬더니 신경 쓸게 없어서 편하기는 했지만 내가 정확히 매년, 매달 총 어느 정도의 돈을 사용하는지, 그리고 각 카테고리에는 얼마나 사용하는지를 명확히 모르고 있었다. 당연히 재무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항상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내가 객관적으로 돈을 많이 쓰는지, 적게 쓰는지, 매년 얼마나 저축을 할 수 있을지 알기 어려웠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연말정산하고 파킹통장에 모든 현금을 넣어놨다. 소비도 계획적으로 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실 그래도 돈을 모으는데 딱히 문제는 없었다. 내가 기본적으로 소득 대비 소비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최근부터 백테스팅에 기반한 자산배분 전략으로 어느 정도 수익률과 변동성이 예측 가능한 투자를 하게 되면서('코딩으로 전재산 투자하기 - Intro' 참고) 은퇴 시기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재무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내 소득과 지출에 대한 히스토리를 객관적인 지표로 관리하여 앞으로의 삶의 방향성을 설정하고, 별생각 없이 낭비하는 지출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자연스레 통장 쪼개기를 하게 됐다.
물리적으로 통장을 여러 개로 쪼갰을 때의 가장 큰 장점은, 내 지출이 직관적으로 구조화되고 내 돈의 흐름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었다. 통장을 어떻게 쪼갤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카테고리 별 연간 지출액을 확실하게 조사하게 되고, 앞으로 어떤 삶을 추구할지 고민하게 되기 때문이다(어디에 돈을 얼마나 쓸지 미리 예산을 정하기 때문에). 그리고 생활비 지출이 들쑥날쑥하지 않도록 여행과 같이 한 번에 큰돈이 들어가는 금액을 별도의 카테고리로 분리하게 되었고, 1년에 충동적으로 너무 많은 여행을 가지 않도록 연간 예산을 설정하여 아무리 가고 싶은 여행지가 있더라도 예산이 부족하면 참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매달 유한한 금액 내에서만 생활하게 되니 충동적이거나 굳이 불필요한 지출이 줄어들었다. 최근에 이러한 필요성을 더 느낀 이유는, 작년에 스위스 여행을 가느라 620만 원이라는 큰돈을 계획 없이 소비하기도 했고, 앞으로 결혼과 주택 마련과 같이 목돈이 들어갈 일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슬슬 스스로 소비에 제약을 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은퇴나 노후계획을 위해서 내 소비를 정량화하고 예측 범위 안에 둘 필요성도 생겼다. 사실 이게 처음에만 이런 구조를 짜주고 한두 달만 습관을 들이면 별게 아닌데 귀찮아서 미루게 되는 거라, 가능하면 빨리 습관을 들이는게 좋은것같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백 마디 말보다 하나의 그림이 이해에 더 도움이 될것이다.
아래는 내가 실제로 사용하는 다이어그램을 단순화시킨 것이다(원래는 화살표 위에 금액도 적혀있지만 지웠다).
나는 우선 크게 아래의 5개의 통장을 사용한다. 위의 그림에서 주황색 네모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월급 통장
생활비 통장
비정기지출 통장
자동이체 통장
투자금 임시 통장
월급 통장은 말 그대로 월급을 받는데만 사용한다. 월급이 들어오면 며칠 안에 생활비 통장, 비정기지출 통장, 자동이체 통장에 정해진 액수만큼 자동으로 빠져나가고, 남은 금액은 월말에 내가 직접 주식투자 통장으로 이체한다. 이론적으로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0원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월급 통장에서 정해진 액수만큼 자동이체가 되며, 체크카드를 연결해서 사용한다. 밥, 카페, 술, 교통비, 미용실, 문화생활, 세탁 등 모두 여기서 사용한다.
1년 동안의 지출이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지만 매달 반복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비정기적인 지출(여행 자금, 이벤트성 지출(생일, 명절, 기념일), 축조의금, 자동차 유지비, 강아지, 비상금)에 대해 연 단위 예산을 설정하여 12 등분한 금액을 매달 입금하는 계좌. 연 단위 예산이다 보니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금액을 트래킹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체크카드보다 혜택이 큰 신용카드를 연동하여 사용한다. 축조의금을 인출할 때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토스뱅크 체크카드도 연동하여 사용한다. 카테고리 별 연간 예산은 매년 초에 조정할 수 있다(새로운 카테고리를 추가하거나 기존의 카테고리를 삭제할 수도 있다).
참고로 나는 앞으로 나를 결혼식에 초청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에 대한 축의금 액수를 구글시트에 모두 적어놓고, 결혼을 많이 하는 시기인 향후 3년 동안의 1년 예산을 짜놓았다.
정기구독이나 통신비, 인터넷 등은 결제일이 제각각이며 내가 임의로 변경하기 어렵거나 번거로운 경우가 있다. 그래서 자동이체되기 전까지 보관되는 통장이다. 월급통장에 월급이 들어오면 내가 사용하는 월 자동이체 금액의 총합만큼 이곳으로 자동이체한다. 가끔 계좌 자동이체로 결제가 되지 않는 서비스들이 있어서 연회비가 없는 마스터 체크카드를 하나 발급해서 연동해두었다. 이 체크카드는 실물카드를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투자를 위한 자금을 모아두는 통장이다. 월급이 들어오면 자동이체가 되고 남은 금액을 모두 이곳으로 입금한다. 이론적으로는 돈이 이곳에 머무르는 시간은 길지 않으며, 바로 주식계좌로 입금이 된다. 나는 현재 미국주식만 하는데 타이밍을 보고 주식을 매매하지 않고 매달 말에 포트폴리오에 맞춰 리밸런싱을 한다. 적립식 투자하듯 매월 추가되는 금액을 리밸런싱하는날 일정한 비중에 맞춰 분산투자한다. 하지만 환손실 리스크 등으로 가끔 달러로 환전하기 전에 잠시 머무르는 용도로 주로 사용하고 있다.
이 통장에 이체하는 금액은 매번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가스비, 전기세, 전세대출이자 같이 매월 액수가 다른 지출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전 달과 큰 차이는 없어야 한다.
월급통장의 경우 이론적으로는 0원으로 유지되는 것이 좋지만 몇 가지 한계가 있었다. 우리 회사 월급은 매월 말일에 들어오는데 휴일인 경우 그보다 앞선 휴일이 아닌 마지막 날에 들어오기 때문에 입금날짜가 항상 달라진다. 자동이체 설정은 보통 특정한 날짜나 말일로만 설정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말일로 설정해 두었다. 그래서 만약 말일이 휴일이라면 월급이 월급통장에 최대 며칠 머물 수 있게 된다. 사실 이건 별 문제는 되지 않는다.
두 번째 한계는 우리 회사에서 식대를 지급하는 방식이다. 우리 회사는 점심과 저녁 식대를 각각 1만 원씩 지원해 주는데, 개인 법인카드를 지급하여 각자 결제하고 매월 22일에 월급통장에 사용한 만큼 입금해 주는 식으로 운영한다. 그리고 법인카드 대금은 매월 23일에 전월 사용액수가 빠져나간다. 나는 내 실제 식비에서 회사 식대 지원금을 빼지 않고 식대 또한 소득의 일환으로 간주하기로 했다. 그래서 매월 말에 가계부 정산을 하면서 생활비에서 이번달에 사용한 법인카드 금액만큼 월급통장으로 이체한다. 그리고 혹시라도 잔액부족으로 카드비 납부가 안되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월급통장에는 항상 넉넉하게 70 만원을 넣어둔다.
세 번째 한계는 생활비를 체크카드로 사용하는데 보통 신용카드보다 혜택이 훨씬 적다는 점이다(참고로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비정기지출의 58% 정도 수준). 그리고 나는 혜택이 복잡한 신용카드를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경쓸게 적은 항공 마일리지 카드를 사용하는데, 연회비를 고려했을 때 체크카드 대비 더 얻을 수 있는 혜택이라고 해봐야 보통 한달에 2만원 꼴도 안되는 정도다. 나는 체크카드를 사용함으로써 얻는 이점이 이정도의 가치는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사실 비정기지출 통장의 경우 처음에는 토스뱅크의 ‘나눠 모으기’라는 기능을 사용하여 더욱 세분화하여 따로 나눠 보관하려고 했다. 이렇게 하면 각 카테고리별로 잔액이 명확히 분리되어 보여서 가시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특정 카테고리의 지출을 하기 전에 직접 사용한 금액을 토스뱅크 통장으로 빼야 했다. 항상 일정 금액을 유지하여 결제한 뒤에 사용한 금액만큼 이체해 줄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귀찮은 건 여전했다. 결국에는 연 2%의 이자를 주는 토스뱅크 통장에 모든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금액을 모아두고, ‘편한가계부’라는 앱의 연간 예산 기능을 사용하여 가시성을 확보하여 보완하기로 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재무계획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예상치 못한 이벤트에 의해 계획을 조정해야 할 수 있겠지만 한 번 계획을 세웠으면 금방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계획을 세울 때 각종 연금과 부모님의 재무 및 건강 상태, 보험 등도 모두 고려하여 예상치 못한 이벤트가 발생할 확률을 최대한 낮추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재무계획, 가계부와 관련된 더 많은 이야기는 추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