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우리나라 경제 성장과 더불어 집의 형편이 점점 나아진 희망적인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렸을 때 방한칸 월세로 살았던 참으로 가난했던 집에서 지금은 중산층의 안정된 가정을 이루고 있다.
우리 가족이 정말로 열심히 살아서 오늘날 안정된 모습을 이루는 과정을 글로 쓰고자 한다.
1960년에 결혼한 엄마 아빠는 방한칸에 사과궤짝 하나로 시작한 정말로 가난한 부부였다.
천안에서 결혼식을 한 엄마와 아빠는 말단공무원에 취직한 아빠의 근무지를 따라 금호동 언덕 꼭대기집에 방한칸에 월세로 시작하였다고 한다.
수도는 마을 전체에서 언덕중간쯤 하나가 있어서 물동이로 길러서 날라 먹었고 연탄도 한꺼번에 살 돈이 없어서 매일 연탄을 1-2장씩 사서 그날그날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아빠의 월급은 쌀 한 가마니 값이어서 우리 4 식구가 먹고살 수가 없어서 엄마아빠가 상의한 결과 방직공장 앞에 있는 세모모양의 방과 작은 가게가 달린 곳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곳의 방은 거의 세모형태여서 우리 가족은 키대로 잠을 잤다. 가장 긴 곳은 아빠, 엄마, 나, 가장 짧은 곳은 동생.....
이곳에 엄마가 잡화점을 열었는데 우산, 액세서리, 거울 등 생활에 필요한 작은 물건 등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진열대와 필요한 물건 등을 아빠가 망치와 톱으로 만들어서 굉장히 허술하였다.
가게의 이름은 내 이름인 미숙의 미와 동생이름인 영석의 영을 합해서 "미영상회"였다.
간판도 아빠가 만들었는 네모난 철판에 페인트로 미영상회를 써서 가게 위에 걸었다.
하루는 동생과 내가 가게에서 장난을 치다가 내가 진열대 옆에 튀어나온 왕못에 무릎이 걸려서 굉장히 크게 다친 적이 있다.
무릎의 상처가 아물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고 다 나은 후에도 무릎에 꽤 큰 상처가 남았다.
지금은 상처가 많이 옅어졌지만 상처를 보면 그때 삼각형 방이 생각난다.
미영상회 앞에는 차가 다니는 도로인데 그 당시에 미군을 태운 트럭이 자주 다녔다. 동생과 나와 동네친구들은 지나가는 미군트럭을 향해 '헬로 - 헬로 -' 하고 외치면 미군들이 우리들에게 쵸코렛을 주곤 하였다.
정말로 달콤하고 맛있었다.
우리는 미군만 보면 '헬로우 - '를 외쳤다.
그 당시에는 핼로우의 뜻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몇 년 전에 캄보디아를 여행할 때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이었던 캄보디아 어린이들이 우리를 보면 '천 원만 - , 천 원만 - ' 하면서 따라오던 모습을 보았다. 내가 미군을 보고 '헬로우-'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당시 어려웠던 시절 -
길에서 미군이 던져주던 초콜릿을 먹었던 가난했던 소년, 소녀는 열심히 살아서 사업가가 되었고 교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