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를 위한 당신의 위로
아이들을 다 재우고 어느 정도 정리를 하고 이른바 육퇴(육아 퇴근)을 하고나면 11시. 인기있는 드라마도 다 끝난 시간이라 사실 제대로 보는 프로그램은 뉴스 뿐이다. 궁금한 프로그램들은 인터넷 기사들로 요약된 것들을 읽어보고는 한다. 요즘 궁금했던 프로그램은 세상을 떠난 스타들을 AI기술로 가상인간으로 되살려서 무대를 꾸미는 포맷을 가진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이미 다큐프로그램에서 죽은 가족을 만나 듣고 싶던 목소리를 듣고, 못다한 말을 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사실 너무 울고싶지는 않아서 자녀를 만나는 회차는 일부러 시청을 포기했었다.)
지극히 아날로그 타입인 나에게 AI는 사실 장난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었다. 조금 고급지게 입체적인 3D 만화랄까. 그래서 굳이 그런 인간을 자꾸 만들어내는 세상의 풍조에 반감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봐도 진짜 사람과 다른데 모델로 기용했다는 기사를 보고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그러나 그런 프로그램을 보며 고인을 그리워하는 가족에게, 또 팬들에게 이렇게 움직임을 담은 목소리를 전할 수 있다면, 그래서 아픈 마음에 위로를 전할 수 있다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다.
얼마 전 음악을 들으며 거리를 걷다가 고 김광석의 노래가 나오는 것을 들으며 가수들은 이렇게 목소리가 남는구나 생각을 했다. 그러다 문득 아빠의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 슬퍼졌었다. 동굴같은 저음의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버스 운전을 하시던 아빠에게 당신 딸 또래의 학생들이 목소리 칭찬을 하면 집에 와서 그렇게 자랑을 했었다. 그럼에도 내게 유독 기억나는 목소리는 나의 큰 아이에게 울지말라고 했던 말 뿐이다. 생각해보니 노래방에서 애창곡이라고 부르던 팝송 "Love me tender~"도 있었다. 목소리는 좋지만 박자감이 떨어졌던 아빠의 노래는 그 노래의 느끼함을 상쇄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고인을 되살려 내어 만나는 기사를 읽은 것이 꽤나 영향력있게 다가왔던지, 지난 주말 꿈에 아빠가 나왔다. 길에서 친구들과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앞에 있던 가게에서 아빠가 가상인간 같은 모습으로 어색하게 걸어 나왔다. 분명 우리 아빠는 이 세상에 없는데, 이럴 리가 없는데 하면서도 당장 따라가 아빠를 외쳤다. 버스에 타려는 아빠를 붙잡고 "미안해! 미안해! 사랑해!" 크게 외치며 바닥에 엎드려서 펑펑 울었다. 나의 미안하다는 말에 아빠는 놀라며 "왜? 왜?" 하더니 머리에 입을 맞추고 그대로 떠났다. 그렇게 시작된 서러운 울음은 잠에서 깨어나서도 그치질 않아서 한참을 꺽꺽대며 울었다. 울음이 그치고도 가슴이 막힌 듯 아파서 새벽 내내 멍하니 울다 그치다 하며 누워있었다.
나는 무엇이 그렇게 미안했을까. 사실 안다. 아빠는 내가 스물일곱 살 때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거의 10년을 누워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아빠의 병시중으로 엄마도 남동생도 모두 고생하는 동안, 나는 직장에 다녔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둘 낳았다. 처음 몇 년은 주말마다 아빠에게 가서 있었으나, 결혼을 하면서부터는 그 횟수가 급격히 줄었다. 아이를 낳으면서 못 갔을 것은 불 보듯 뻔하고. 그래도 아이를 보여주고 싶어서 병실에 큰 아이를 데려가면 아이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무서워서 나가자고 울었고, 아빠는 부정확한 발음으로 힘겹게 "우지마, 우지마."라고 했다. 둘째 아이를 낳은 지 4주 차 되던 날에 결국 눈을 감으셔서 아빠는 나의 둘째 아이를 본 적이 없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을 절감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쳐가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고, 이렇게 누워있는 것이 아빠에게 행복일 수 있을까 싶었다. 어려운 경제 상황에도 세계일주를 꿈꾸던 아빠가 이렇게 10년 가까이 누워있는 것이 아빠는 어떨까? 내가 아빠를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일까? 그런 고민들이 이어지면서 사실 마지막에는 아빠를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못했다. 그냥 어떤 것도 기도하지 못했다. 연명치료를 포기하기로 가족이 결정할 때도 마음은 슬프지만 고민 없이 동의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엄마가, 내가, 동생이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동안 아빠는 기지개를 켜듯이 몸을 쭉 펴면서 숨을 멈췄다. 장례를 치르고 며칠 후, 이모에게 연락이 왔었다.
"괜찮니? 아빠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 갖지 말아. 아빠는 너의 존재만으로도 많이 기뻐하셨어."
아빠가 사고를 당한 후 10년, 그리고 아빠가 돌아가시던 해에 태어난 둘째 아이가 곧 초등학교에 간다. 꽤 긴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나는 '아빠'라는 존재가 없는 삶에 익숙해져 왔다. 가끔 ‘아, 이럴 때 아빠가 있었으면 이랬을 텐데!’라고 생각도 하지만, 남편이 있어서 그 서러움이 길게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 안의 어린아이는 아빠가 그리웠나 보다. 열이 나는 것 같다고 하면 꼭 입술을 이마에 대서 열을 재주던 그 아빠가 보고 싶었나 보다. 종종 아빠가 생각날 때면 이모가 해준 그 말이 맴돈다.
아빠의 "우지마, 우지마."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