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밀산 결사대

by 정섭

제9화 밀산 결사대


##1921년 상해

해가 떨어져 어두운 상해. 남루한 옷을 입은 낯선 남자 하나가 임시정부 청사로 가고 있었다. 남자는 눈에 띄게 지쳐 보였고, 옷은 먼지와 흙으로 뒤덮여 있었다. 한쪽 소매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선명했고, 왼쪽 눈 주변으로는 푸르스름한 멍이 들어 있었다. 그는 주변을 경계하듯 살피며 임시정부 청사의 문을 두드렸다. 문은 열려 있었다.

김의한, 정정화, 엄항섭, 그리고 정섭은 경성에서의 작전에 대해 동농을 비롯한 임시정부 간부들에게 보고를 마치고 청사를 나오는 길이었다.

"누구요?“

김의한이 청사로 막 들어오는 남자를 붙들어 세웠다.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동농 선생에게 안내해 주시오. 혹 임시정부 관계자 이시오?"

"그렇소. 나는 김의한이라고 하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소?"

김의한이라는 이름을 듣자 남자는 안심하는 표정이 되면서 말했다.

"북로군정서 김좌진 장군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그러더니 품에서 밀서를 꺼내 김의한에게 보였다. 김의한이 밀서의 겉봉을 보니 '북로군정서 김좌진'이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일행은 다시 발길을 돌려 임시정부 청사 2층으로 뛰다시피 올라갔다.

보고를 받은 동농이 회의실로 왔다. 김좌진이라면 동농과 일가였다. 작년 청산리에서의 대첩으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김좌진이 동농에게 밀서를 보낸 것이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교통국을 통해 연통을 했을 일을 밀서를 든 남자가 왔다는 소리에 동농도 적이 긴장한 상태였다. 동농에게 인사를 한 남자가 말했다.

"저는 오상렬이라고 합니다. 김좌진 장군님의 밀서를 전해 드리려 왔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기에 이 먼 길을 직접 찾아온 것이오?“

동농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상렬은 밀서를 꺼내 동농에게 전달했다.

"김좌진 장군께서 동농 선생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가능하면 북로군정서로 와 주셨으면 합니다."

동농이 겉봉을 찢고 안에서 밀서를 꺼냈다. 밀서를 읽고 난 동농이 심각한 표정으로 오상렬에게

"그래 김좌진 장군은 무사하신가?“

하고 물었다. 오상렬이

"다행히 장군께서는 무사하십니다. 장군께서 밀산으로 이동하시면서 제게 이 밀서를 선생님께 전달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고 말했다. 무거운 얼굴이었다.

북로군정서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일행은 긴장하는 얼굴이 되었다. 정정화가 동농에게 밀서의 내용이 무엇인지 물었다. 동농이 깊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작년 청산리 대첩이 있기 전에 길림성 훈춘의 일본영사관이 습견당한 사건이 있었던 건 다들 기억할 거다. 이 사건을 트집 잡아 왜놈들이 관동군을 만주로 파병됐고 급기야 간도 일대를 본격적으로 침공하는 빌미가 된, 바로 그 사건."

잠시 숨을 고른 동농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훈춘 영사관 습격 사건이 사실은 왜놈 장교 야스카와가 중국 마적단 장지앙하오를 부추겨서 만든 자작극이라는 게야."

이 소리에 모두들 '이런', '이런 나쁜 놈들' 하는 소리를 뱉어냈다. 김의한이 울분을 토하듯 말했다.

"작년 여름에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화계획'을 발표하고, 2만 명에 달하는 관동군 정규군을 투입한 것도 훈춘 일본영사관 습격 사건을 핑계로 한 조치 아니었습니까?"

동농도 울분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청산리 전투에서 왜놈 군대가 대패하자 그 보복으로 바로 그 관동군 정규군이 간도 일대 한인 거주지를 초토화하지 않았니. 이게 다 왜놈의 자작극에서 시작된 것이라니 참으로 분하고 분하구나."

김의한이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당시 희생자가 당시 약 3,700명이라고들 했습니다. 집터, 학교, 교회 같은 건물도 대부분 파괴되고 남은 것이 없을 지경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피를 토하는 김의한의 목소리에 모두들 숙연한 마음으로 동농을 바라보았다. 동농은 손에 든 밀서를 김의한에게 넘겨주면서 읽어보라는 눈짓을 했다. 김의한이 밀서를 읽고 다시 한번 부르르 떤 후 모두에게 말했다.

"이건 간도 참사의 참상과 이후 독립군 부대의 계획을 적은 밀서입니다. 왜놈 군대가 이달 초에 간도에서 철수했는데,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 부대가 거의 괴멸적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말을 멈춘 후

"이제 김좌진 장군을 비롯한 생존자들은 모두 만주 밀산에 집결하는 것으로 방침을 정하고, 출발에 앞서 이 밀서를 동농 선생에게 전해 밀산으로 와 주실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을 맺었다. 동농이 오상렬을 향해 말했다.

"그래, 지금 만주의 상황은 어떻소."

오상렬이 무겁게 말을 뗐다.

"관동군은 마을마다 불태우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북로군정서와 여러 독립군 단체들도 흩어져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오상렬이 잠시 말을 중단한 후 참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김좌진 장군께서는 독립군 부대들이 만주 밀산으로 집결하고 나면 그곳에서 새롭게 세력을 규합할 계획입니다."

김의한이 물었다.

"남은 병력이 얼마나 됩니까?"

오상렬이 자신 없는 말투로 답했다.

"김좌진 장군께서는 모든 독립군 부대가 밀산에 집결하면 3,500명가량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동농이 자신이 북로군정서에 합류하는 문제에 대해 말을 꺼냈다.

"내가 북로군정서에 합류하는 문제는 대동단, 그리고 임시정부와의 협의가 필요한 사안이야."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국무총리 예관 신규식이 동농의 북로군정서 합류를 찬성하고 나섰다.

"선생님께서는 북로군정서와 교류도 있으셨고 무엇보다 평소에 만주에 가시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김좌진 장군이 선생님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정정화가 말리는 취지의 말을 했다.

"저 역시 아버님의 의지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만주행을 찬성하지만, 건강이 허락할지 그것이 염려됩니다."

잠자코 있던 김의한이 말했다.

"아버님께서 만주까지 가시는 일은 현재로서는 무리입니다. 배를 타는 것도 그렇지만, 왜놈의 눈을 피해 밀산까지 가시는 여정은 젊은이들에게도 쉽지 않은 여정입니다."

그런 연후에 김의한은 자신의 뜻을 밝혔다.

"대신 제가 아버님의 뜻을 충분히 반영해 만주에 가는 방도를 논의해 주십시오."

모두들 동농을 쳐다보는데 잠시 생각에 잠겼던 동농이 그 말을 받아 말했다.

"그 문제는 오상렬 동지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좋겠소. 나 대신 다른 사람이 가도 괜찮은 것인지 말이오.“

이는 김의한의 의견에 어느 정도 수락하는 뜻을 담은 것이기도 했다. 오상렬이 잠깐 생각하더니,

"장군께서도 동농 선생의 건강이 걸림돌이 될지 모른다는 말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동농 선생의 뜻을 잘 아는 다른 젊은 동지가 가는 것도 장군의 생각을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선생님의 아드님이신 김의한 동지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동농은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듯했다. 김의한이 다시 의견을 냈다.

"아버님, 임시정부의 어른들과 좀 더 상의하신 후에 결정하셔도 될 듯합니다. 우선 오상렬 동지가 좀 쉴 시간을 주고, 만주 지역의 사정을 충분히 듣는 것부터 하셔도 될 것입니다."

동농이 그러자고 말한 뒤 회합은 파했다. 김의한과 정정화, 정섭, 그리고 오상렬은 정섭이 기거하는 심훈의 집으로 향했다. 심훈의 집에서 이들 젊은이들이 다시 모여 밀산 가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정정화가 오상렬에게 물었다.

"오상렬 동지, 김의한 동지가 가는 문제는 동농 선생님께서 결정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만주에서 상해까지 그 먼 길을 어떻게 오셨습니까?"

"정말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왜경과 중국 군벌의 검문, 마적들을 피해서 한편 걷고 한편 철도를 이용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왔습니다. 출발한 날로부터 치자면 보름이 걸린 길입니다."

"그렇다면 상해에서 밀산으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길이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아마 가기 전에 상당한 준비와 각오를 해야 할 것입니다. 내부에 밀정이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 그 역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심훈이 모두에 대고 한 마디를 거들었다.

"지금 오상렬 선생의 상태가 이런 이야기를 오래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우선 오상렬 선생이 좀 쉬시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정섭 동지가 쓰던 방을 오상렬 선생께서 쓰시고 정섭 동지는 저와 함께 자면 어떨지 합니다."

정섭이 그러마고 말하자, 뒤 이어 정정화가 오상렬에게 말했다.

"오상렬 동지, 씻고 심훈 동지의 옷으로 갈아입으십시오. 옷은 빨아서 내일 내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오상렬이 사양하는 말을 하고 김의한은 그리하라고 권하고 하다가 결국 오상렬이 그리 하기로 했다. 오상렬이 씻고 심훈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김의한이 오상렬을 붙들고 만주의 사정을 듣기로 작정을 하는 모양을 보이자 심훈이 그 말을 끊고,

"이제 김의한 동지와 정정화 동지도 댁으로 가셔서 쉬시고 내일 만나 앞으로 할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김의한과 정정화의 등을 떠다밀다시피 했다. 김의한과 정정화가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내일 아침 일찍 오기로 작정을 했다. 두 사람이 가고 오상렬이 정섭의 방으로 들어가자 심훈이 정섭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정섭 동지, 이번 밀산행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행차가 될 것 같은데 정섭 동지가 또 김의한 동지를 따라나설 작정이 아닌지 내 걱정이오."

그러자 정섭이 정색을 하면서 딱 매듭을 짓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김의한 동지가 간다면 나 역시 갈 생각이오."

심훈이 그 말을 듣고 걱정이 많은 얼굴이 되었다. 그저 공부만 하던 책상물림 학생이 상해에서 만주까지 가는 길을 감당할 수 있을지 앞이 보이지 않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정섭의 굳은 마음을 잘 아는 심훈으로서는 더 말리는 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김의한과 정정화가 오상렬의 옷을 가지고 심훈의 집으로 왔다. 아침으로 먹을 만두를 식탁에 놓으면서 정정화가 오상렬에게 말했다.

"변변치 않지만 요기하기는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입니다. 만두 정도면 진수성찬입니다. 같이 드시지요."

하고 같이 먹자고 권해 다섯 사람은 만두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였다. 식사가 끝난 후 오상렬이 김의한에게 말했다.

"김의한 동지. 각오는 하셨겠지만 만주에서 상해로 오는 길은 상상조차 힘든 길이었습니다. 왜경에게 쫓기기도 하고 이틀 밤낮 동안 산길을 걷기도 하는, 참 쉽지 않은 길입니다."

하고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제 생각에 동농 선생께서 만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김의한 동지조차 쉽지 않은 길일지도 몰라요. 혹 임시정부의 어른들이 동농 선생을 보내는 것으로 결정하더라도 이는 말려야 할 일입니다."

김의한이 동조했다.

"그렇습니다. 반드시 제가 가는 방향으로 결정이 나야 합니다."

그러자 정정화가 나섰다.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오상렬의 눈이 동그래졌다.

"부인께서 가실 길은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도주로를 뚫어야 하고 산길을 헤맬 수도 있습니다. 부인의 몸으로 가실 길이 아닙니다.“

하고 김의한을 쳐다봤다. 김의한은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정정화의 뜻을 굽히는 일은 임시정부 내의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인 자신조차 말이다. 심훈이 오상렬을 지지하고 나섰다.

"맞아요. 정정화 동지. 누구보다 그 마음 이해하지만 이 길은 경성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과는 또 다른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너무 험악한 길입니다. 자칫 다른 분들에게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정정화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심훈 선생까지 이렇게 나오다니 실망입니다. 심훈 선생의 말은 독립전쟁을 하는 길에 남자와 여자가 따로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남자와 여자가 따로 있다는 말에 심훈이 대꾸할 말을 잃어버렸다. 정섭이 끼어들었다.

"정정화 동지는 예관 선생께서 도시 담이라는 별명까지 주신 동지입니다. 경성 침투 작전도 성공적으로 수행하셨습니다. 작전 수행 능력은 검증된 것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만 남녀 간의 육체적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여기까지 말한 후 정섭은 잠시 뜸을 들인 후 본론을 말했다.

"혹 제가 정정화 동지를 도와서 함께 가면 조금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정정화에게 버럭 야단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소 소심한 목소리로 꺼낸 말에 심훈이 ‘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 됐는데, 오상렬이 반색을 했다.

"그건 좋은 생각이라 생각합니다. 부인의 뜻이 저리 강경하니 만약 김의한 동지가 가는 것으로 결정이 된다면 정정화 동지와 박정섭 동지가 동행하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순식간에 정섭이 함께 가는 것으로 논의가 모아지자 김의한도 더는 말리지 못하게 됐다. 심훈은 정섭이 기어이 밀산행에 합류하는 것이 내심 걱정인 표정이었다.

오전에 임시정부 청사에서 동농을 다시 만난 것은 오전 10시경이었다. 예관과 우당, 엄항섭, 그리고 임시정부의 부장 박영만이 동석했다. 심훈도 함께였다.

동농이 모두를 향해 운을 뗐다.

"국무총리이신 예관 선생 주재로 임시정부의 어른들과 상의한 결과를 말하겠다."

모두들 동농의 얼굴에 집중했다.

"김좌진 장군의 요청에 대해, 임시정부는 김가진 대신 김의한 동지를 파견한다. 부장 박영만 동지가 동행한다. 밀산까지 가는 길 안내는 오상렬 동지가 맡는다. 상황의 엄중함을 고려해 준비되는 대로 가장 이른 시간에 출발한다. 이상."

김의한, 정섭, 그리고 심훈이 동시에 정정화를 쳐다봤다. 정정화는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워낙 동농의 발표가 단호했기 때문이었다.

낌새를 챘는지 잠시 침묵하던 동농이 정정화를 보더니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정화는 내 방으로 잠깐 오너라."

이렇게 회합이 흩어진 후 정정화는 동농의 방으로 갔고 김의한, 박영만, 오상렬은 밀산으로 가기 위한 작전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소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정섭과 심훈은 정정화를 기다리기 위해 자리를 지켰다.


##1921년, 사흘 후, 밀산 가는 길(1)

밤바다는 칠흑 같았다. 다롄 항구 외곽 해변에 작은 어선 하나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어선의 불빛은 모두 꺼져 있었다. 김의한, 박영만, 오상렬, 세 사람은 차갑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윗돌 위에 선 채 배가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뱃머리가 바윗돌 옆으로 다가오자 오상렬이 허리까지 들어오는 물속으로 들어가 배를 끌어당겼다. 배에서 노인 하나가 나와 오상렬을 확인한 후 손으로 끌어올렸다. 오상렬이 배에 올라타자 두 사람도 물에 뛰어들어 배에 올라탔다.

"됐습니다. 출발합시다."

선장은 나이 든 노인으로, 일행이 배에 올라 타자 곧바로 뱃머리를 돌려 외항으로 향했다. 어선은 낮게 윙윙 소리를 내며 다롄의 불빛을 뒤로하고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파도가 뱃머리를 칠 때마다 배는 심하게 흔들렸고, 차가운 바닷물이 얼굴을 적셨다.

밀산으로 가는 길의 일차적인 목적지는 중국 봉천이었다. 일단 봉천까지 무사히 간 후, 상황을 보고 다음 행보를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다롄항에서 예정에 없던 조각배에 몸을 실으면서 이들의 여정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히고 있었다.


##1980년 5월 초, 서울

김태훈은 다음날 학생회관을 찾아갔다. 사회과학대학 학생회를 찾아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몇몇 학생들이 토론을 하기도 하고 집회에 사용할 것으로 보이는 현수막에 글씨를 쓰기고 하고 유인물을 만드느라 가리방을 긁는 모습들이 보였다. 토론을 하고 있던 이성주가 김태훈을 보고 손을 들었다.

"선배님, 여기예요. 잘 오셨어요."

학생들이 자리를 비켜준다. 김태훈은 어색한 모습으로 이성주의 옆자리에 앉았다. 한쪽에 북이며 장구들이 쌓여있고, 스프레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엉망이죠?"

"아니요, 좋은데요."

"좋다고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오늘 집회가 몇 시라고 했죠?"

"오늘 오후 두 시입니다. 모두 준비하느라 정신들이 없어요. 이제 거의 끝났어요."

학생 한 명이 다가와 이성주에게 말한다. "준비 끝났어요, 선배. 이제 나가야 할 시간이에요."

이성주가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선배도 같이 가시죠. 대오에서 떨어져서 구경만 하시는 게 좋겠어요."

장소는 도서관 앞 광장이었다. 광장에는 학생들 오십여 명이 서 있었다. 아까 사회과학대학 학생회 사무실에서 스프레이로 쓴 현수막을 든 학생 둘이 맨 앞이었다. 현수막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군사독재 반대하고 병영집체훈련 거부한다.'

도서관 안에서 밖으로 난 3층 열람실 창문에 이성주가 나타났다. 이성주는 유인물을 창밖으로 뿌렸다. 유인물이 하늘 위에서 펄렁펄렁 나부꼈다. 이성주가 소리를 질렀다.

"독재정권 반대하고 병영집체훈련 거부한다!"

광장에 모여있던 학생들이 따라 외쳤다.

"독재정권 반대하고 병영집체 훈련 거부한다!"

그때 흰 헬멧을 쓰고 청바지를 입은 사복경찰 열 명 정도가 도서관으로 튀어 들어갔다. 이성주는 더욱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군사독재 반대하고 병영집체훈련 거부한다."

이성주가 도서관 3층 열람실 안으로 바리케이드를 쳤는지 ‘우당탕탕’ 소리만 났을 뿐 이성주는 계속 소리를 질렀다.

"병영집체훈련 거부하고 군사독재 끝장내자!"

그때 도서관 3층 열람실 문이 깨졌는지 우지끈 소리와 함께 흰 헬멧들이 3층 창문에 나타나 이성주를 끌어냈다. 광장에 모여있던 학생들이 저마다 소리를 질렀다.

끌려 나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이성주의 목소리만 들렸다.

"군사독재 반대...."

동시에 사과탄을 쏘는 전투경찰의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탕, 타당, 탕. 탕, 탕, 탕’

광장에 모여있던 학생들 발밑에 사과탄이 터지면서 학생들이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이리저리 흩어졌다. 잠시 후 이성주가 흰 헬멧들에게 붙잡혀 허리띠와 목을 잡힌 채 질질 끌려 나왔다. 손으로 틀어막은 입 사이로 이성주는 끊임없이 뭔가를 외쳤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김태훈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

수현은 창가에 앉아 아카시아 향기가 코끝을 찌르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어제 안전기획부의 안가에서 만난 박진호와 이종학 박사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박진호는 수현과 정정화에게 북의 김의한을 만나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했고 정정화는 수현에게 만나보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를 밝혔었다.

정섭이 회중시계를 가지고 과거로 갔지만 임시정부의 인장은 현대에 남아 있다. 도대체 정섭은 두 물건이 이렇게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현대로 돌아올 수 있을까? 김의한을 중심으로 남과 북 그리고 일본이 전개하고 있는 과거사 관련 기록에 대한 행방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생각은 정돈되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됐다. 그러던 중 전화벨이 울렸다. 박진호였다. 간단한 인사가 오고 간 후 박진호가 물었다.

"김의한 선생을 방문하는 일에 대해 고민해 보셨습니까?"

수현은 결심한 듯 말했다.

"네, 갈게요."

그러나 북한으로 가는 길은 쉽게 열리는 길이 아니었다. 북측 당국으로부터 비자를 받고, 손녀를 만나는 것에 대해 당사자인 김의한의 허락도 받는 등 사전 작업이 모두 순조로워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지나 박진호로부터 정정화와 함께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정정화의 집. 세 사람이 찻잔을 앞에 두고 앉았다.

"북한 당국으로부터 비자를 받았습니다. 다만 가는 비행 편은 중국 선양을 거쳐서 가야 합니다. 최종 목적지는 평양입니다."

선양이라는 말에 정정화가

“봉천…”

하고 가볍게 힌숨을 쉬었다.

수현이

“할머니, 선양의 옛이름이 봉천이야?”

하고 묻자, 정정화가

“그래 선양, 한자말 그대로 읽으면 심양을 옛날에는 봉천이라고 불렀지…”

하며 아스라한 표정이 되었다. 뒤 이어 정정화가 김의한의 안부를 물었다. 박진호가 망설이다 말했다.

"건강이 좀 좋지 않으시다고 합니다."

정정화는 김의한이 아직 살아 있다는 말에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수현이 정정화의 손을 꼭 잡았다. 수현이 박진호에게 물었다.

"언제 출발하나요."

"3일 후 김포공항에서 중국 선양으로 가는 대한항공을 탑니다. 선양에서 하룻밤을 자고 고려항공편으로 평양 순안공항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

"제가 준비해야 할 것이 뭐가 있을까요?"

박진호는 정정화를 쳐다봤다.

"정정화 선생께서 해주실 일이 있습니다. 김의한 선생께 편지를 하나 써 주십시오."

정정화가 박진호를 보자, 박진호가 말을 이었다.

"다른 건 아니고 남과 북, 일본 삼국이 찾고 있는 과거사 자료의 행방을 수현 양에게 알려 달라는 내용을 적어주시면 됩니다."

정정화가 ‘그러겠노라’고 말하고 피곤하다며 박진호를 먼저 보냈다. 수현은 정정화의 이부자리를 봐주고 정정화의 이마를 한번 짚은 후 밖으로 나왔다.

사흘 후, 수현과 박진호는 선양행 비행기에 올랐다. 정정화의 편지는 수현의 품 안에 있었다. 박진호는 편지를 가져왔는지 수현에게 확인했고, 수현은 전날 할머니에게서 받아왔노라고 말했다.

선양행 비행가 먹구름을 뚫고 김포공항 활주로를 박차고 이륙했다.


(제10화에 계속)


#sf소설 #판타지 #회중시계 #독립운동 #시간여행 #타임슬립 #독립전쟁 #의열단 #상해 #임시정부

이전 08화제8화 조선 탈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