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조선 탈출
그날 밤 평양에 도착한 김익상은 그의 말대로 친구의 집에 들어가 하룻밤을 쉬고 이튿날 아침 다시 그곳을 떠나 신의주로 향했다. 그는 압록강에서 철교를 건너 마침내 국경을 넘었다. 이틀 뒤 봉천과 천진 두 곳에 있는 비상선을 차례로 돌파한 그는 북경 정양문 밖 김원봉 등 의열단 동지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1921년 4월 중순, 경성
남대문정거장에서 김익상과 헤어지고 저녁 5시경에 정섭이 마지막으로 관사에 도착하면서 정섭과 김의한, 정정화, 엄항섭 네 사람의 안전은 최종 확인이 되었다. 정섭이 관사에 들어서자 모두들 반색하며 무사 귀환한 정섭을 환영했다. 이들의 거사 성공 소식을 들은 박양무도 응접실로 나와 같이 기뻐했다. 박양무가 네 사람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다.
“정말 장하세요들. 정말 감사합니다.”
김의한이 손사래를 쳤다.
“감사는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를 돕는 분들에게 오히려 더 감사합니다.”
모두들 맞다고 맞장구를 쳤다. 박양무는 눈가에 눈물이 번지면서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저녁에 신필호가 귀가한 다음 이들은 모두 응접실에 모였다. 신필호도 입에 침이 마르게 이들의 거사 성공을 축하했다. 같은 대한 사람으로서 너무 자랑스럽고 장하다고 말하는 신필호의 얼굴에도 눈물이 번졌다.
“작은 아버님이 하시는 일에 비하면 백분의 일도 못 미치지만, 그래도 작게나마 은공을 갚았다고 생각하니 저로서는 기쁘고, 또 그런 기회를 주신 여러분께 고맙기 한이 없습니다.”
김의한이 신필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예관 선생님께서 조카님을 정말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그렇게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시간이 지난 후 정섭이 말머리를 돌렸다.
“오늘 거사가 성공한 것은 천만다행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거사를 한다는 것이 사전에 일본 놈들에게 알려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엄항섭이 받아 말했다.
“맞네, 나도 그리 생각하네. 분명 뭔가 눈치를 채지 않고서는 그렇게 삽시에 경계가 강화될 리는 없지.”
“그렇다면 그 정보를 빼돌린 자가 누구인지 밝히는 일이 급한 일입니다.”
정정화였다. 김의한이 정정화를 보고 말했다.
“그러나 김익상 동지의 폭탄 투척 사건 이후 왜경들의 경계가 이전에 비할 바 없이 강화된 상황이라 일이 여의치가 않은 것도 현실이에요.”
정섭이 그 말에 동의하고 나섰다.
“맞아요. 정보를 빼돌린 범인을 밝히는 것은 고사하고 정정화 선생의 독립자금 모금 활동마저 지장이 생긴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정섭의 그 말끝에 김의한이 정정화를 바라봤다. 걱정되는 얼굴이었다. 설사 사정이 그렇다고 해도 쉽사리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김의한이었다.
잠깐 생각하던 정정화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건... 여러 동지들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정정화가 순순히 동의하는 말을 하자 김의한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 눈치를 보고 엄항섭이 말을 받았다.
“잘 생각하셨소. 네 동지가 함께 하는 사업이니 정화 동지도 마냥 생각대로만 해선...”
하는데 정정화가 엄항섭의 말허리를 끊고 말했다.
“독립자금 모금 사업이 쉬운 일이 아닌 데다 지금 왜경이 폭파범을 잡느라 경성 구석구석을 뒤지는 마당이라... 자칫 동지들의 신상에도 해가 될 수도 있다 생각해서 그런 것이니 두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박양무가 정정화의 단호한 표정과 발언에 감동한 얼굴이었다. 같은 여성이지만 참 당찬 여성이구나 생각하는 듯했다.
김의한이 상황을 정리했다. “배신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도 성과라면 성과요. 무엇보다 우리는 김익상 동지를 도와 조선총독부 폭파 의거를 성공시켰소. 다만 더 움직이는 것은 가장 중요한 동지들의 신변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판단하에 독립운동 자금 모금 사업은 중단하고 상해로 돌아가는 것으로 결정합시다.”
이 말을 하는 김의한이나 정섭, 엄항섭, 정정화 모두 어두운 표정이었다. 정정화가 모두를 바라보며 짧게 대답했다.
“그렇게 합시다.”
이때 신필호가 끼어들었다.
“혹시 김의한 군은 댁의 어머니를 한번 보고 가야 하지 않겠소?”
김의한과 정정화가 신필호를 바라봤다. 엄항섭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김의한의 어머니, 동시에 정정화의 시어머니이고, 동농의 아내인 분이다. 왜 보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정정화가 독립자금 모금 활동을 중단하기로 한 마당에 사사로이 어머니를 보자고 할 순 없었다.
김의한이 정정화를 한번 본 후 말했다.
“아마 어머니 댁에도 왜경의 감시가 심할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일을 망칠 수 있습니다. 다음을 기약하겠습니다.”
정정화는 침묵했다. 그렇게 당장 출발할 것처럼 하는 분위기를 깨고 신필호가 말을 더했다.
“하루만 더 있다 가시오. 내가 말하기 편하고 돈을 내놓을 만한 사람 몇 명에게라도 말해서 돈을 좀 모아 보겠소. 일본의 횡포에 강한 거부감을 갖는 외국인 의사도 몇 명 있고, 형사에게 끌려가 억울하게 형무소를 사는 아들이 있는 부잣집, 또...”
하는데 박양무가 말을 이었다.
“제 친정에도 말을 해 보겠습니다. 천한 직업이라고는 하지만 애국심도 있고 다행히 돈도 얼마간 있는 집안입니다.”
모두가 숙연한 마음으로 두 사람의 말을 들었다. 정섭의 가슴 한구석이 따듯해졌다. 여섯 사람은 밤이 늦도록 거사 이야기, 상해 이야기, 삼엄한 경계를 뚫고 남대문정거장을 환하게 웃으며 걸어 나가던 김익상 이야기를 하며 오랫동안 이야기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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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저녁. 정정화는 신필호와 박양무가 마련해 온 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전대에 넣었다. 비록 적은 금액이었지만 소중한 돈이었다. 신필호 부부의 고집으로 네 사람은 결국 하룻밤을 더 자기로 했다.
저녁 식사를 물리고 신필호는 작은아버지 예관 선생에 대한 추억을 꺼냈다. “충청북도 청주면에서 태어나셨소. 내 선친께 듣기를 어려서부터 기개와 재주가 뛰어났다고 했소. 그래서 그런가 구한국군의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셨고,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등 독립 단체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셨소.”
정정화가 말을 받았다.
“예관 선생께서는 대한협회 시절 아버님의 비서를 하셔서 두 분이 상해에서 지금도 퍽 가깝게 지내고 계십니다.”
김의한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맺는 관계 이전에 집안끼리 허물이 없는 분이시지요.”
정정화가 말을 잇는다. “예관 선생께서 저를 각별하게 어여삐 여기셔서 객지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이번에 경성에 올 때도 한걱정을 하시고 제발 몸을 보살피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정정화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완강하게 저를 막고 나서지 못하고 겁 없이 덤벼든 제 신변을 걱정하는 예관 선생의 심정을 생각하면 지금이 마음이 안 좋습니다.“
하더니 결국 눈물방울을 떨어뜨렸다.
다음 날 새별, 관사를 나오기 전에 김의한은 신필호의 양복으로, 정정화는 박양무의 양장으로 갈아입었다. 옷은 적당히 맞았다. 영락없는 인텔리 부부였다. 모두 그 모습을 보고 보기 좋다고 한마디씩을 했다. 박양무가 정섭과 엄항섭에게는 신필호의 일상복을 내놓았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최신 유행복이었다.
박양무는 정정화가 입은 옷의 깃을 만져준 후 살짝 끌어안고 ‘안녕히 잘 가세요.’하고 인사를 했다. 박양무와 정정화의 눈이 촉촉해졌다.
신필호는 김의한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예관 선생께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서로 간에 인사가 마무리되자 엄항섭이 김의한과 정섭을 보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두 부부가 동행하시고, 정섭 동지와 나는 따로 가는 것으로 합시다."
신필호가 마련해 둔 기차표를 각자 소지하고 김의한과 정정화가 먼저 관사를 빠져나갔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미리 정한 대로 김의한과 정정화는 숭례문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숭례문을 돌아 남대문정거장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다 약 10분 후 정섭과 엄항섭이 관사에서 나와 곧장 남대문정거장을 향해 걸었다.
새벽이었지만 거리 곳곳에 일본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 확실히 신필호 부부가 내놓은 옷차림은 큰 도움이 됐다. 김의한과 정정화, 그리고 정섭과 엄항섭 모두 무사히 남대문정거장 개찰구를 통과할 수 있었다. 개찰구 앞에서 일본 경찰은 정정화에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어제의 조선총독부 폭파에 연루된 사람들이라고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열차는 여명을 뚫고 남대문정거장을 떠났다. 정섭의 입에서 절로 ‘후’ 하는 소리가 나왔다. 긴장으로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엄항섭도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창밖으로 어둠 속의 조선 땅이 빠르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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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주에 도착한 것은 이튿날 오후였다. 네 사람은 다시 세창양복점을 찾았다. 이세창 씨는 여전히 이들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고생들 많았수다. 내래 김익상 씨가 거사에 성공한 소식 신문으로 봤수다. 어찌나 기분이 좋았던지, 마누라 하고 이불 만세 불렀수다. 정말 장하우들. 그리고 아주머니래 독립자금 모으느라 고생 많았수다."
엄항섭이 정정화 대신 대답했다.
"정정화 선생은 생각보다 성과가 크지 않아 잔뜩 실의에 빠져 있답니다."
그러자 이세창 씨는 예의 그 심한 평안도 사투리로 정정화에게 말했다.
“별 걸 다 개지구 걱정 하누만. 미운 놈 자빠뜨리니까니 떡 판에 코 박고 엎어지더란 말도 있지 않아? 다 제 뜻대로만 되믄 당초에 나라 망가뜨리지 않았갔어? 맘 놓라우요. 그만한 것도 대단한 거야요.”
이세창의 그 말은 비단 정정화만을 격려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네 사람 모두 이세창의 말에 깊은 위로를 받았다.
국내로 들어갈 때와는 달리 임무를 마친 끝이라 마음은 홀가분했다. 정정화를 친누이처럼 생각하는 이세창은 틈만 나면 정정화를 치켜세웠다. 한 번은 정정화를 두고 이런 사람 조선에 없다는 말을 꺼내자 이세창의 마음이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계면쩍기도 했던 정정화가 이세창에게 말했다.
“저는 특별히 위험이나 불안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너무 치켜세우지 마세요.”
정섭이 이 말에 토를 달았다.
“그건 정정화 선생이 겁이 없고 아직 젊은 혈기라 앞뒤를 꼼꼼하게 재거나 망설이는 기질이 아닌 탓입니다. 오죽하면 우당 선생께서 '도시 담'이라고 했겠습니까?”
모두 ‘맞다, 맞다’ 하고 동조했다.
그러자 정정화가 이세창을 바라보고 진지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은 적지 안에서 활동하는 이세창 선생 같은 분입니다.”
하고는 이세창을 향해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얼떨결에 인사를 받은 이세창이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그러자 이 말에는 일동 ‘맞다, 맞다’ 하고 더 큰 목소리로 동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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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서 신의주로 들어올 때와 달리 신의주에서 안동으로 빠져나가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김익상의 의거로 국경 경계가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압록강 철교를 건너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라는 것이 이세창의 판단이었다. 이세창의 제안으로 일행은 철교가 아닌 배로 강을 건너기로 했다.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는 약 삼십 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길이었다.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낮에는 감시를 피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음 날 밤이 되기를 기다려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 캄캄한 밤이 되자 일행은 이세창의 안내로 압록강 하류의 강변에 도착했다.
상황을 살피기 위해 강변에 먼저 나간 이세창이 돌아와 심각한 얼굴로 네 사람에게 말했다. “생각보다 강이 질척거립네다. 별 수 없이 신발을 벗고 맨발로 가야 할 것 같습네다.”
모두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신발을 벗어들고 진흙과 자갈이 섞여 넓게 펼쳐진 강변으로 들어갔다. 강물이 스민 진흙을 밟을 때마다 차가운 기운이 발로 올라왔다. 자갈은 더없는 아픔을 선사했다. 여기저기서 ‘아야, 아야’ 하는 신음소리가 났다. 그렇게 삼십 리를 걸어 올라가야 하는 길이었다.
사방은 깜깜하고 바닥은 푹푹 빠질 뿐 아니라 고르지도 않은 자갈길에서 일행은 이세창을 선두로 정정화, 김의한, 정섭, 엄항섭 순으로 바싹 꽁무니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벅차고 힘든 길이었다.
그렇게 세 시간쯤을 걸어 일행이 도착한 곳은 안동을 바라보는 압록강 이편의 북하동이었다. 북하동 인근에 도착하자 이세창이 일행에게 잠깐 기다라고 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어둠 속에 사라졌던 이세창이 돌아온 건 약 십여분 지난 후였다. 마음 졸이며 기다리고 있던 일행들 앞에 나타난 이세창이 김의한에게 말했다.
“미리 연락해 둔 배가 저 앞에 있소. 갑시다들.”
오 분쯤 걸어가자 어둠 저편에 쪽배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엉망진창이 된 발로 모두 쪽배에 올랐다. 이세창도 배에 올랐다. 사공이 물었다.
“세창 선생도 같이 가우?”
모두 이세창의 얼굴을 봤다.
“그럼. 내래 당연히 같이 가야디.”
이 말에 정정화가
“선생님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여기서부터는 저희들끼리 갈 수 있어...”
까지 말했을 때 이세창이 말머리를 끊고
“잠자코 있으라요. 강 건너 안동에 있는 우강 선생 집까지 데려다줘야 내 안심이 되오.”
라고 말하고, 사공을 향해 배를 띄우라고 말했다.
“자, 출발하라우요”
사공이 쪽배를 압록강에 띄웠다.
정섭은 쪽배가 나아가는 방향의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바라봤다. 어둠 속 어디에선가 일본 경찰들이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노려보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두려운 건 정정화도 마찬가지였다. 정정화는 차라리 두려움의 실체를 똑바로 바라보는 편이 낫겠다 생각했다. 밤의 강소리는 사람을 위협하는 듯했다. 차라리 짐승의 포효라면 방향이라도 알고 달아나기라도 하련만 한밤중의 강바람 소리는 달랐다. 전혀 으르렁거리지 않으면서도 사방에서 사람을 옥죄고 들었다.
방향을 알 수 없이 이곳저곳에서 불쑥불쑥 일어나는 물소리는 좌우편에서 속삭이듯 달려들어 양어깨를 짓누르다가도 어느새 뒷덜미를 파고들었다. 목청 높은 협박이 아니라 사람을 은근히 겁에 질리게 하는 고요한 위협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모두들 비슷한 두려움을 느낀 듯 아무 말이 없었다. 깜깜한 강 저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쪽배가 압록강의 중국 쪽 언저리에 닿았다. 다들 긴장감으로 기진맥진한 모습이었다.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은 이세창뿐이었다.
“자, 내리자우.”
하는 소리에 다들 일어나 쪽배에서 내렸다. 이세창 역시 일행과 같이 내렸다.
“우강 선생 댁까지 내가 안내하겠소.”
이세창의 고집을 아는 지라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긴 곳곳에 일본 경찰이 배치된 안동의 지리를 구석구석 꿰고 있는 그의 도움이 아니면 우강의 집에 가는 것도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우강의 집에 도착한 이후 이세창은 우강 내외와 짧게 인사한 후 그 길로 발길을 돌려 신의주로 돌아갔다.
우강 내외는 사전 예고도 없이 한밤중에 들이닥친 정정화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조선총독부의 거사를 신문을 봐서 알고 있던 터라마치 죽었다 살아온 사람마냥 반겼다.
이륭양행의 상해행 배편을 기다리는 동안 일행은 우강 내외의 집에서 이틀을 더 머물러야 했다.그 이틀 동안 두 내외는 번갈아가며 이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안동에서는 배만 타면 바로 상해로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정정화는 경성이나 신의주에 있을 때보다는 안심이 되었고, 긴장도 많이 풀려 있었다.
이윽고 이틀 후 우강의 도움으로 무사히 배를 탄 이들은 멀어져 가는 안동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다.이틀 후 새벽에 일행은 상해항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부터 부두에 진을 치고 있는 인력거꾼들의 “왕바차, 왕바차” 하는 호객 소리가드높았다. 여기저기 들리는 중국 사람들 특유의 거센 말소리들로 항구는 시끌시끌했다. 드디어 상해에 돌아온 것이다.
##1980년, 서울
다음 날, 김태훈은 도서관에서 졸업 논문 자료를 찾아본 후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졸업논문의 주제도 이제 명확해졌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단체의 활동과 이념'이었다. 수현의 할머니 정정화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은 그의 논문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학교 정문 쪽은 시위를 하는 학생들의 목소리로 떠들썩했다.
"어용교수 퇴진하라! 학원 민주화 쟁취하자!"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투쟁은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정문 앞은 거리로 진출하려는 학생들과 이를 막으려는 전경들이 대치하면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학생들은 구호를 외치며 스크럼을 짠 채 교문 앞에 모여 있었고, 전경들은 방패를 들고 대치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시위는 한층 격렬해지고 있었다. 태훈은 시위대와 전경의 대치를 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요란한 총소리가 태훈의 귀를 때렸다.
"탕, 타당, 탕, 탕, 탕"
사과탄을 쏘는 소리였다.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뒤로 돌아 뛰려는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태훈의 발밑에 사과탄 한 발이 터졌다. 비산하는 하얀 연기가 태훈의 온몸을 뒤덮었다. 태훈은 눈을 뜰 수 없는 고통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스크럼을 짜고 정문을 향하던 학생들이 흩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그때였다.
"으악!"
하는 소리와 함께 학생 한 명이 태훈 앞에 쓰러졌다. 손목에 빨간 띠를 묶은 것이 아마도 시위대의 가장 앞에 있었던 것 같았다. 태훈이 눈물범벅인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하얀 헬멧을 쓴 사복경찰들이 그 학생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김태훈은 망설임 없이 그 학생을 부축했다.
"일어나요! 빨리!“
옆에 함께 있던 학생 하나도 거들었다.
"고맙습니다..."
다행히 그 학생이 스스로 일어났다. 김태훈은 학생의 손을 잡고 죽기로 뛰었다. 정신없이 뛰는 김태훈의 눈과 코는 흘러내린 액체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겨우 헬멧을 쓴 사복경찰로부터 도망쳐 나온 곳은 학교를 벗어난 골목길이었다.
"여기 있으면 위험해요. 제가 아는 곳으로 가시죠."
김태훈은 학생을 데리고 주택가로 들어갔다. 수현의 할머니 집이 가까이에 있었다. 그곳이라면 안전할 것이다. 정정화의 집 앞에 도착한 태훈은 현관문을 두드렸다.
"누군가?“
정정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니, 저 태훈이에요. 문 좀 열어주세요."
문이 열리고 정정화가 놀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이런, 어서 들어와요."
두 사람이 대문 안으로 들어가자 정정화는 대문 밖을 좌우로 살핀 후 대문을 닫았다. 김태훈과 학생은 화장실로 튀어 들어가 구역질을 하기도 하고 눈을 씻어내기도 하면서 서서히 진정을 되찾았다.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응접실로 나온 학생이 정정화에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저... 감사합니다."
정정화가 학생과 김태훈에게 괜찮은지 물어보고 자리를 권했다. 학생은 김태훈에게도 고맙다고 인사를 한 후 자기소개를 했다.
"고맙습니다, 도와주셔서. 저는 사회학과 3학년 이성주라고 합니다."
정정화는 '반가워요' 하면서 목례를 했고 김태훈도 인사를 했다.
"김태훈입니다. 역사학과 4학년이에요."
손목에 아직도 묶여 있는 빨간 띠가 눈에 띄어 김태훈이 이성주에게 물었다.
"손목의 빨간 띠는 학생회 간부들이 묶은 걸 본 적이 있는데, 혹시 학생회 간붑니까?"
이성주가 계면쩍어하며
"아, 이거요. 맞습니다. 시위 상황에서 대열을 인도하려면 이런 표식이 필요해서요..."
태훈이 그럴 거라고 생각한 듯
"학생회 간부가 맞았군요.“
하자 이성주가
"네, 사회과학대학 학생회장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김태훈이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사회과학대학 학생회장... 우리 인문대도 시위에 열심히 참여하던데... 나는 졸업 논문 때문에 별로 참여를 못해요."
어색한 분위기가 잠시 흘렀다. 분위기가 어색해 지자 김태훈이 정정화로 주제를 옮겼다.
"참, 성주 씨, 여사님은 우리 학교 학생의 할머니이신데,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하셨던 독립운동가세요."
이성주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시군요. 안녕하세요. 저는 이성주입니다.“
하고 느닷없이 이름을 댔다.
정정화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
"아까 이름은 소개했잖아요. 반가워요 이성주 학생."
"와, 정말 영광입니다!“
이성주의 눈이 반짝였다.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에 대해 책에서만 읽었는데, 실제로 활동하신 분을 뵙게 되다니!"
김태훈이 마치 제 친할머니인 것처럼 자랑삼아 설명했다.
"선생님께서는 독립운동 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에 여섯 번이나 침투하신 여장부세요."
그러면서 그는 이성주의 손을 잡고 벽에 걸린 사진 앞으로 갔다.
"이건 임시정부 시절 찍은 여사님 사진이랍니다. 여기 있는 이가 여사님이시고, 그 옆에 남편이신 김의한, 그리고 이분은 김원봉, 이분은 김익상."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성주가 사진 앞으로 다가갔다.
"김원봉! 김익상! 그 의열단...! 와! 김익상은 조선총독부를 폭파했던 분이잖아요!"
이성주가 놀란 얼굴로 정정화를 쳐다봤다. 김태훈은 으스대는 표정이고 정정화는 웃는 얼굴이었다. 덕분에 분위기는 한결 좋아졌다. 잠시 후 이성주는 학교에 다시 들어가 봐야 한다며 일어섰다. 그리고는 김태훈 쪽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다음 주 월요일,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병영집체훈련 입소 저지 시위가 있는데, 시간 되시면 오세요, 선배님!"
질문은 이성주가 하는데 정작 김태훈은 정정화를 바라보았다. 정정화는 그저 미소 띤 채였다.
(제9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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