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마지막화) 귀환
## 귀환
총소리가 연신 요란하게 울렸다. 강물 속에 처박힌 정섭의 의식이 아득해졌다. 주머니 속의 회중시계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번졌다. 정섭의 허리가 꺾이면서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가나 하던 순간 번쩍이는 하얀빛이 물을 휘감고 돌아 정섭을 에워쌌다. 순간 정섭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김의한과 정정화가 요란한 총성 속에 물속에 처박힌 정섭을 찾아 강물을 휘저었다.
소비에트 적군 병사들이 강물로 뛰어들어 김의한과 정정화의 머리와 어깨를 개머리판으로 때려 쓰러뜨렸다. 김의한과 정정화가 강물에 쓰러지자 적군 병사들이 둘을 강둑으로 끌고 나왔다. 어깨를 맞은 정정화가 끌려가는 와중에 안타까운 눈으로 정섭이 빠진 강물을 살폈다. 끝내 정섭은 보이지 않았다. 정정화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정섭의 귀에 강물 소리가 다시 뚜렷해졌다.
‘아무르강.....’
하는 순간 정섭의 눈이 번쩍 뜨였다.
“김의한 동지... 정정화 동지...”
애타게 불렀지만 목소리는 목구멍으로 터져 나오지 않았다. 종적이 없었다, 김의한도 정정화도... 아니, 그뿐 아니었다. 적군의 추격 소리도, 대한의용군의 아우성치는 소리도, 빗발치는 총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섭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정섭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으나 낯선 곳이었다. 이마를 짚고 잠시 앉았던 정섭이 천천히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몸에서 강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 바람에 주위 사람들이 한 걸음 물렀다.
일어난 정섭이 주변을 살피니 영락없는 1980년 서울이었다. 사람들의 복장도 그렇고 주변의 풍경도 그랬다.
‘아니... 이게...’
그러고 보니 1921년으로 갈 때도 같은 상황이었다. 빛이 번쩍하더니 과거로 가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정섭이 가장 가까이에서 걱정스러운 듯 보고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지금이 1980년입니까?”
대답하는 대신 한 걸음 물러섰다. 사람들이 더러는 ‘이상한 사람 다 봤네’ 하는 표정이 되고 더러는 ‘가엽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중 한 사람이 ‘그렇다’ 하고 말했다.
정섭이 ‘고맙다’고 말하고 그제사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니 제3한강교 근처였다. 강변의 둔턱을 넘어 도로 쪽으로 걸어 나와 버스 정류장을 찾았다. 다행히 혜화동 가는 버스를 바로 탈 수 있었다. 물에 젖은 옷을 입은 정섭이 버스에 오르자 기사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저, 요금이..."
"됐어요, 그냥 타세요.“
"감사합니다."
승객들의 시선이 정섭에게 모였다. 혜화동 가는 길목은 살벌한 풍경이었다. 곳곳에 탱크와 특전사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보였다. 정섭이 '이게 무슨' 하며 어리둥절한 눈초리로 보고 있는데 버스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광주 지역의 상황이 심각한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계엄군과 시민들 간의 충돌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현재까지 알려진 사상자 명단입니다..."
뉴스를 듣던 정섭이 수현은 괜찮은지, 김의한과 정정화는 어떻게 됐는지 생각하다가, 문득 머리를 때리는 것이 있었다.
‘정정화... 정정화 동지는 수현의 할머니가 아닌가?!’
아무르강에서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헤어진 것이 불과 몇 분 전이었다. 정섭이 급히 주머니의 회중시계를 꺼냈다. 회중시계는 그저 멈춰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피를 토하며 꺽꺽거리던 박일리아의 얼굴, 허벅지에 총상을 입어 피를 흘리던 김의한의 비장한 얼굴이 떠올랐다. 정섭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섭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감싼 두 손 사이로 눈물이 흘러넘쳤다. 정섭의 입에서 ‘꺼이꺼이’ 소리가 나왔다. 승객들이 안타까운 눈으로 정섭을 보았다.
혜화동 정정화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섭이 ‘어떻게 할까’ 생각하며 문 앞을 서성이고 있는데 골목 어귀에 자동차 소리가 나더니 특전사 군복을 입은 군인 둘이 정섭 앞에 나타났다. 불과 한 시간 이전에 소비에트 적군에게 쫓기던 기억에 정섭의 온몸이 굳어졌다. 군인 둘은 정섭의 이름을 확인한 후 양팔을 잡아 지프차에 태웠다.
지프차는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 특전사 군부대가 주둔한 야전 지대였다. 여러 채의 막사 가운데 하나에 정섭을 들여놓은 후 군인 둘은 밖으로 나갔다. 꽤 오랜 시간 서성인 끝에 막사의 입구를 막았던 천이 걷혔다. 뜻밖에 수현과 정정화가 들어왔다.
수현이 정섭을 보고 뛰어와 안겼다.
”선배...“
”수현아...“
수현을 안은 정섭의 눈에 정정화가 빙긋이 웃는 모습이 보였다.
”정정화 동지...“
정섭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수현과 떨어져 정섭이 정정화를 행해 걸었다. 정정화도 정섭을 향해 걸어와 정섭의 손을 꼭 잡았다.
”박정섭 동지...“
정정화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두 사람이 떨어져 눈물을 닦았다. 정섭이 정정화에게 물었다.
”아무르강에서 무사했던 것입니까?“
”정섭 동지야말로 무사했던 게요?“
”한 시간 전에 아무르강에서...“
정섭에게 한 시간 전의 일이 정정화에게는 60년 전의 일이었다. 스무 살의 정정화가 팔십 세 노인이 되었으니 두 사람 모두 생각할수록 놀라운 일이었다. 정섭이 물었다.
”수현이와 처음 혜화동 집에 갔을 때 왜 아는 척을 안 했습니까?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정정화가 웃는 얼굴로
“그랬으면 나를 미친 사람 취급을 했겠지.”
정섭도 웃음이 번진 얼굴로 ‘하긴 그랬겠다’고 말하고 아무르강에서의 전투 이후에 일어난 일을 물었다.
“정섭 동지가 사라지고 난 후 우린 정섭 동지가 죽은 걸로만 생각했소. 성엄과 나는 소비에트 적군의 포로 아닌 포로가 됐소.”
그렇게 말하는 정정화의 표정이 슬펐다.
“상해파 고려공산당 동지들이 무기를 빼앗기고, 박일리아 동지가 죽은 것을 알고 칼란디리쉬발리에게 모두 투항했소.”
박일리아가 김의한을 들처매고 뛰던 모습을 생각하며 정섭이 몸을 떨었다. 죽은 박일리아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그날 얼마나 많은 동지들이 죽었습니까?”
“박일리아 동지가 죽은 것은 정섭 동지도 봤을 것이고... 그날 시신을 확인한 것만 60명이 넘었다고 들었소. 그보다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만 할 뿐 정확한 숫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소.”
정정화가 잠깐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날의 일을 우리는 자유시 참변이라고 부르오.”
정섭이 그 말을 반복했다. 눈물이 정섭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유시 참변... 정말 참변이군요. 내겐 불과 한 시간 전까지 살아있던 사람들이었는데...”
정정화도 울컥하는 심정을 다둑이고 말했다.
“우리는 포로가 된 상해파 동지들의 도움으로 풀려나 밀산으로 올 수 있었고, 김좌진 장군과 합류한 뒤 박영만 동지와 함께 상해로 돌아왔소. 오상렬 동지는 의열단과 합류하기 위해 만주지역으로 향했고...”
눈물을 닦은 정섭이 말했다.
“그렇게 됐군요. 천만다행이네요.”
정정화가 그런 정섭에게 동농의 소식을 전하며 슬픈 표정을 했다.
“우리가 자유시에서 고초를 겪던 사이에 아버님이... 아버님이 돌아가셨소.”
정섭이 놀란 얼굴을 했다. 정정화가 말을 계속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면서 동지들에게 여러 말씀과 물건을 남기셨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회중시계를 정섭 동지에게 전하라는 것이었소.”
“... 그래서...”
“그렇소. 그래서 수현이와 같이 온 정섭 동지를 첫눈에 알아보고 아버님이 맡기신 회중시계를 전한 거요.”
정정화가 정섭을 만나자마자 정섭에게 회중시계를 준 이유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정섭은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과 함께 동농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과거로 갈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자 참으로 인연이라는 것이 기적과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렇게 서로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아까 정섭을 데려왔던 군인이 들어왔다. 뒤이어 사복 차림의 남자 둘이 들어왔다.
수현이 그중 한 명에게 따지듯 말했다.
“박진호 씨, 할아버지 노트는 어디 뒀어요?”
박진호라고 호명된 사람이 다소 실망한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직 제가 갖고 있습니다만...”
“우릴 몰래 따라온 것도 모자라서 그걸 뺏어가요?”
“그건 제가 사과하겠습니다. 저희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박진호가 진심으로 사과하자 수현이 약간 누그러졌다. 불과 한 시간 전 수현과 정정화가 백운동천 바위 아래에서 김의한의 비밀 상자를 열 때 박진호는 멀리서 수현과 정정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수현이 북에서 내려온 이후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국정원 차원에서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백운동천 아래 비밀 상자에서 하얀빛이 터져 나올 때 수현과 정정화뿐 아니라 박진호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하늘로 솟구치던 빛이 한참 비치다가 꺼진 후 박진호는 백운동천 바위로 뛰어 올라가 열린 비밀 상자 속을 확인했다.
상자 속에는 예상한 대로 비닐에 꽁꽁 싸인 노트가 있었다. 수현과 정정화를 제치고 노트가 든 비닐을 집어 부하직원에게 넘기고 수현과 정정화를 연행했다. 두 사람은 노트의 내용은 아예 보지 못한 채 박진호를 따라 특전사 막사로 온 것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쭈뼛쭈뼛하던 박진호가 약간 풀이 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게... 노트의 중요 부문들이 모두 암호화되어 있었습니다.”
수현과 정정화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 질렀다.
“네에?!”
"뭐라고요?"
수현과 마주 본 후
“암호라니, 그게 무슨...”
하던 정정화가 뭔가 생각난 듯 말을 뚝 끊고 생각에 잠겼다. 김의한에게 동농이 만든 암호 규칙이 있었던 것이 기억난 것이다.일본 공사관의 판사대신으로 임명되어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 동농은 외교 서신에 사용할 암호 규칙을 만들어 사용했었다. 이 암호 규칙이 적힌 종이를 상해에서 김의한이 갖고 있었던 것을 정정화가 기억해 낸 것이었다. 김의한이 남에 남겨 놓은 자료에서는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 암호 규칙을 적은 종이는 '김의한에게 있는 것이다!'
“성엄이 암호 규칙을 적은 종이를 갖고 있을 겁니다.”
정정화의 말에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정정화를 바라봤다. 가장 난처한 표정을 지은 것은 박진호였다. 박진호가 '사실인가'를 묻자 동농이 일본대사관 판사대신이던 시절 사용한 암호규칙을 상해에서 김의한이 갖고 있는 것을 본 적 있다는 말을 해 주었다. 정정화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긴 박진호가 ‘다녀올 곳이 있다’며 급히 박사 밖으로 뛰어나갔다.
박진호가 나가자 박진호와 같이 들어온 또 다른 남자가 이번에는 정섭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천문연구원 이상현상팀 팀장 이종학입니다.”
정섭이 ‘나한테... 무슨...’ 하는 표정으로 정정화와 수현을 바라봤다. 수현이 정섭에게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분은 정섭 선배 시간 여행에 관심이 많은 분이에요.”
“박정섭 씨, 안녕하십니까?”
얼떨결에 정섭도 인사를 했다. 이종학이 정섭에게 가까이 오더니 말했다.
“아까 정정화 선생과 나누시는 말씀 밖에서 들었습니다.”
엿들었다는 것처럼 들려 정섭이 기분 나쁜 말투로 답했다.
“그런데요...?”
“시간 여행을 하신 것이 사실입니까?”
정섭이 정정화를 봤다. 정정화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섭으로서는 달리 둘러댈 말도 없는 상황이었다.
“들었다니 다 아시겠네요.”
“그렇다면 어떻게 시간 여행을 하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왜 자신에게 그런 일이 생긴 것인지는 알고 싶었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
“안다기보다 짐작할 뿐입니다.”
이종학의 말에 정섭이 고개를 한번 갸웃한 다음 말했다.
“짐작을 하다니... 그럼 이유를 어느 정도는 안다는 뜻 아닙니까?”
“말 그대로 짐작하는 겁니다.”
정섭이 이종학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짐작하는 것을 말해 줄 수 있습니까?”
이종학이 수현, 정정화, 그리고 정섭을 둘러보고 말했다.
“박정섭 씨가 시간 여행을 할 때, 그러니까 과거로 갈 때와 현재로 올 때, 공통적으로 관찰된 자연 현상이 있습니다.”
정섭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종학을 봤다.
“그건 지구 자기장의 급격한 변화입니다.”
정섭이
“지구 자기장의 변화?”
하자 이종학이 수현과 정정화를 한 번 본 후 정섭에게 말했다.
“두 분에게는 지난번에 말씀드렸지만 지구 자기장의 방향이 급격하게 바뀌는 현상을 AMJ라고 합니다. AMJ 현상이 생기는 경우 시간의 흐름에 왜곡이 생길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잠깐 시간을 준 후 이종학이 말을 이었다.
“과거로 가실 때 지구 전체적으로 AMJ 현상이 있었고, 오늘 오실 때는 지난번보다 더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물리학을 전공한 정섭이 물었다.
“AMJ와 시간 이동 간의 인과관계가 있다는 가설은 확실히 검증이 된 건가요?”
“일단 자연 현상으로 인한 AMJ와는 확실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미국 워싱턴주의 세인트 헬렌스 화산이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폭발했습니다. 그 시간 우리 연구원의 AMJ 측정기기도 최대 수준까지 올라갔고요.”
정섭이 한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지구 자기장이 급격하게 변한 것이 이유라면 세계 곳곳에서 시간 왜곡이 생겨야 하는 것 아닌가요? 왜 하필 저에게만 그런 일이 생긴 겁니까?”
이종학 박사가 내가 바로 그 말을 하는 것이라는 듯 말했다.
“이유가 그것만이 아닌 것이지요. 우리는 박정섭 군이 갖고 있는 회중시계와 정정화 선생께서 갖고 계시는 임시정부 인장이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정섭이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회중시계와 인장이 있어야 하고, 추가로 지구 자기장의 급격한 변화도 필요하다는 것이군요.”
“현재로서는 그렇게 추정됩니다.”
정섭이 놀라운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수현과 정정화를 바라봤다. 그런 후 한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 가설이 맞다고 하더라도 현재로 올 때는 저한테 회중시계만 있었습니다. 임시정부 인장은 제게 없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정정화가 대신 대답했다.
“정섭 동지, 우린 그 시간에 성엄이 만든 비밀 상자를 열기 위해 임시정부 인장을 열쇠 구멍에 밀어 넣고 있었네. 인장이 열쇠 구멍에 들어가 상자가 열리는 순간 희고 강렬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네.”
정섭이 놀라는 표정이 되어 말했다.
“그렇다면 정정화 동지가 김의한 동지의 비밀 상자를 열기 위해 열쇠 구멍에 인장을 집어 집어넣는 순간, 그리고 아까 미국의 어떤 화산이 폭발한 순간, 이 두 개 사건의 시간이 일치하면서 60년 전 제가 갖고 있던 회중시계가 작용해 제가 시간 이동을 한 거란 말입니까?”
이종학이 말했다.
“현재로서는 그 가설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정섭이 놀란 가슴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런데 하필 왜 제가 그렇게 시간 이동을 한 것인지도 설명이 됩니까? 제가 과거로 갈 때는 수현이도 저와 같이 있었는데...”
이종학이 대답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풀어야 할 마지막 수수께끼입니다. 이 시간 왜곡 사건은 많은 의문점을 안고 있습니다. 모두 가설일 뿐이기 때문에 더 많은 검증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특전사 군인이 들어와 정섭, 수현, 정정화의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해 달라고 이종학에게 물었다. 이종학이 국정원이 인계받아 처리하지 않겠나 하고 애매하게 답했다. 군인이 '뭐든 빨리 결정해 달라'라고 말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갔다.
잠시 후 박진호가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왔다.
“지금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우리도 계엄사령부의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이곳으로 모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곧 우리가 신병을 인계받아 자리를 옮길 수 있을 것입니다.”
박진호의 말처럼 약 삼십 분 후 들어온 특전사 장교가 내민 서류에 박진호가 사인을 하자 이들은 막사를 나설 수 있었다. 막사 밖에는 지프차 한 대가 대기 중이었다. 세 사람이 뒷좌석에 앉고 박진호가 조수석에 앉자 지프차가 출발했다. 이종학 박사는 자가용으로 따라왔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경기도의 한 안가였다. 2층짜리 연립주택에 들어서자 지키던 군복차림의 장교가 이들을 안내했다. 안가의 회의 공간으로 들어가자 박진호가 말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십시오. 내일 우리는 판문점으로 갑니다. 아까 제가 나가서 원장님께 보고드리고 북측과 접촉하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판문점이란 말에 일행이 술렁였다. 정정화가
“우리가 왜 판문점을 갑니까?”
하고 묻자 박진호가
“김의한 선생을 만날 겁니다.”
말하자 모두 깜짝 놀랐다. 수현이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어요?”
하자 박진호가 답했다.
“김의한 선생이 작성했던 암호문 노트의 해독 규칙을 김의한 선생이 갖고 있다는 것이 확인됐습니다.”
말을 잠깐 멈춘 박진호가 이어 말했다.
“내일 김의한 선생으로부터 그 해독 규칙을 확보할 계획입니다. 북측에는 우리가 확보한 김의한 선생의 노트를 제공하는 것으로 협의가 됐습니다.”
김의한을 본다는 말을 듣자 정섭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정정화도 수현도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은 모두 서로를 보며 남다른 감정에 사로잡혔다.
정섭의 건강 상태를 진단하기 위해 군의료진이 왔다 간 후 정섭이 임시로 입을 새 옷을 박진호가 가져다주었다. 김의한의 노트도 정정화에게 전달했다. 과연 암호로 가득한 노트였다.
정섭은 암호로 가득한 노트를 보다가 문득 정섭이 정정화에게 물었다.
"동농 선생님은 어디에 모셨습니까?"
문득 정정화의 표정이 어두워젔다.
"아버님은... 정섭 동지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상하이 조계지였던 홍커우 지역의 만국공묘에 모셨어."
"만국공묘...라면?"
"외국인들을 위한 공동묘지로 조성된 곳이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정정화가 당시 상황을 비교적 소상하게 말했다.
"아버님의 장례는 임시정부가 국장으로 치렀다고 하네. 대한민국 제1호 국장인 셈이지. 집에 부의금 명부가 있는데 백범 선생님, 도산 선생님 등 많은 어른들이 오셔서 애도하셨어."
정섭이 '그랬겠지' 하는 생각을 하는데 정정화가 계속 말을 이었다.
"평소에 아버님과 가까웠던 나절로 선생이 동아일보에 부전을 쳐 이 일이 국내에도 알려졌고, 경성 시댁에도 빈소를 차렸다고 하네. 독립운동에 가담하지 못한 죄책감 때문인지 분에 넘치는 부의금이 모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동농을 존경하는 마음 하나로 혈혈단신으로 상해로 망명하던 정정화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뒤늦게 상해로 돌아간 우리도 신문 기록으로만 봤네만, 장례 행렬은 교민 270명이 넘는 사람들이 호장을 했다고 하더군"
불과 며칠 전에 밀산 파견을 지시하던 동농의 생생한 모습을 기억하는 정섭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부의금으로 묘지를 매입한다, 비석을 세운다, 심지어 교통정리 수고비까지 지불한다, 하면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장례를 치렀다고 하네."
그런데 '당연히 그래야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정섭에게 정정화가 이후 한 말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해방 되고 우리가 귀국한 후에 무덤이 문화대혁명 때 완전히 훼손됐다는 소리를 뒤늦게 들었어."
"뭐라고요?"
"외국인 묘지라는 이유라고 했어. 지금은 송경령능원이라는 공원으로 바뀌었다네."
"해방이 되면서 이장을 안 한 겁니까?"
"딱 한 번 기회가 있었는데 해방 후에 성엄이 너무 바쁘게 활동하는 바람에 이장을 못했고, 이후에는 국교가 끊어지면서 영 기회가 없었어. 다만 문화혁명 당시 시신을 파내지는 않았다고 하니 처음 묻혔던 곳에 그대로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네."
"그렇다면 그 위치는 알고 있겠군요."
"묘지의 번호를 알고 있으니 그 위치는 지금이라도 찾을 수는 있을 거야."
불과 며칠 전까지 동농의 비서로 밀명을 받아 경성으로, 밀산으로 갔던 정섭으로서는 안타깝기 짝이 없는 소식이었다. 독립운동에 몸 바친 아버지 동농은 중국 땅 어딘가에 묻혀 있고, 그 아들 성엄은 북한에, 그리고 그 며느리 수당은 남한에 흩어져 살고 있으니, 제국주의의 횡포와 분단이 가져온 이 독립운동 가족의 비극 앞에 뭐라 할 수 있는 위로의 말이 없었다.
수현과 정정화가 잠자리에 든 후 정섭은 안전 가옥 책상에 앉아 부산의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집에 전화가 없어서 간혹 편지를 쓰는 것으로 안부를 전하던 정섭이었다. 그날 밤정섭은 오랜 시간 잠에 들지 못했다.
## 판문점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정섭과 수현, 정정화는 박진호와 함께 지프차에 올라 파주로 향했다. 한 시간가량 달린 후 이들은 ‘캠프 보니파스’ 정문, ‘체크포인트 쓰리’ 검문소를 지나 공동경비구역으로 들어섰다.
유엔군, 한미연합사의 미군과 한국군으로 구성된 경비병과 기자들이 보였다. 콘크리트로 지은 2층 건물 '자유의 집' 주차장에 차량이 도착했다. 일행은 내려 헌병의 안내를 받아 자유의 집으로 들어갔다. 연락사무소, 브리핑실 등을 지나 간단한 신원 조회와 보안 서약서에 서명을 하고 밖으로 나와 회의장 T1으로 향했다.
안내하는 헌병에 의하면 회담이 이뤄지는 건물은 T1, T2, T3 세 개로 구분되는데 세 개를 모두 합쳐서 통칭 ‘MAC 건물’이라고 한다고 했다. MAC는 군사정전위원회를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MAC 건물 중앙을 가로지르는 선을 기준으로 위쪽은 북의 땅, 아래쪽은 남의 땅이었다.T1, T3를 회담장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통상 T2에서 회담이 이뤄지는데, 이 경우남측은 T1에서 대기하고, 북측은 T3에서 대기한 후 약속된 시간이 되면 중앙에 있는 T2에 동시에 입장해서 만나게 되어 있는 구조였다.
T1으로 향하는 길에 미군 장교 하나가 T1 건물 밖 벽에 붙여 만든 벤치에 앉아 있었다. 미군 장교는 민간인들이 T1으로 들어가는 것을 흥미 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남북을 가로질러 그어진 군사분계선 양쪽에 유엔군과 북한군 경비조가 서로를 마주 보고 서있었다.
T1으로 들어가자 내부 바닥에 군사분계선이 노란색과 흰색으로 그어져 있었다. 실내에서도 그 선을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헌병이 말했다.
T1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잠시 후 T1 한쪽 탁자 위에 놓여있는 전화기가 울렸다. 헌병이 받았다. 헌병이 전화를 끊자 세 사람을 안내해서 T2로 건너갔다. 맞은 편의 T3 문도 열리는 것이 보였다. 김의한이 인민군 장교의 안내를 받아 들어오고 있었다. 김동철도 함께였다.
정정화가 낮게 소리쳤다.
“성엄!”
김의한이 그런 정정화를 향해 걸어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이 정정화의 팔을 꼭 잡았다. 나이 든 김의한은 본 정섭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불과 하루 전 아무르강에서 생사를 넘나들던 김의한이 순식간에 지나간 세월 넘어 거기 있었다.
가까이 왔다고 생각한 순간 네 사람은 서로를 향해 뛰어갔다. 누가 말리고 할 사이도 없었다. 선을 사이에 두고 정정화와 김의한이 끌어안았다. 정정화 뒤로 수현이, 그리고 정섭이 김의한과 수현 모두를 감쌌다. 정정화와 김의한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수현과 정섭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이 모습을 잠깐 지켜보던 인민군 장교와 헌병이 네 사람을 떼놓고 테이블에 앉도록 했다. 정중앙의 큰 테이블 위에도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선을 가운데에 두고 북쪽에 김의한과 김동철, 그리고 인민군 장교가, 남쪽에 수현, 정정화, 정섭, 박진호와 헌병이 자리를 잡았다. 네 사람은 중앙선을 넘어 손을 잡았다. 모두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인민군 장교가 인상을 찌푸리는 듯했지만 제지하지는 않았다.
김의한이 붉어진 눈으로 세 사람을 바라봤다. 얼마 전 평양에서 난생처음 만난 수현, 전쟁 통에 헤어진 후 끝내 다시 보지 못한 아내 정정화, 그리고 자유시 아무르강에서 사라진 동지 정섭, 모두 그리운 얼굴들이었다.
김의한이 수현에게
“수현이는 무사히 잘 갔구나.”
하고 먼저 안부를 묻자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한 수현이
“네 할아버지”
하고 우는 목소리로 답했다.
김의한이 정정화를 향해
“수당... 당신은 여전하구려.”
하자 정정화는 김의한의 그 소리가 싫지 않은 내색을 하며
“건강은 괜찮소?”
하고 물었다. 김의한이 ‘나는 원래 건강한 사람이 아니오.“ 하고 웃으며 답했다.
마지막으로 김의한이 정섭에게
“정섭 동지, 정말 정섭 동지가 맞소? 수현이에게 미리 듣지 않았다면 알아보지 못할 뻔했소. 젊은 날 정섭 동지가 아직도 그대로라니... 시간 이동을 한다는 그 말이 사실이었던 게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정섭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울음이 터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어제만 해도 김의한 동지, 정정화 동지와 아무르강에서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소...”
김의한이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표정으로 정섭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렇게 무사한 모습을 보니 정말 다행이오. 수당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오?”
개인사가 늘어지자 남측의 헌병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시간이 아닙니다. 남과 북의 정보당국이 서로 합의한 사항이 있다면 어서 그 합의 사항을 수행하십시오.”
그제야 김의한이 생각이 난 듯 수현에게
“노트는 찾았다고 들었다.”
하고 묻자 수현이
“네, 할아버지.”
하고 대답한 후 가방을 열어 노트 원본을 꺼내 들었다. 김의한이
“잘 찾았구나.”
하며 노트를 받으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밖이 소란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바깥을 향했다.
‘우당탕’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사람들이 이리저리 몰리는 소리와 함께 '와' 하는 함성소리가 나왔다.
“야! 저 새끼 잡으라우!”
영어로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백 오프! 백 오프! 퍼킹 백 오프! 악!”
모두 영문을 몰라 말도 행동도 멈추고 있던 그때, T1과 T3로 연결된 문이 동시에 열렸다. 열린 문으로 일단의 헌병과 인민군들이 뛰어 들어와 동시에 외쳤다.
“철수! 철수!”
T2 회담장에 있던 남과 북의 헌병과 인민군 장교가 동시에 양편의 사람들에게 일어나 나가라고 소리쳤다. 제대로 작별 인사도 하기 전에 김의한과 수현, 정정화, 정섭이 T3와 T1으로 밀려 나갔다. 서로를 부르는 안타까운 소리가 T2에 울렸다.
“성엄!”
”여보, 수당!“
”할아버지!“
”수현아“
”김의한 동지!“
”박정섭...“
반대 방향으로 밀려 나가며 서로를 향해 손을 들어 소리를 쳤지만 일행들이 T1과 T3의 문턱을 넘어가자 두 개의 문이 닫혀 버렸다. 닫히는 문틈 사이 찰나의 모습이라도 보려고 끝까지 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사람들이 T1 밖으로 나왔다. 수현과 정정화의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정정화가 ‘비틀’ 하자 정섭은 얼른 정정화를 부축했다.
바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T1으로 들어갈 때 유엔군 장교가 앉아 있던 MAC 빌딩 옆 벤치 근처에 백여 명의 인민군과 유엔군 헌병들, 남북 양측의 기자들이 엉켜서 한 편 두들겨 패고, 한 편 뜯어말리며 엉겨 붙어 있었다. 바로 그 유엔군 장교가 정신을 잃고 엎어져 있었다. 동행했던 헌병이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 그때까지 노트를 들고 있던 수현이 노트를 가방에 다시 넣었다.
지프차를 타고 판문점을 빠져나오는 길에 라디오에서 뉴스가 나왔다.
‘속보입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유엔사 소속 윌리엄 핸더슨 소령이 북괴 기자들과 수십 명의 북괴군에게 폭행을 당해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현재 핸더슨 소령은 후송되었으며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유엔사는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에 착수했으며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남북 간 일체의 접촉은 중단하기로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정정화가 아쉬운 한숨을 쉬었다.
”하필...“
박진호는 정정화에게 다음 상황을 보아서 김의한을 다시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찾겠노라고 했다. 지프차가 혜화동이 아닌 안전가옥 쪽으로 향하자 일행은 어리둥절했다. 정정화가 왜 혜화동으로 가지 않냐고 했으나 박진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칼테크 천체물리학팀
안전 가옥에 도착하자 현관 입구에 이종학 박사가 서 있었다. 이종학은 정섭만 따로 불러 자신의 차에 태운 후 파주 인근의 군사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엑스레이, CT에 MRI까지 촬영하고, 피를 뽑고, 초음파, 심전도 등 온갖 검사를 마친 후에야 이종학은 정섭을 다시 안전 가옥으로 데려갔다.
안전 가옥 2층의 독립된 방에 들어가자 40대의 젊은 미국인이 정섭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종학이 정섭에게 그 미국인을 소개했다.
”칼테크 천체물리학팀 마이클 모리스 교수입니다.“
어리둥절한 정섭이 얼떨결에 모리스와 악수를 했다. 모리스는 칼테크 천체물리학팀을 나사와 미국방성의 지원을 받는 기구로 소개하고, 자신은 캘리포니아공대 교수라고 소개했다.
”정섭 군도 물리학도라 어느 정도 이해는 하시겠지만 칼테크는 이론적 시간 곡률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모리스 교수는 최근 약한 에너지 조건 하에서의 공학적 시간 왜곡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
뜬금없이 나타난 외국인에 생소한 이론까지, 정섭은 아직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이종학이 말을 이었다.
”쉽게 말해서 이 연구팀은 시간 여행을 연구하는 팀입니다.“
이종학이 모리스에게 직접 정섭과 대화할 것을 제안했다. 모리스가 정섭에게 한 말은 놀라웠다. 자신들은 지구 자기장을 일부 지역에서만 국지적으로 변화시키는 원천 기술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 상대성이론을 토대로 하는 '폐쇄 시공간 곡선'에 대한 연구가 성과를 보이면서 인위적인 시간 왜곡의 가능성을 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설명한 모리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정섭에게 말했다.
”문제는 우리가 개발한 폐쇄 시공간 곡선 안에서 AMJ를 국지적으로 발생시키는 것만으로는 시간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이 된 것입니다. 필요조건만 갖춰진 셈이지요.“
이종학이 거들었다.
”그러던 차에 CIA가 우리 국정원의 자료를 토대로 정섭 군이 시간 이동을 한 정황을 발견하고 정섭 군을 직접 만나기 위해 모리스 교수께서 온 것입니다.“
정섭이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필요조건 외의 충분조건은 뭡니까?
모리스가 거침없이 답했다.
”회중시계, 임시정부 인장...“
모리스의 입에서 회중시계, 인장 이야기가 나오자 정섭이 기가 막힌 표정을 하고 이종학에게 말했다.
"아니, 그런 걸 이 사람이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그러자 이종학이 모리스를 힐끗 한번 쳐다본 후 덧붙였다.
”거기에 정섭 군까지 포함입니다.“
”...“
모리스가 말했다.
”듣자니 회중시계와 임시정부 인장은 이미 수현 양과 정정화 선생이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이에 지구자기장의 급격한 변화, 즉 AMJ 현상이 발생한 것도 여러 번 있었고요. 그런데 두 분은 시간 이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모리스의 말에 이어 이종학이 설명을 더했다.
"그래서 정섭 군에 대한 물리적, 역사적, 기타 등등, 한마디로 종합적인 정보가 필요했습니다. 아까 병원에서 한 검사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정섭은 생각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시간 이동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들은 시간 이동 실험을 위해서라도 나를 다시 과거로 보내려고 할 것이다... 더구나 미국... CIA...'
정섭은 칼테크 천체물리학팀의 연구동으로 걸어가는 자신을 상상했다. 목에는 회중시계와 임시정부 인장이 걸려있다. 복도 끝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자 문이 열린다. 폐쇄 시공간 곡선을 생성하는 거대한 장치가 눈앞에 나타난다. 그 앞에 투명한 캡슐이 있다. 모리스가 정섭에게 말한다.
"캡슐에 들어가면 우리가 일 단계로 폐쇄 시공간 곡선을 생성하고, 이 단계로 국지 자기장을 급격하게 변화시킬 겁니다. AMJ가 지속되는 시간이 길수록 더 먼 과거로 갈 겁니다. 이번 실험에서는 약 100년 전쯤의 조선으로 가게 될 겁니다. 행운을 빕니다."
들어가지 않으려고 반항하는 정섭을 억지로 밀어 넣자 캡슐의 문이 닫혔다. 모리스가 복잡한 계기판 앞으로 간다. 계기판에는 뚜껑으로 덮여있는 단추가 있다. 모리스가 뚜껑을 열고 단추를 눌러 기계를 작동시킨다. '윙'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빛이 솟구치는가 하더니 정섭을 둘러싼 공간이 회전하기 시작한다.
여기까지 상상한 정섭이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 쥐고 '으악' 소리를 내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섭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면서 정신을 잃고 무너지듯이 쓰러졌다.
##에필로그. 1921년 상해
밀산으로 떠나기 전날 밤 동농은 정정화를 따로 불렀다.
"요즘 나의 상태로 봐서 너희가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을지 장담이 안 된다."
"아버님. 어째서 그런 말씀을..."
"아니야. 나도 준비란 걸 해둬야 하지 않겠니?"
"아버님..."
동농이 정정화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네 아버님."
"박정섭 군은 내가 젊은 시절에 본 적이 있는 젊은이야."
정정화가 무슨 말씀을 하시느냐는 표정으로 동농을 바라봤다.
"네?"
"틀림없어. 처음엔 설마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젊은이가 맞아. 그가 가지고 온 회중시계를 봤을 때 알아봤어야 했어. 내가 갖고 있던 회중시계에는 태극 문양이 없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야."
잠시 시간을 둔 동농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다만 알 수 없는 건 정섭 군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점이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자신의 말을 듣는 정정화를 보며 동농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좀 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늙은이가 죽을 때가 돼서 노망이 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가, 이 일은 의심을 품지 말고, 내 말을 무조건 믿어줬으면 한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동농이 거짓말을 할 리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정정화로서는 그저 믿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네 아버님"
"그래서 네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동농이 말했다.
"혹시 내가 죽는다면 내 회중시계를 네가 유품으로 잘 챙겨 놓아야 한다. 다른 것과 혼돈되지 않도록 시계 안쪽에 태극 문양을 새겨 넣어놓으마."
"네"
동농이 눈빛이 눈물로 흐려지면서 말했다.
"네가 나이가 들어 정섭 군을 만나면 회중시계를 그에게 반드시 주어야 해."
정정화는 진심을 다해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모르겠지만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버님"
동농이 정정화로부터 다짐을 받자 안심이 되는 표정이 되었다.
"이제야 안심이 되는구나. 정화야, 회중시계를 잃어서도 안 되고, 내가 한 말을 잊어서도 안 된다. 알겠느냐?"
(SF소설 독립전쟁 제1부 시간의 인장 끝)
※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SF소설 독립전쟁 제1부 시간의 인장 연재를 마칩니다. 조만간 제2부 '오욕의 날들(가제)'로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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