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 치앙마이에서 용서를

매일 여름 : 치앙마이에서 친구와 보낸 30일

by 땅콩



‘선재 업고 튀어’라는 드라마가 유행을 했었다.


그 드라마가 한창 방영중일 때, 누군가와 만나기만 하면 그 드라마 이야기가 나왔었다. 너 선재 업고 튀어 봤어? 이번 주 거 봤어?


드라마에 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너무 재미있어서 대본집까지 구매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난 아직 안 봤어. 나는 몰라.라고 말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주변에서 그렇게 재밌다 재밌다 할 때에는 이상하게 흥미가 안 생겼는데, 드라마가 끝이 나고 시간이 흘러 그 열기가 조금 잠잠해진 어느 날, 갑자기 그 드라마가 보고 싶어 졌다. 나는 늘 이런 쪽에서 조금 느린 편이었다.


그렇게 뒤늦게 정주행을 시작한 ‘선재 업고 튀어’는 정말 사람들 말 그대로였다. 너무 재미있었다. ’ 선재 업고 튀어’ 봤냐는 물음에 안 봤다고 대답했을 때 나를 향해 지었던 그 표정들이 곧 이해가 되었다.


정주행을 시작하며 곧 ’ 선재 업고 튀어’에 몰입을 하게 된 나는 밥 먹을 때는 물론이고 잠시 시간이 날 때마다 드라마를 봤고, 중요한 장면이 나올 것 같은 회차에는 방에 불을 끄고 빔 프로젝터를 켜서 봤다. 그건 내가 가장 큰 화면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이었다. 많이 웃고, 많이 울었다.



과몰입하는 무언가가 생겼을 때, 내가 꼭 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이것을 주제로 친구와 대화를 하는 것이다. 너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그럼 너라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아? 나는 진짜 많이 생각해 봤는데, 나라면 이렇게 했을 거 같아. 우리는 흥미로운 공동의 주제가 생기면 그걸로 하루 종일 떠들 수 있다. 점심을 먹으며 시작하고, 커피를 마시며 계속 이야기하고, 집에 가면서는 ‘자세한 얘기는 이따 통화로 하자.’라고 하는 게 우리였다.


그리고 이번에 내가 희망하는 주제는 바로 이 드라마였다.


하지만 문제는 내 친구였다. 나는 늘 남들 다 볼 때 안 보다가 뒤늦게 빠지는 편이었고, 내 친구는 나보다 더 심하다. 심지어 이번에는 나까지 ‘너 선재 업고 튀어 봤어?‘라고 물으니, 더더욱 흥미가 떨어져 버린 것이다. 남들이 다 이야기하니까 이미 자기도 본 것 같은 기분이라고 했다. 안 봤는데도.


하지만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한창 우리가 탄 비행기가 태국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책을 읽다가 덮고, 영화를 보다가 끄고, 노래를 듣다가 이어폰을 빼고 이제는 지도에서 우리가 타고 있는 비행기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멀뚱히 보던 친구가 나한테 물었다.


“뭐 재밌는 거 없어? 너 공책 있으면 우리 오목 둘래?”

오목 같은 소리.

나는 때가 왔다 싶었다. 나는 내 태블릿에 저장해 둔 ‘선재 업고 튀어’를 친구에게 내밀었다.


“심심하면 이거 볼래?”


내 계략은 성공했다. 친구가 그럴까? 하며 선뜻 받아 든 것이다. 이어폰을 낀 친구는 이제 비행기가 날아가는 지도대신 ‘선재 업고 튀어’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겼음을 알게 되었다. 친구가 생각보다 과몰입을 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재미있게 보는 정도였다. 하지만 회차가 진행될수록 드라마는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고, 그건 우리의 치앙마이 일상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하루를 예로 들자면, 저녁바람이 선선한 날이었다.



“오늘 저녁 뭐 먹을까?”


“집 가서 시켜 먹자.”


“집에서?”



안될 건 없지만, 친구와 여행을 와서 숙소에서 배달음식을 시켜 먹는 일은 드문 일이었기에 의아했다. 심지어 날씨가 좋고 노을이 예뻤기 때문에 더 그랬다. 친구라면 이런 날엔 야외테라스에서 먹고 싶어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난 상관없기 한데, 왜? 집에서 먹어야 하는 이유가 있어?”


“… 선재가.”


“선재?”


“선재가 어떻게 되려고 그러는지 정말 궁금해.”



생각도 못 한 이유에 잠시 할 말이 없어졌다.



“선재? 지금 드라마 때문에 집에서 밥 먹자는 거야?”


“하지만 어젯밤에 마지막으로 봤던 장면 생각해 봐. 선재가 이클립스에서 사라졌다고.”



어떻게 이클립스에서 사라질 수 있어… 친구는 중얼거렸다.



우리는 잠들기 전 함께 간식과 과일을 먹으며 선재 업고 튀어를 보고 잠들곤 했는데, 어젯밤 마지막으로 봤던 장면이 꽤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그 장면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친구를 위해 저녁은 집에서 배달음식을 주문해서 먹기로 했다.



“뭐 먹고 싶어?”


“창푸악수키 오라고 그러자.”



친구는 음식을 주문할 때 ‘오라고 해라.’라고 하는 입버릇이 있었다. 치킨 오라고 하자. 떡볶이 오라고 하자. 가끔 어떤 음식인지 모르겠을 때 에는 ‘얼굴 좀 보자.’. 그건 검색해서 사진을 보자는 소리였다.


우리는 창푸악 수키를 오라고 했다. 창푸악 수키는 고기와 야채, 그리고 당면을 볶은 음식이다. 마치 샤부샤부를 볶음으로 요리한 것 같은 음식이다. 우리는 창푸악수키와 먹으며 맥주를 마셨고, 친구의 바람대로 선재 업고 튀어를 보았다.



아직 해가 미처 저물지도 않은 저녁이었고, 바람이 선선했다. 여행지에서 이렇게 날씨가 좋은 저녁에 숙소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 조금 아쉬운 일일까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오라고 한 음식은 아주 맛있었고, 맥주는 시원했고, 드라마는 재미있었다. 즐거운 저녁이었다.


가지 않은 곳이 아쉽지 않을 수 있고, 하지 않은 시간이 아깝지 않을 수 있다. 별거 안 해도 즐거울 수 있다. 친구랑 태국에서 한달살이를 하며 알 게 된 것들이었다.



드라마를 보며 친구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너라면 너 때문에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해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떻게 했을 거야? 몇 번 시간을 되돌려서 막아보려고 했지만 그게 잘 안돼. 여전히 너 때문에 위험해지고 죽을 수도 있어.”



드라마의 여자주인공은 남자주인공을 위해 남자주인공의 인생에서 본인이 빠지는 것을 택했다. 시간을 되돌려 남자주인공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로 돌아가, 자신을 알지 못하게 멀리 떨어진다. 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고민하면서 친구에게 너라면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을 했었다.


잠시 고민하던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난 그러면 멀리 떨어질 거 같아. 멀리서 지켜보고 뭐가 됐든 도와주려고 해 보겠지만, 그것도 안 된다면 그냥 모르는 사람으로 있을래.”


“정말? 모르는 사람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그 사람만 너를 잊고 너는 그 사람이랑 함께 했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건데도? 너는 그 사람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는 거잖아. 근데 포기할 수 있어? “


”내가 옆에 있으면 위험하잖아. 나 때문에 다치는 것도 힘든데, 죽는다면 난 못 견딜 것 같아. 그게 더 힘들어. “



의외였다.


친구의 말을 듣고 약간의 반성과 함께 내 생각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나라면 될 때까지 이 방법 저 방법 다 써보다가 내 머리로는 안 되겠으면 남자주인공에게 솔직하게 상황을 말하고 어디 가지 말고 같이 상의해 보자고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난 죽었다 깨어나도 드라마 여주인공으로는 안될 사람이다. 저런 여자가 주인공인 드라마를 누가 보고 싶을까.


얘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혼자 견뎌낼 용기정도는 있는 사람이 여자 주인공 하는 거구나.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우연히 선재 업고 튀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난 그때 친구가 한 선택이 의외였다고 말했다.


“그때 네가 그랬잖아. 너 때문에 다치게 둘 수 없어서 포기할 거라고. 난 사실 포기하지 않겠다고 할 줄 알았어.”


“아, 맞아. 내가 그랬었지. 나 근데 생각이 바뀌었어. 어떻게 포기해. 죽어도 같이 죽어야지.”



얼마 전과 너무 다른 선택이었다.


일단 말투도 어딘가 다른 것 같았다. 전에는 단단하고 따스했는데 지금은 조금 냉랭함도 느껴졌다. 마치 다친 남자주인공을 앞에 두고 ‘아, 이 방법도 아닌가 보다. 자, 다시 해 보자. 뭐 이런 걸로 쫄고 그래. 쫄지 말고, 다시. 레츠, 고!‘라고 할 것만 같았다. 이런 여자가 주인공인 드라마도 아무도 안 보고 싶을 것이다.


“너 저번에는 다치지 않게 지켜 줄 거라고 하더니?”


“치앙마이에서 생각한 거니까 그랬지. 거긴 따뜻하고, 미소의 나라잖아. 거기선 아무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다. 나라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는 걸까?


알 수 없지만, 나는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친구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치앙마이에서 용서를 구해야겠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