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준아, 오늘 수업 마치고 잠깐만 남아.”
친구들이 떠난 학교 뒤 작은 마당에, 선생님과 함께 밤송이 같은 머리를 한 경준이 어설프게 서 있다. 경준은 이 분위기가 불편한 듯 쉴 새 없이 양팔을 휘두른다. 경준의 흔들림을 따라 공기가 손가락 사이로 지나간다. 그 느낌이 부드러워 잠깐 딴생각을 한다.
“경준아, 운동회가 얼마 안 남았잖아. 우리 반 친구들이 모두 달리기를 할 거야.”
경준은 코를 벌름대며 머릿속으로 선생님이 왜 남으라고 했는지를 유추한다. 그러다가, ‘끄덕’ 알겠다는 표시를 한다.
“자, 이리로 와봐. 경준아, 이게 출발선이라고 생각하고 선생님이 ‘요이땅!’ 할 테니까, 소리를 들으면 뛰는 거야.”
운동회 준비라는 말에 긴장되긴 하지만, 그것쯤이야.
마음을 다잡은 경준이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이어서, 선생님이 ‘요이땅!’하고 외친다. 그러자, 한껏 자세를 취하고 있던 경준의 마음의 시계추가 묵직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 하고 한 발을, 또 ‘하나, 둘, 셋’하고 한 발을 뗀다. 경준은 ‘셋’이라는 마음의 시계가 들릴 때만 한 발자국씩 발을 뗀다. 경준이는 ‘셋’이 아니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경준아, 그냥 팔을 이렇게 휘두르고 다리를 팔 동작에 맞춰 달려 나가 봐.”
선생님은 몸으로 흉내를 내며 열심히 설명을 한다.
“네, 해볼게요.”
다시 선생님이 신호를 보낸다.
“하나, 둘, 셋‘하고 한 발을, 또 ’ 하나, 둘, 셋‘하고 한 발을.
선생님이 다가와 경준의 밤송이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경준아, 아까 보니까. 친구들하고 놀 때는 잘 뛰던데. 왜 출발선에만 서면 경준이가 슬로모션처럼 달리는 걸까?”
경준은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며 괜스레 운동장 바닥을 ‘툭툭’ 친다. 경준의 운동화 끝으로 모래 바람처럼 흙알갱이가 살짝 들렸다 주저앉는다. 경준의 손은 선생님이 조금 전 쓰다듬었던 자신의 밤송이머리를 만지며 까끌까끌한 감촉을 느껴본다.
‘이상하다’
친구들하고 놀 때는 경준은 ‘날쌘 돌이’처럼 잘 달린다. 그런데 그놈의 ‘출발선’에만 서면 마음의 시계추가 움직이며 오로지 ‘셋’에만 발이 떼 진다.
“아,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웬일이세요?…아, 그래요? 아, 네.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멀리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는 않지만, 경준은 선생님이 왜 전화를 했는지 안다.
저녁 밥상을 앞에 두고 엄마는 무슨 심통이라도 나는지 무서운 표정이다. 경준도 기분이 썩 개운한 건 아니다.
“경준아, 야! 빨리 와서 밥 먹어.”
경준은 밥맛이 없다. 묵직한 것이 심장 끝에 매달린 양 식욕이 돋지 않는다.
“이경준! 빨리 와서 밥 먹어.”
엄마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다.
“아니, 왜 못 달리는 거야. 바보도 아니고. 그냥 뛰면 되는 거지. 왜! 운동회 날, 동네 엄마들도 많이 올 텐데!”
경준은 밥맛이 추락하는 것을 느낀다.
“경준아, 빨리 와서 밥이나 먹어. 빨리 안 와?”
엄마의 목소리가 시한폭탄 같다.
“빨리 와. 엄마가 셋 셀 때까지 안 오면 너 알지?”
경준은 폭탄을 피해 어딘가로 대피해야 한다. 그러나.
엄마의 목소리가 더욱 커진다.
“하나, 둘, 셋”
‘셋’ 소리와 함께 경준의 엉덩이가 그 반동으로 튕겨 오른다. 그와 동시에 경준의 기억이 활짝 열린다.
엄마는 집안일시킬 때마다 ‘하나, 둘, 셋’을 외쳤다.
“빨리 방 치워, 하나, 둘, 셋!”
“양말 벗어서 세탁기에 넣어, 하나, 둘, 셋!”
“세상 사는 거, 왜 이리 힘드냐.”
경준의 절친, 준우가 아파트 놀이터 구름사다리 위에서 속삭이듯 말한다.
“사는 거?”
경준도 마찬가지다. 경준에게는 다음 주, 운동회가 최고의 고비다. 그것을 피할 수만 있으면 지금 준우 동생으로 태어난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왜, 공부하기 싫은데 자꾸 공부하라고 하는 거야.”
준우가 뭔가가 치밀어 오른 듯 구름사다리 위에서 곡예를 하기 시작한다. 준우가 움직일 때마다 준우에게 뜨끈한 공기가 전해진다. 모범생 준우의 오목렌즈가 유독 동그랗다.
“너는 공부라도 잘하지. 나는 잘하는 게 없어. 공부도. 달리기도….”
“야, 공부가 끝이 있어야 말이지. 해도 해도 끝이 없어. 그거에 비하면 달리기쯤이야, 한 번 하고 나면 끝이잖아.”
그렇다. 한 번만 잘 버티면 된다. 그런데 진짜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출발선에만 서면….
“저기, 준우야. 있잖아. 나 고민이 있어.”
“뭐, 달리기 고민? 그게 고민 축에나 끼냐?”
모범생들은 이게 문제다. 지들은 뭐든 잘하니까 남들이 못하는 걸 이해를 못 한다.
“야, 나. 진짜, 세상 살기 싫을 정도로 고민이야.”
준우는 그제야 들어볼 가치가 있다고 느꼈는지 구름사다리에서 팔딱 뛰어내리더니 양손을 툭툭 치면서 흙먼지를 떨어낸다. 그리고는 경준에게 빨리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옆으로 까딱 움직인다.
“음, 나 말이야. 이상하게. 출발선에만 서면….”
준우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위로인지 공감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댄다.
“나도 알아. 그 기분.”
‘준우는 정말 아는 걸까?’ 의외다 싶어 준우를 쳐다보자,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거든. 나는 피아노를 치거나 노래를 할 때, 늘 엄마가 ‘하나-둘’하고 박자를 맞춰 줬는데…그래서 뭔가를 할 때는 꼭 ‘하나둘’하고 마음의 박자를 맞추게 돼.”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이런, 유레카! 마음의 시계추를 준우는 박자라고 하네.’
이 묘한 동질감을 뭐라고 해야 하나. 오늘따라 준우가 대단해 보인다. 역시 똑똑한 애들은 비유도 그럴싸해. 준우는 ‘짜식, 나도 다 경험한 일이야.’라고 하듯 여유 있는 미소까지 지어 보인다.
“그러니까, 니 마음에 있는 리듬 같은 거지. 나도 ‘하나- 둘’ 하고 노래 시작해야 박자가 딱 맞거든! 근데 언젠가는 그 박자 생각 안 하고도 하게 되더라”
“정말? 언제? 나 그러면 정상적으로 달릴 수 있을까?”
“그럼, 될 거야. 언제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 리듬을 신경 쓰지 않게 되는 날이 꼭 와.”
준우는 멋있는 녀석이다.
그때 깨달았다.
누군가는 “하나-둘”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는 “하나, 둘, 셋”에 맞춰 달린다.
다들 자기만의 리듬이 있는 거였다.
“누구나 셋이 되어야 뛸 수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누구보다 천천히, 그러나 자신만의 리듬으로.
당신의 ‘하나, 둘, 셋’도 꼭 존중받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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