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세 할머니를 보내드리며
104세 시할머님을 보내드리며 – 며느리의 자리에서
104세 시할머님께서 천국 가신 날.
시집온 지 25년,
나는 또 한 번 며느리의 자리에 섰다.
아버님은 82세, 어머님은 76세.
이제는 우리가 앞에 서야 할 시간이었다.
상주 역할은 자연스럽게 우리 몫이 되었다.
새벽에 할머니를 하나님 품으로 보내드리고
아버님은 당신의 아들에게 전화를 거셨다.
“할머니 돌아가셨다.”
남편은 담담히 “네, 알겠습니다.”라고 했다.
그 담담함 속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코로나 때부터 두 분은 마음으로
이별을 연습하셨는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힘드실 때마다
구급차를 부르고 응급실을 오가셨던 아버님.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아
다시 집으로 모셔와야 했던 날들.
연세 많은 몸으로
어머니를 모시는 아들의 마음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
나는 슬픔보다
부모님 걱정이 먼저였다.
도착하니
더 늙어버린 듯한 두 분의 얼굴.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며느리가 아니라
이 집의 한 사람으로 서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친정엄마는 당부하셨다.
“너 며느리여.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 잘하고 와라.”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래, 나는 며느리다.
잘하고 와야 한다.
어려서 시집와
지금까지 시할머니를 모신 큰며느리, 어머님.
그 세월을 나는 다 알 수 없지만
그 수고를 존경한다.
영정 속 할머니는 평안해 보이셨다.
평생 하나님만 찬양하시던 권사님.
성경을 읽고, 쓰고, 그리고
100세에 색연필을 드셨던 분.
“100살 때만 해도 손에 힘이 있었는데…”
102세에 하신 그 말씀이 떠올랐다.
나는 50을 넘기며
몸이 아프다고, 힘들다고
쉽게 말해왔던 사람.
영정 앞에서
괜히 부끄러워졌다.
장례는 새벽에 시작되어
꼬박 3일장이 되었다.
나는 그 시간을
‘며느리로 배우는 3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일회용품이 없는 장례식장.
쇠 숟가락, 도자기 그릇.
저녁이면 도와주시는 분들은 퇴근하시고
손님은 오히려 그 시간에 몰렸다.
장가온 고모부와
시집온 며느리들이 함께 상을 차리고
치우고, 또 차리고.
예전처럼 많은 발걸음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우리의 몫을 다했다.
이번 장례는
슬픔의 시간이라기보다
자리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며느리로 산 25년.
그리고 앞으로도
며느리로 살아갈 시간.
할머니를 보내드리며
나는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이 집의 며느리로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