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부르는 봄날의 자전거 하이킹

시간 여행의 시작

by 호뚜니의 작은방


자전거는 어느새 하루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진 채, 숨이 턱턱 막히는 오르막길에서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허벅지는 뻐근하게 타올랐고, 폐는 뜨거운 숨결을 토해냈다. 그때, 기적처럼 한 대의 트럭이 우리 앞에 멈춰 섰다. 그렇게 우리는 생애 처음으로 히치하이킹을 하게 된 여고생들이었다.

트럭 운전사 아저씨는 망설임 없이 우리를 목적지 근처까지 태워주셨다. 덜컹거리는 짐칸에 자전거와 함께 올라탄 우리 여섯 명은 초록 숲길을 따라 롤러코스터처럼 출렁이며,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풀내음과 흙냄새가 어우러진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 음악에 맞춰 우리도 목청껏 따라 불렀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아저씨는 조심스레 자전거들을 내려주셨고, 우리는 감사 인사를 연신 전하며 트럭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날, 시원한 계곡이 흐르는 산자락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발을 담그자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온몸의 열기를 식혀주었다. 마치 마셔도 될 듯 맑은 계곡물, 따사로운 봄 햇살, 그리고 갓 피어난 연두빛 새싹들. 숲속 흙냄새와 풋풋한 향기가 아직도 눈을 감으면 어렴풋이 떠오른다. 내 머리가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얼마 전, 친정집에서 오래된 상자 하나를 찾았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내 이름이 또박또박 적혀 있는 상자. ‘주의해 주세요’라는 문구도 함께 적혀 있었다. 상자 안에는 빛바랜 사진 들과 가장자리가 닳아 쭈글거린 쪽지 편지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옥상으로 따라와” 같은 장난스런 문장 대신, 진짜 여고생들의 진심과 우정이 담긴 기록들이었다.

그 상자는 나에게 마법의 판도라 상자 같았다. 광주에서 경기도로 도망치듯 떠나올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새벽에 짐을 꾸리던 그날, 나는 여고 시절의 모든 추억을 그 작은 상자에 쏟아부었다. 엄마는 내 친구들을 알기에, 그 상자를 버리지 않고 조심스럽게 이삿짐 트럭에 실어주셨다. 몇 번의 이사가 있었지만, 상자는 누구의 손에도 열리지 않았다. 내 이름이 적혀 있었기에, 모두가 지켜준 나만의 작은 보물이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 상자를 열었다. 마치 시간 여행을 하듯, 나는 다시 18살로 돌아가 있었다. 그날의 봄 향기, 숲속 장난,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그던 그 순간까지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 글은 바로 그 작은 마법 상자를 열며 시작된 나의 시간 여행 이야기다.

그날, 은선이가 다리를 다쳐 잠시 친구 집에 들렀고, 친구 어머님이 정성껏 싸주신 점심 도시락을 펼쳐 먹었다. 돗자리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둘러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 아삭한 김치, 상큼한 상추쌈을 나눠 먹으며 잠시나마 따뜻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갑작스레 후두둑,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허둥지둥 짐을 챙기며 피할 곳을 찾았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계곡물에 젖은 몸은 금세 차가워졌고, 쌀쌀한 봄비는 우리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다행히 비는 오래가지 않았다. 지친 몸을 일으켜 우리는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오늘처럼 또 다른 기억이 될 하루를 향해, 그렇게 페달을 밟았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