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날씨: 흐림

중년의 위기와 우울증

by Leah

내가 원했던 단 한 가지: 안정


그것은 절대로 닿을 수 없는 신기루와 같다. 보이는 듯 하나 막상 다가가면 사라지고 만다.


지난 한 주는 정말 너무 힘들었다. 이제 그만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많은 후회, 자조, 스스로에 대한 실망, 현실 살이의 힘듦, 뜻대로 안되는 계획, 어려운 결정들, 가장 가까운 식구들 말과 반응에 받은 상처, 지쳐버린 심신...



10대까지 나는 안정되고 보호된 환경에서 어려움 없이 컸다. 부모님은 나 하고 싶은거 대체로 하게 해주셨다.


20대까지 나는 나를 사랑했다. 젊고, 머리 나쁘지 않고, 그럭저럭 쓸만했으니까. 그러다 26살쯤 처음 우울증을 겪어보았다. 그건 상황에 의한 것이어서, 상황을 바꾸고 난 후 조금씩 나아졌다.


30대... 출발은 좋았다. 나의 어린 아기들로부터 내가 흠뻑 사랑을 받는, 정말 어쩌면, 내가 진짜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느껴보는 경험이었다. 또 좋은 기억보다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결혼 생활을 이어나갔다.


40대의 나는 여전히 안정을 찾지 못하였다. 감사할 것이 많다고 억지로 생각을 내 입에 욱여넣어왔지만, 내가 행복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사업도 외부적 요인들로 인해 힘들었고, 뉴질랜드는 경제 침체기이며, 언제 회복될지도 모르겠고, 비용은 높다. 아이들은 사춘기이고 나는 혼자의 시간이 많아졌다. 강아지가 한 마리 있으면 좋겠다. 내년에는 내가 살기 위해 강아지가 한 마리 있어야 할 것 같다. 산책도 나가야하니 운동도 되고, 강아지가 나를 바라봐주고 반겨주고 사랑해주니 정서적으로 많이 도움을 받을 것 같다.


10년 전 35살에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그때는 아이들도 어렸고,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외국 나라에서 살아가는 부담감도 컸고, 부부 사이는 최악이었다. 합의 이혼 서류에 도장을 다 받아놓고 마지막 이별의 대화가 될 것 같았던 어느 카페에서, 아이들을 위해 한 번 더 노력해 보기로 합의하고, 어렵게 결정한 것을 다시 엎어버렸다. 결국 그 서류는 책꽂이 어느 칸에 꽂혀 잊힌 존재가 되었다. 아이들에게 아빠를 뺏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니까. 나중에 그래도 최선은 다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 부부는 사이가 바로 좋아지지는 못했다. 나는 현실에 매우 불만족했고,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하였고, 늘 틀렸다는 식의 신앙적 훈계를 들어야만 했다. 나는 현실을 이야기했고, 그는 신앙을 이야기했다. 나의 우울증은 일을 하며 조금 나아지는 듯했지만, 회사를 그만두기 전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과호흡증까지 경험했다. 나는 이런 힘듦에서 완전하게 회복된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덮고 지나가고, 또 약간의 애잔함은 있어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그래, 남편으로부터 이해받으려고 노력하지 말자. 정서적으로 더 독립적이 되어보자 결심을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한다. 그러면 나에게 다시 힘이 생겨 회복이 된다. 하지만 다시 까먹고 그에게 의존하고 이해받으려고 기대한다. 그리고 다시 실망한다.


남편은 뉴질랜드에 온 후 3년간 백수생활을 했다. 남편이 2년 넘게 백수라고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 교민은 그렇게 오랫동안 일 안 하고 놀고먹을 수 있을 돈이 있다는 게 부럽다고 했다. 사실 집 이외 현금을 다 까먹을 때까지 놀았기 때문에 내 속은 다 타들어갔다. 어쨌든 그 후로는 남편이 백수인 것을 내 힘듦의 이유로 남에게 말하지 않게 되었다.


어쨌든 10년 전 나는 어리지도, 늙지도 않은, 무얼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30대 중반이었다. 나는 어느 유학원에서 행정 업무를 맡아 일을 하게 되었고 그럭저럭 밥은 먹고살았다. 이 시점에 이미 집과 자동차 외에는 아무런 자산이 없었다. 물론 주급만으로는 생활비가 모자랐고, 현금은 바닥이 났고, 그래서 엄마로부터 돈을 받아 쓰기도 했고, 정부에서 아이들 키우는 비용을 위한 세제 혜택을 받고, 방 4개짜리 집에서 방 2개를 플랫을 주어 돈을 조달했다. 이런 모든 일들은 내가 다 신청하고, 내가 알아보고, 광고 내고, 세팅을 한 것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그런 기적 같은 일은... 없었다.


물론 아이들 배 곯린 적은 없다. 소고기나 과일 등 먹거리는 부족하지 않게 살 수 있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해외여행 같은 건 가기가 힘든 생활이었다... 하긴 내가 돈 쓰는 게 야무지질 못하긴 하다. 쓸 줄만 알지 불리는데도 재주가 없고, 주식도 할 줄 모른다. 몇 번 해봤지만 잘 된 적이 없고.


결혼할 당시 남편은 외국회사 CE0였고, 회사에서 대주는 고급차와 운전기사가 있었고, 나는 신혼부터 사모님이었다. 나는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고, 좋은 차를 몰고 비싼 밥을 먹을 수 있는 처지였다. 살림을 할 줄을 모르니 주 2회 가사도우미가 집에 와서 청소와 반찬 만들기를 해주셨다. 그러니까 뉴질랜드로 오기 전까지만 해도 도우미 아줌마들의 도움을 받으며 편하다면 편할 수 있는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뉴질랜드로 오면서부터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사실 난 오고 싶지 않았다. 이미 90년대에 이민자들의 삶이 어떤지 봤으니까. 그래도 세월호 이후 한국 분위기는 너무나 침울했고 미세먼지로 숨이 막힐 것 같아, 나도 한국을 떠나고 싶기는 했다. 그래도 뉴질랜드로 오는 것이 크게 달갑지는 않았다. 나는 미국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남편이 설득하고 결정했다. 남편은 미국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어쨌든 시민권이 뉴질랜드에 있었으니 쉬운 방법을 택해서 오게 되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한국 살이가 힘들어서 외국을 고민하는 분들이 있다면, 가이드라인을 드려보겠다. 한국에서 먹고살 거리가 있다면 한국에서 성공하기 더 쉬우니 좀 참으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모든 면에서 한국만 한 나라가 없다. 아이들 공부 때문에 고민이시라면.. 고민이 되시겠지만... 삶의 터전을 옮겨서 성공하려면 익숙한 고국에서 성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나는 한국에 가서 살고 싶지만, 아이들이 여기서 계속 컸으니까 돌아가는 것도 쉽지는 않아 보인다.


내년에 또! 이사를 해야 할 생각에 벌써부터 정신이 피폐하다. (외국에서 이사를 해 본 사람만 이해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짐싸기와 풀기는 모두 직접해야 한다.)


하지만 내 팔자는 이렇게 계속 흘러가야 하는 물인가 보다... 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이사 때마다 마지막 이사이기를 바라지만, 아마도 이번 이사가 마지막이 아님을 난 잘 알고 있다.


예수님, 어서 오세요.

저 그만 살고 싶거든요.

이 세상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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