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번역 은퇴

안 할 수가 없는 AI시대

by Leah

'진단은 의사에게, 처방은 약사에게'

한국 의약분업이 언제쯤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그 당시 캐치프레이즈는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있다.

모든 일에는 전문가가 있고, 전문가가 전문 분야에서 일을 해야 좋은 품질을 보장할 수 있다.

글을 다루는 번역도, 말을 다루는 통역도 마찬가지...인데, 아니, 마찬가지였었다.


번역 시장의 판도는 이미 '번역은 AI에게, 검수는 번역가에게'로 바뀐 듯하다. 아니 어쩌면 검수도 이미 AI에게 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벌어질 일임은 알고 있었지만, 그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2022년 Chat GPT가 출시되고 얼마 후, 아마도 2023년 초 나는 번역을 시켜보았다. GPT 성능을 테스트해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 설교 통역 봉사를 맡게 되면서, 혹시 가능한지 한 번 볼까?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시켜본 것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왜 이렇게 잘하는 거야, 너? 성능 미쳤구나!


설교 스크립트를 일일이 한 문장 한 문장 번역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 그 기쁨이 대단했다. 기술의 발전이 감격스러웠다. 물론 틀렸거나 엉뚱하게 번역한 것은 없는지 잘 살펴보고 고쳐야 할 때도 있었지만, 매주 거듭할수록 지피티의 학습 능력은 빨랐고, 어떨 때는 손 볼 것도 없이 완벽한 결과물을 내주었다. 그렇게 주일 예배 때 우리 통역팀은 AI 번역 결과물을 통역기에 읽어주기만 하면 끝이었다. 손수 번역을 할 경우 5-6시간을 쓴다면 지피티로는 30분이면 충분했다. (무료 버전을 쓰고 있을 때라 한 번에 파일을 올리지 못하고 나눠 붙이느라 시간이 걸리곤 했다)


번역의 세계에서는 AI가 등장하기 전 기계번역에 상당히 오랫동안 공을 들여오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 쌓인 데이터들이 AI에 많이 feeding이 되었을 거라 상상은 한다. 기계번역을 설명하자면 간단하다: 트라도스와 같은 번역 소프트웨어에서 한 문장 한 문장 번역을 입력한다. 그리고 반복될 것 같거나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문장이나 구, 표현 단위로 저장할 수 있다. 그렇게 표현들의 데이터베이스를 손수 쌓았다가, 나중에 똑같거나 유사한 표현이 나타나면 예전에 저장되었던 번역 표현이 나타나기에 적절한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이런 데이터베이스는 번역가 한 명 한 명이 자기만의 지적재산을 쌓는 것이라 보면 된다. 공동 작업을 하는 큰 회사들의 경우,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해 고정된 표현을 쓰게 한다거나 하기도 한다. 공유 데이터베이스를 쓰는 경우는 매칭률 퍼센티지 (100% 반복, 90% 유사, 이런 식임)에 따라 번역 요율이 달라진다.


아마 한 6-7년 전부터 직접 번역하는 일이 줄어들고 $$$요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감수 일감이 들어오는 것을 눈치챘다. 이때만 해도 구글 번역의 수준은 능. 지. 처. 참.이었는데, 이 시절 아주 가끔 구글 번역 돌려놓고서는 나에게 감수해 달라고 한 에이전시도 있었다. 이런 경우는 감수가 아니라 새로 번역을 하는 것이기에, 다시 에이전시에게 이야기해서,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니 번역 요율을 나에게 맞춰달라고 요구하거나, 아니면 안 하겠다고 퇴짜를 놓는 식이었다.


뉴질랜드로 돌아온 2014년, 만약 타우랑가 아닌 오클랜드를 선택했더라면, 아마도 법원과 병원 통역으로 돈을 꽤 벌 수 있었을 것 같다. 물론 한국에서 전문 통번역가가 받는 요율을 생각하면 (통역 일당 백만 원) 뉴질랜드는 법원 통역도 시간당 45달러 선이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 일주일 내내 열리는 사건을 한다거나, 매일매일 법원 통역으로 스케줄이 꽉 찬다면 나쁘지 않은 수입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타우랑가에서도 법원 통역을 나가긴 했는데, 갈 때마다 그 숨 막히는 분위기가 힘들었다. 긴장해야 하고, 두뇌 풀가동해야 하고, 분위기 살벌하고, 실수하면 안 되고... 그렇다고 떼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통역은 조기 은퇴를 했다. 살면서 법원은 출생신고, 혼인신고 말고는 갈 일이 없는 게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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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FX로 생성한 법정 통역사 이미지]


아무래도 AI는 통역보다는 번역에 더 빨리 혁신을 가져왔고, 많은 번역가들을 다른 직업군으로 밀어 넣고 있다. 동시통역도 시간문제일 것이라 생각한다. 영어 음성 input을 한국어 문자 output으로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기술은 현재 기술력으로 이미 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이제 번역도 통역도 모두 조기 은퇴 칼바람각이다.


나도 그중 하나. 그런데 아쉽지 않다. 숙박업을 하고 있으니 일단 이걸로 먹고살아지니 족하다.


장인 정신으로 한 줄 한 줄 번역하던 모습은 이미 구시대의 것이 되어버렸다. 문학 분야 장인 정신 번역가라는 틈새시장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미 법률 서류나, 매뉴얼이나, 서신이나, 이력서나, 책 쓰기나, AI가 훨씬 더 정확하고 빠르다. 이미 졌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상대로 4대 1 승리를 거뒀을 때부터 정해진 길이었다.


AI가 생성해 내는 글과 영상이 쏟아지는 이 시대에, 내가 하나하나 타이핑해서 글을 쓰는 것이 꽤나 낭만이 있다고 느껴지는 시대가 되어버렸네.


안녕, 나의 옛 직업! 멀리 안나가!




(물론 아직도 온갖 공문서 공인 번역 가능해요. 관공서에 제출해야 하는 번역가 도장 딱~ 찍힌 그런 공문서 스멜이 필요한 것들이요. 그런데 이것도 몇 년 안 남은 일 같아요. 뉴질랜드 통번역협회 NZSTI 정회원입니다. 한영, 영한 번역 가능해요. 궁금하시면 이메일 주세요. leahgrace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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