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아줌마의 주책 떠는 옛이야기와 현재
이번 글은 생각나는 대로 적은 것이라 두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포인트도 딱히 없습니다. 아줌마 토크 듣는다 생각하고 생각 없이 편하게 보시면 돼요! 쉬어가는 페이지. 이 글을 적고 있는 한 인간을 조금 알아가는 페이지입니다.
40대 중반이 된 나는 작년 아버지 돌아가실 무렵부터 노안이 왔고, 이마 코너 쪽엔 흰머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내 나이에 엄마가 청소년 딸 셋을 데리고 뉴질랜드로 왔다. 원래 계획은 아버지도 오셔서 이곳에서 주유소라던가 뭔가 사업을 하시는 것이었지만, 월급이 꽤나 두둑했었을 것 같은 한국의 직장을 그만두지 못했고, 우리는 그렇게 유학생 가정처럼 기러기 생활을 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 말과 문화가 다른 나라에 아이들을 다 데리고 나가서 산 우리 엄마 용기가 새삼 대단했구나 느낀다.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엄마는 뉴질랜드에 있었던 그 90년대가 참 행복했다고 한다. 다른 집에 놀러도 가고, 다른 집이 우리 집에 놀러 오고, 엄마와 딸들이 모여서 깔깔거리고 참 많이 웃었던 그때. 인터넷이 없던 시절, 국제전화는 비싸니까 가끔 짧게 하곤 했고, 아빠에게 편지를 써서 국제 우편으로 부치곤 했다. 느렸지만 기다림의 설렘이 있었던 아날로그 시대, 감성의 시대를 살았다. 편지에는 뉴질랜드에서 배운 최신 표현들을 편지에 적어 알려드렸고,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미주알고주알 적어 편지를 주고받았었다. 참 귀여운 막내딸이었을 것 같다. 딸들에게 편지를 받는 소소한 즐거움이 있었을 아빠도 늘 답장을 해주셨는데, 그 많던 서신들은 언제 어떻게 버려져 없어졌을까? (엄마가 버리신 게 분명하다) 사진첩보다 더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없어져 못 보니 아쉽다. 또 아빠가 사주셨던 그 시대 워크맨, 전자사전, CD 플레이어는 90년대 내 청소년기 보물들이었다. 낭만이 있는 시대였다.
난 중고등학교는 뉴질랜드에서, 대학교는 한국에서 나온 케이스여서, 셀프 디스하는 의미로, '난 인생 너무 쉽게 살았다'라고 말하곤 한다. 뭐, 사실이니까. 한국의 입시지옥 안 겪어, 그런데 운 좋게 대학을 한국으로 갔고, 영어는 쉽게 얻어진 덤이야, 그러니 인생 어려운 걸 알았겠나. 운 좋게 북한 아니고 대한민국에 태어났고, 운 좋게 아빠는 대기업이 직장이었고, 또 운 좋게 강남 8 학군 좋은 환경에서 국민학교 나오고, 운 좋게 입시지옥 피하면서 뉴질랜드에서 중고등학교, 운 좋게 대학교는 한국에서. 노력보다는 환경이 나를 형성시켜 주었기 때문에 내가 내세울 것은 하나도 없다. 나에게 주어졌던 환경은 온실 속 화초처럼 보호되고 따뜻한 곳이었다. 내가 노력해서 환경을 극복한 그런 내러티브가 없는 것 같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이야기가 없네 그려. 어쨌든 고생 없는 초년운은 좋았던 것 같다.
90년대 뉴질랜드에서의 청소년기 나의 생활 모습은 대충 이런 것: 집 - 스쿨버스 타고 학교 - 버스 타고 다시 집 - 피아노 레슨 - 바이올린 레슨 - 영어 공부 자율 학습 (대견해!!) - 종종 친구네 집에서 자는 슬립오버 - 친구들과 시티에 나가 영화 보기 - 친구들과 노래방과 분식집 가서 놀고먹기 - 친구들과 도서관에서 공부 잠깐하고 쇼핑몰 돌아다니며 놀기 - 테이프 늘어지도록 음악 듣기 - 한국 드라마와 음악 프로그램 비디오테이프로 보기 - 밤새워 그림 그리기 (미술 과목) - 가끔 필 받으면 케이크 굽거나 요리하기 - 교내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연습 - 한국 무용 레슨 - 힙합 댄스 레슨 - 한인의 밤 부채춤 공연 참여 - 한인 성당 미사 가기 (그땐 가톨릭이었음) - 엄마 친구들 집에 저녁초대받아가서 밥 먹고 놀기. 굉장히 많이 놀았고 불만 없이 놀았다! 셀프 헤어컷, 셀프 염색, 화장하기 등 자유로운 청소년기를 보냈다.
2002년 대학 4학년, 학점과 취직에 전념해야 할 그 중요한 타이밍에 하필 한국일본 월드컵이 열렸고, 하필 내가 서강대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16강, 8강, 4강 진출의 승리를 거둘 때마다 학교 광장에서 떼거지로 신촌으로 걸어 내려가 연대, 이대, 서강대, 홍대가 만나 다들 미친 사람들처럼 춤추고 껴안고 노래 부르고 장난도 아니게 재미있었다. 아마 그 시절 신촌이 제일 재미있었을 것이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각자 대학 정문을 나와 신촌 거리로 쏟아져서 도로를 점령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재미있는 전 국민 연합대회는 절대 없을 것 같다. 취직해야 했던 시기엔 취직도 잘 되었었고, 그때까진 인생이 만만했다. 연줄이나 인맥은 없었지만 그 시절만 해도 영어 잘하는 게 좀 대단한 시절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나도 이제 늙는 입장이 되고 보니, 젊음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나, 나도 그럴 때가 있었지... 하며 회상하곤 한다. 나도 참 반짝반짝했었지. 시선을 받는 것과 작업 거는 남학생들이 성가셨던 20대 초반의 나는 길었던 머리를 단발로 치고 헤어졌던 첫사랑과의 커플링 반지를 일부러 끼고 다님으로써 좀 더 자유해졌던 기억까지. 어리고 예쁘니까 툭툭거리든 툴툴거리든 그게 매력이라며 주변을 맴돌던 사내들. 얘들아, 그리고 오빠들아, 고마웠다! 외모가 한물 간 40대 아줌마에겐 그런 추억거리가 조금은 위안이 돼. 그리고 내 마음 줄 생각도 없으면서 너희들 마음 사용해서 차 얻어 타고 밥 얻어먹고 선물 받고 시험 전에 노트와 족보 받고 그랬어. 미안해!
2006년 외국계에서 일하던 나는 직장 상사와 연애를 하고, 2008년 대학원에 입학하고, 2009년 (뭐가 그리 급했을까) 결혼하고, 2010년 만삭의 배를 안고 졸업 논문을 썼고, 그렇게 커리어로는 별 재미를 못 보며, 아이 키우는 거의 전업 주부로 살기 시작했다.
2014년 아이들이 네 살, 한 살일 때 남편과 함께 온 식구가 뉴질랜드로 와서, 지금까지 이렇게 10년 넘게 살고 있다. 처음엔 타우랑가에 정착해서 아이들을 기독교 학교에 보냈고, 코로나가 터지면서 수입이 끊겨 막막했던 우리는 코로만델 반도지역에서도 커시드럴코브가 있는 하헤이 마을에 놀러 갔다가 매물로 나온 비치리조트를 덜컥 오퍼하고 갑작스럽게 숙박사업을 하게 되었다.
관광지이자 키위들이 애정하는 북섬 별장 동네 하헤이는 집이 너무나 비쌌고 렌트집이 단 한건도 없었다. 그렇다고 모텔에서 살림집을 하기엔 네 식구에겐 너무 좁았다. 거주 문제를 해결을 못하는 답답한 상황 속에 결국 2022년 4학기에 타우랑가로 다시 돌아갔다. 그렇게 2024년 4학기까지 만 2년 조금 넘게 있다가, 남편과 떨어진 채로 앞으로 둘째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6년을 더 보낼 자신이 없어졌고, 또 그래서도 안될 것 같아 사업장에서 차로 삼십 분 거리인 휘티앙가 마을로 이사했다. 학교와 기반 시설 때문이었다. 타우랑가 집은 렌트를 줬다가 2달 만에 철회하고 매물로 내놨는데 아직까지 안 팔리고 있다.
내년 2026년은 우리 가정에 새로운 챕터가 될 것 같다. 그 방향은 마음이 평안한 방향이다. 이제 답을 얻었으니 믿음으로 나아가리. 내가 어두움에 있었고, 도움이 필요했고, 요청했고, 남편이 응해주었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는 어두움에서 나왔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