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에드먼턴과 캘거리 사이 레드디어라는 도시에서 노트북을 열어 글을 쓰고 있다. 집과 5시간 정도 떨어진 이곳은 신랑이 주말 동안 일을 하는 곳이다. 어쩌다 서로의 스케줄이 맞을 때면 이렇게 '나만의 캐리어'를 끌고 신랑을 따라 출장길에 나선다. 지금까지 한 번도 혼자 여행을 해본 적이 없으니 '나만의 캐리어'란 말은 아주 럭셔리하고 사치스러운 행복한 단어다.
그동안 우리는 5명의 여행짐을 2개의 캐리어에 꾹꾹 눌러 담았고, 그게 늘 당연했다. 내 여행가방에 나만을 위한 물건을 담는다는 건 과거 20년 동안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가벼운 나의 발걸음에 맞춰 반려견처럼 따라오는 작고 귀여운 캐리어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2박 3일 짐을 기쁨으로 챙겨보았다.
잠옷(가족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선 잠옷은 생략, 운동복 바지와 티셔츠가 잠옷이자 활동복이었다.)
헤어세팅기(아이 셋에 남편까지 챙겨야 하는 여행에서 거울 보고 예쁘게 꾸밀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는다, 머리 질끈 묶고 언제나 출동 준비)
노트북(예전에는 여행품목에 들어가지도 못했던 녀석이다.)
태블릿(호텔방 침대에 누워 드라마 보기 전용이다.)
전자책 리더기(혼밥은 못해도 혼카페는 할 수 있다. 나에게도 분위기 있게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시간이 돌아왔다.)
신랑을 따라 레드디어에 오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나와 집을 분리시키기 위해서다. 집안일을 다 끝내놓고 책 좀 읽으려고 앉으면 신기하게 숨은 컵 찾기의 달인이 되어 구석구석 잘도 숨겨놓은 컵들과 빨랫감들이 눈에 들어온다. 게다가 노안임에도 불구하고 카펫 사이에 낀 먼지까지도 속속들이 들여다 보이니 참 신기한 일이다. 그것들이 눈에 밟혀 책을 읽을 수가 없어 결국 집안일을 시작하게 된다.
글 좀 써볼까 하고 노트북을 열고나면 아차차 깜빡 잊고 있었던 해야 할 일들이 공상과학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스크린 위로 3D처럼 솟아올라 겨우 의자에 붙여놓았던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든다.
하지만 레드디어에서는 신랑이 출근하고 나면 넓은 호텔방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다. 설거지를 할 필요도 청소기를 돌릴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이 나의 시간으로 남겨진다. 주말 없이 일하는 신랑에게는 참 미안한 일이지만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아이들을 위해 발간한 음악 동화책들도 이런 시간이 없었다면 결코 마무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복도 오래가지는 못할 것 같다. 퇴근 후 저녁시간 신랑이 재미있는 아니 황당한 제안을 했다.
"우리 나이 들면 이렇게 살자. 내가 은퇴하면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거야. 캐나다 구석구석 환자도 만나고 여행도 하고. 어때? 멋지지? 내가 일할동안 당신은 여행 블로그 쓰고 저녁에는 같이 나가서 관광도 하고"
김칫국부터 마시는 신랑이게 '꿈 깨시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 혼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 게 미안해 대충 장단을 맞춰 주었다.
"오! 좋다!"
"글 많이 쓰고, 동화책도 많이 만들면 나 멋진 집 사주는 거야?"
"응? 나 지금 0.01센트 입금되는데, 은퇴하고 꼬부랑 할머니 돼도 집 못 사줄 것 같은데...."
역시나, 숨겨두었던 속내가 있었다. 어쩌나? 신랑의 터무니없는 은퇴 계획에 갈 곳을 잃는 나의 눈빛과는 달리, 멋진 집을 상상하는 못쓸 나의 단순함이라니... 글쓰기 수업이라도 등록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만 나이들 수 있다면,
나만의 캐리어를 싸는 시간이 자주 생길 수 있다면,
조용히 나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는 시간이 자주 생긴다면,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