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은 시간. 딸아이의 도어벨 알림이 떴다. 잭슨(남자 친구)이 나가며 90도로 꾸뻑 인사를 한다.
"안녕히 계세요" 정원을 가로질러 펜스 앞에서 뒤를 돌아보고 또 꾸벅 인사를 한다. "안녕히 계세요"
한국인인 여자친구를 위해 열심히 한국어로 인사를 하는 착하고 따뜻한 아이다.
3년 동안의 사귐을 마무리하며 부모님들에게 까지 깍듯이 인사하는 법을 잊지 않은 착하고 순순한 아이이다. 무슨 일 때문에 헤어졌는지 알 수 없다.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자꾸 뒤돌아보는 잭슨의 뒷모습에서 눈물이 보인다.
오늘은 어떤 문자도 받고 싶지 않다는 딸아이의 문자 속에서도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
첫 남자친구와의 첫 이별.
그리고 이별을 마주하는 딸을 보는 나도 이 상황이 어색하기만 하다.
출근길 이별소식을 접한 신랑의 뒷모습도 마치 당신이 실현당한 것만큼이나 쓸쓸한 뒷모습이다.
아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공허할지 알기에 신랑과 나 둘 다 오늘 하루가 마비돼 버렸다.
여름 산불 시기에만 발효되는 Air Quality Adviser가 깜빡인다. 알버타 공기도 이 여리고 젊은 아이들의 상처를 아는지 무겁게 내려앉았다.
K드라마를 보면 온갖 역경과 상황을 뚫고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가슴 아프고 절절한 사랑이야기가 넘쳐난다. 재미있게 보아왔던 이 사랑이야기가 지금의 딸아이에게 조금은 도움이 될까? 젊은 날의 뜨거운 사랑과 헤어짐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로서는 어떻게 아이를 위로해 줘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습관 때문인지 자꾸 잘 지내던 아이들이 왜 해어졌을까에 집중하게 된다.
3월에 계회된 잭슨 가족여행에 딸아이가 초대받았는데 내가 반대해서 그랬을까? (아무리 개방적인 캐나다에 살고 있다고 해도 남자친구 가족 여행에 딸아이를 딸려 보낼 만큼 나의 문화는 개방적이지 못했다.)
밤늦은 시간 딸아이의 귀가를 재촉하며 방어했던 한국 부모들의 고리적 사고방식에 두 아이가 지쳤을까?
너무나 차이가 나는 두 집안의 경제적 갭이 이별의 원인이 됐을까?
내가 영어를 못해서 그런 걸까?
가도 가도 너무 멀리 엄한 방향으로 생각이 흘러간다. 아이들의 이별까지도 나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모습이 한심하다.
두 번째 이별, 세 번째 이별, 세 아이가 번갈아 가며 이별과 만남을 반복할 때 어른인 난, 엄마인 난 어떻게 아이들 옆을 지켜줄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시간이 지나면 점점 옅어지는 상처라지만 지금의 이 만남과 헤어짐이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추억과 성장으로 남기를 바라는 건 엄마라는 자리의 이기적인 욕심일까?
50이 되면 모든 상황에 익숙한 삶의 중년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이들이 겪고 있고, 겪어나갈 모든 상황에 엄마로서의 따뜻한 조언정도는 해줄 수 있는 삶의 선배가 되어 있을 거라 자만했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잭슨의 뒷모습이 눈에 밟혀 마음이 아려온다. 아이들의 친구들이 모두 내 자식같이 느껴지니 중년인 나는 더 단단하고 넓은 마음을 소유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