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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패미로얄 Nov 21. 2023

딸아이에게 남친이 생겼다

"엄마. 나... 남자친구 생겼어. 엄마한테는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서"


18살 이제 막 대학생이 된 딸아이에게 첫 남친이 생겼다. 물론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복잡하게 밀려드는 나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아니, 솔직히 복잡한 나의 감정이 얼굴에 어떻게 비치고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혹시나 아이가 기대하던 반응이 아니어서 '다시는 엄마한테 이야기 안 해!'라고 생각하게 될까 봐 슬그머니 눈길을 피했다. 재빨리 머릿속 기억들을 헤집으며 그동안 들어왔던 딸아이의 친구들 이름과 얼굴을 매칭해서 건져 올렸다. 

'미카? 키런? 휴? 잭슨? 탐? 누구지? 이중에 한 명인가?' 딸아이 주변에는 한국인 친구들이 없다.

"혹시 잭슨이야?" 대화 속에서 딸아이가 유독 많이 언급했던 녀석을 꼭 집어서 물어보었다.  

"응. 맞아! 잭슨 엄청 똑똑해. 운동도 잘해. 고등학교에서도 하키 선수였고 스키도 잘 탄데. 그리고 공부도 잘해서 내가 화학 시험 볼 때 엄청 도움 받았어. 그리고 진짜 착해. 마치 자기가 엄마인 것처럼 친구들도 많이 챙겨주고  특히 나한테 너무 잘해줘."

남자친구 사귀면 공부하는데 방해된다고 잔소리라도 할까 봐 선수를 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주절주절 잭슨 자랑을 늘어놓았다. 

"크리스마스 때 우리 집에 인사 오고 싶데. 오라고 해도 되지?" 


우리 아이들의 첫 데이트 상대가 한국인이 아닐 거라고는 늘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순간을 맞닥뜨리고 나니 걱정이 앞섰다. 나의 짧은 영어실력을 한탄하며 첫아이의 모든 성장과정에 난 매 순간 준비되지 않은 초긴장상태의 초보엄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의 첫 유치원 입학식, 아이의 첫 할로윈 파티, 아이의 첫 캠프, 아이의 첫 입시, 아이의 첫 대학생활, 아이의 첫 독립, 그리고 아이의 첫 남자친구까지 모든 것이 나에게도 처음이었다.

"진아. 엄마도 잭슨 좋아해. 엄마 기억에 잭슨은 첫인상이 참 좋은 아이였던 것 같아. 남자 친구로 시작하는 것도 좋지만 정말 신중하게 생각하고 신중하게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 같아. 만약 너랑 잭슨이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면 다행이지만 중간에 안 좋게 헤어 지기라도 한다면 너희 친구들이 모두 힘들어할걸? 너도 좋은 친구를 잃는 거고." 딸아이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우리 진이가 마음은 안 그래도 항상 말을 직설적으로 하잖아. 너도 알지? 원래도 좋은 친구사이였지만 잭슨이랑 대화할 때 배려 하면서 이야기하고, 늘 존중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앞으로는 더 잘해야겠다. 그렇지? 엄마는 너랑 잭슨이 오래오래 아주 예쁘게 만났으면 좋겠어."

나도 잘 모르겠다.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나 조차도 남편을 배려하며 존중하는 말을 잘 못하면서 이제 막 시작하는 어린 딸에게 무슨 말을 한 건지...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일들을 겪으며 울고 웃고 할 우리 딸에게 난 제대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아이들이 성장해 가는 시간 동안 나는 늙어간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이들이 성장해 가는 속도에 맞춰 나는 성숙해져야 했다.  거울을 보며 흰머리가 늘어가는 걸 체크하는 게 아니라 나의 내면을 바라보며 내가 나이에 맞게 찐하게 맛들어가고 있는지를 확인했어야 했다. 딸바보 남편은 늘 농담반 진담반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 진이가 어떤 이상한 오징어 같은 녀석을 달고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총을 한 자루 사야겠어. 제대로 정신 박힌 녀석이라면 각오하고 만나겠지!" 

남편이 이야기하는 오징어 같은 녀석은 어떤 부류의 아들인지, 또 그가 가져야 할 각오가 정확하게 어떤 각오인지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분명 영화에서처럼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그런 사이는 용납할 수 없다는 진중함이었을 것이다. 


10년 전 가깝게 지내던 언니네 예고도 없이 간식거리를 사들고 깜짝 방문을 한 적이 있었다. 거실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흠칫 놀라 잠깐이지만 일시정지 상태가 되었다. 거실 소파에 대자로 누워 영화를 보고 있던 예수님 같이 생긴 청년이 우리를 보고는 누워서 손을 흔들며 "Hi~"하며 해맑게 웃는 것이 아닌가.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갈색의 장발 곱슬머리에 멋진 턱수염까지. 소파에 누워있는 것 빼고는 그림책에서 보았던 정확하게 닮은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헉. 언니! 언니집에 예수님이?" 언니는 우리의 반응이 웃기다는 듯 배꼽을 잡고 깔깔거리며 딸의 남자친구를 소개해주었다. 역시나 그의 별명이 예수님이라며 연신 즐거워했다. 

"얘 생긴 게 서양인 같지 입맛은 완전 한국인이야. 한국음식 잘 먹어서 이뻐죽겠어~" 

그저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머지않아 우리 집 소파에도 어떤 녀석이 어떤 모습으로 누워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엄마 아빠에게 남자친구, 지금의 신랑을 인사시키던 날, 두 분의 기분이 어떠했을지 이제야 궁금해졌다. 한창 연예 중이었던 그 당시, 부모님은 신랑이 다니던 대학교를 지나가다 신랑을 불러내 뜬금없이 밥을 사 먹이며 이런 말씀을 하셨단다.

"공부를 하려면 체력이 튼튼해야 해. 잘 챙겨 먹고 다녀야지! 후루룩 먹고 한 그릇 더 먹어" 

그 당시 극도로 이성적 사랑에 이기적이기만 했던 나는 엄마의 마음도 아빠의 마음도 헤아릴 줄 몰랐다. 첫딸아이의 남자친구를 대면한 그분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내 딸이 좋아한다니 보고 또 보며 신랑의 예쁜 면을 찾으려고 노력하셨을까? 내 딸이 좋아한다니 덮어두고 모든 것이 다 예뻐 보였을까?


기숙사로 복귀하는 아이를 위해 한국식품점에 들려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쇼핑하던 중 쌀국수 컵라면이 눈에 들어왔다. 밤늦게 공부하다 함께 컵라면을 끓여 먹었는데 라면이 너무 맵다며 잭슨이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이의 옷가방과 함께 간식거리를 챙겨보내며 신랑에게 들리지 않게 조용히 딸에게 귓속말을 했다.

"쌀국수 컵라면 넣었어. 공부하다 출출하면 잭슨이랑 먹어. 이건 안 매울 거야."

얼굴 한번 본 적 없고 사진으로만 봤던 잭슨이 갑자기 그냥 귀엽고 사랑스러워졌다. 우리 엄마도 그랬을까? 그래서 지나가다 무작정 불러내 신랑에게 밥을 먹였을까?

그나저나 정말 크리스마스 때 우리 집에 오면 어쩌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 나는 역시나 늘 초보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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