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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패미로얄 Aug 11. 2023

엉클 벤

둥글둥글 늙어가고 싶다


요즘 <인턴>이라는 영화로 쉐도잉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 은퇴한 벤(Ben)이 시니어 인턴으로 다시 벤처 회사에 입사하면서 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따뜻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엇이든 해낼 것 같은 혈기 왕성하고 능력 있는 젊은 사람들 속에서 벤은 인턴 생활을 시작한다. 40년 동안 비즈니스맨으로 살아온 그의 눈에는 회사의 어린 직원들이 단지 동료로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미치 깨닫지 못했던 허점들과 연약한 점들이 벤의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인생의 여유와 경험을 바탕으로 그들을 돕기 시작한다. 

벤의 대사 중 "You know, I feel like everyboby's uncle around here."이라는 대목이 있다. "내가 모든 사람들의 삼촌이 된 느낌이야." 언제나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돌봐주는 삼촌이 된듯한 영화 속 벤의 모습을 보며 문득 현실 속 누군가가 떠올랐다.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먼저 다가오는 분.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정확히 알고 슬그머니 도움을 주는 분. 늘 인자한 할아버지 웃음으로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하는 분. 생각해 보니 우리 시골마을에 그런 분이 계신다.


70세가 훌쩍 넘으신 맥피 할아버지는 타운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법한 아주 큰 비즈니스를 운영하고 계신다. 그분을 처음 뵈었을 때의 인상을 단어로 표현한다면 <둥글둥글>이다. 얼굴도 둥글, 눈도 둥글, 코도 둥글, 터질 것 같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할아버지의 배도 둥글둥글. 360도 뺑 둘러보아도 어디 하나 모난 곳 없이 부족한 것 없이 아주 완벽하게 둥글둥글했다. 말을 심하게 더듬으시는 부분만 빼면 완벽한 분으로 보였다. 첫 한 음절 입을 떼기 위해 입술과 머리에 심한 경련을 일으키셨고 이렇게 겨우 한 문장 말씀하신 후 또 다른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이런 과정을 계속 반복하셔야 했다. 처음에는 이분과 대화할 때 어디에 눈길을 두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말씀을 마무리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맞는 건지, 내가 먼저 눈치껏 할아버지가 말씀하고자 하시는 내용을 말씀드리고 'yes' 또는 'no'로 대답하시기 쉽게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 건지 무척이나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우리 타운 그 누구도 그분의 이런 장애를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맥피 할아버지는 마치 이 마을의 엉클 벤 같은 분이기 때문이다. 늘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다가와 둥글둥글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시고, 어린아이가 할아버지께 말을 걸었을 때에도 한 번도 그냥 무심히 지나치시는 법이 없으셨다. 영화 속 엉클 벤처럼 말이다.


할아버지의 연세만큼 그분과 얽힌 이야기도 참 많다. 작년 겨울, 어떤 아주머니가 타운 페이스북에 감사의 글을 올렸다. 사람이 드문 지방도로를 운전하던 중 트럭이 눈에 미끄러져 도로를 벗어나 도랑에 바퀴가 빠져서 오도 가도 못하고 눈에 갇히게 되었다. 인적 없는 도로에 눈은 펑펑 내리고 있었고 그녀는 혼자였다. 본인의 위치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든 상황에서 남편에게 전화를 건후 망연자실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맥피 할아버지가 다가와 다치지는 않았는지, 많이 놀라지는 않았는지 확인한 후 번개같이 트럭을 도랑에서 꺼내 주고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넬 틈도 없이 사라 지졌다고 한다. (할아버지 직업상 지방도로를 운전하시는 일이 많으시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함께 교회에 다녔던 친구의 이야기다. 싱글 맘으로 월요일부터 주일까지 쓰리잡을 뛰며 두 아이이를 키우고 있는 필리핀 친구는 어느 날 갑자기 차가 고장 나 일을 나갈 수가 없었다. 대중교통수단이 없는 우리 마을에서 자동차가 망가졌다는 것은 집에 고립된다는 뜻이다. 모든 프로세서가 거북이 기어가듯 느린 캐나다에서 차를 하루 이틀 만에 고칠 수도 없고, 당장 일을 하지 않으면 생계에 지장이 생기는 친구의 입장에서는 아찔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친구는 그날 더 좋은 차로 출근을 할 수 있었다. <맥피 컨스트럭션> 마크가 딱 붙은 멋진 트럭을 타고 말이다. 그녀는 차가 수리될 때까지 할아버지의 회사 트럭을 사용했다.


타운에 몇 안 되는 한인가정 중에도 그분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었다. 대학교 졸업 후 혼자 캐나다에 건너와 워킹비자로 열심히 일하면서 성실한 남자를 만나 결혼까지 한 나와 가까이 지냈던 동생의 이야기다. 그녀가 이곳에서 처음 일했던 곳은 DQ 패스트푸드점이었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면 식사금액의 10%에서 15% 정도의 금액을 서빙하는 직원들을 위해 팁으로 지불하는 것이 캐나다의 문화이다. 하지만 맥도널드나 버거킹, DQ와 같은 패스트푸드점에서는 아무도 팁을 지불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빨리 주문해서 가볍게 먹는 패스트푸드점이기 때문이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영주권을 받기 위해 주말도 반납하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그들에게 맥피 할아버지는 주문과 함께 꼭 현금으로 팁을 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늘 햄버거 하나를 주문하면서도 직원들과 눈을 맞추고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누는 걸 잊지 않으셨다고 한다. 친구처럼 가족처럼 살갑게 다가와 그들의 삶에 귀를 기울였기에 모든 직원들이 냅킨 한 장을 건네드려도 정성을 담아 드렸을 것 같다. 동생과 할아버지의 짧은 대화였다.


할아버지 : 헬로! 요즘 어떻게 지내? 잘 지내고 있지? 

동생 : 네. 잘 지내고 있어요. 저 결혼해요. 결혼준비하느라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할어버지 : 정말? 축하해!


며칠 후 일부러 다시 들리신 듯한 할아버지는 동생을 찾아 하얀 봉투를 건네셨다. 봉투 속에는 카드와 함께 결혼 축하금이 담겨 있었다. 외국에서 받아본 첫 따뜻함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와 봉투를 들고 할아버지 앞에서 엉엉 울어버렸다고 했다. 


우리 가족도 맥피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아주 오래되고 낡은 RV를 구입하고 세 아이들을 포함 우리 가족은 첫 캠핑을 떠날 생각에 하루종일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었다. 캠핑장까지 골동품 RV가 사고 없이 무사히 도착해 주기만을 바랐는데 사건은 엉뚱하게 우리 트럭에게 생겼다. RV를 끌고 가야 할 트럭이 푸덕거리기 시작하면서 좀처럼 앞으로 나가질 못하는 것이었다. 무거운 트레일러를 끌기에는 트럭의 연세가 너무 많았던 모양이다. 결국 텐트캠핑으로 계획을 변경하고 풀이 죽은 아이들을 설득하고 있는데 우연히 맥피 할아버지를 만났다. 즐거운 캠핑을 시작부터 이렇게 망칠 수 없다며 할아버지는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그분의 최고급 새 트럭을 선 듯 내어주셨다. 차 이름과 브랜드도 잘 구분 못하는 나로서는 어떤 트럭인지 아직도 알 수 없으나, 캠핑하는 동안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우와! 나이스 트럭!"이라고 이야기하며 신랑과 트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걸 보면 분명 남자들은 금방 알아차릴 만한 멋진 트럭이었나 보다. 생각해 보면 너무 웃긴 광경이었을 것 같다. 엄청 멋진 트럭뒤에 당장 부서져도 이상할 것 없는 낡은 RV라니 말이다. 덕분에 우리는 여름에도 영하로 떨어지는 캠핑장에서의 추운 밤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고 아이들과 즐거운 추억을 남길 수 있었다.


타운에 무슨 일이 생기면 누군가가 하늘에 맥피 할아버지만 볼 수 있는 배트맨 사인 같은 시그널을 그분께 보내는 걸까?

시골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그분을 조금 더 알아가면서 어떻게 늘 도움이 필요한 자리에 계셨는지 영화 속 벤의 모습을 보며 그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곳, 그리고 내가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주저 없이 "Yes"라고 답하고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들의 난처한 상황들, 또는 기쁜 소식을 나도 들었고, 너도 들었고, 우리 모두가 들었지만 우리가 주저하고 머리를 굴리는 동안 맥피 할아버지는 제일 먼저 그곳에 달려갔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우리 타운에는 맥피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참 많은 엉클 벤 같은 분들이 계신다. 연세가 많으신 만큼, 경험이 많으신 만큼, 또 경제적으로 안정된 만큼 그분들의 방법대로 커뮤니티를 돌보고 계신다. 예전에 나의 노후를 상상할 때면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우며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고 취미생활을 즐기는 럭셔리한 나의 모습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시골생활을 시작한 후로 커뮤니티 속에서 어른의 역할을 감당하시는 많은 시니어 분들을 만나며 노후에 대한 나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분들처럼 나이 들고 싶다. 

둥글둥글,

멋지게, 

누가 어느 곳으로 다가와도 나의 모난 곳에 상처받고 찔리지 않게,

살포시 나에게 머리를 기대도 나의 경험과 인품과 둥근 삶 덕분에 상대방이 편안히 기댈 수 있도록,

가까이 다가와 나를 끌어안아도 누구나 품을 수 있게 푹신하고 둥근 모습으로 나이 들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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