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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내 인생 2막은 정신분석-3화

by 홍종민

교수님이 동갑이다, 그리고 수박장수가 우주박사가 되다


충격적인 첫 만남: 상징적 권위의 붕괴


학기 3주차 목요일, '현대 정신분석' 수업을 맡은 새 교수가 들어왔다. 캐주얼한 차림에 백팩을 멘 모습이 젊어 보였다. 청바지에 체크 셔츠, 스니커즈 차림이 대학원생처럼 보였다. '40대 초반인가?' 생각하며 인사를 했다.

강의실 문이 열리고 그가 교탁에 서자, 학생들이 조용해졌다. 그는 백팩에서 노트북을 꺼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 학기 현대 정신분석을 맡은 김준영입니다. 1973년생이고요..."

잠깐. 1973년생?

나와 동갑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불쾌(Unlust)'의 경험이었다. 정신 장치가 항상성을 유지하려 하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그 균형을 깨뜨린 것이다.

나는 서열 의식이 있다. 잘 고쳐지지 않는다. 25년간 직장에서 직급과 연차로 서열을 매기며 살았으니 당연하다. 부장-차장-과장-대리-사원. 이 명확한 위계질서가 내 삶의 틀이었다.

라캉의 용어로 말하면, 이것은 나의 '상상계적 동일시(imaginary identification)'였다. 나는 위계질서라는 거울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했고, 그것이 나의 자아를 구성했다. 그러다 보니 영화 <클래스>에서 교수와 학생의 경계가 무너지는 장면을 볼 때마다 불편했다. 권위는 지켜져야 한다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대학원에서 그 권위가 산산조각 났다. 이것은 라캉이 말하는 '상징적 거세(symbolic castration)'의 순간이었다. 아버지의 법(Law of the Father)이 무너지는 순간.


헤겔과 라캉: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김 교수는 칠판에 '욕망의 변증법'이라고 쓰며 수업을 시작했다.

"오늘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라캉이 어떻게 재해석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자기의식의 발전 과정을 보여준다. 두 자기의식이 만나 생사를 건 투쟁을 벌이고, 죽음을 두려워한 쪽이 노예가 되고 그렇지 않은 쪽이 주인이 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노동을 통해 사물을 변형시키는 노예가 진정한 자기의식을 획득한다.

라캉은 이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재해석한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상상계적 관계다. 서로가 서로를 거울삼아 자신을 구성한다. 주인은 노예의 인정을 통해서만 주인이 되고, 노예는 주인의 욕망을 통해서만 자신의 욕망을 발견한다.

그의 강의는 유려했다. 복잡한 개념을 쉽게 풀어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하지만 나는 집중할 수 없었다. 계속 '1973년생'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저항(resistance)'이었다. 무의식적 내용이 의식으로 올라오려 할 때, 자아가 그것을 막으려는 방어 기제. 나는 '동갑 교수'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호칭의 딜레마: 상징계의 혼란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하나둘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가방을 챙겼다. 그때 김 교수가 나에게 다가왔다.

"홍 선생님이시죠? 이력서 봤습니다. 저랑 동갑이시네요."

그의 목소리는 친근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아, 네... 교수님."

"에이, 교수님은 무슨. 그냥 편하게 하시죠."

편하게? 어떻게? 반말? 하대? 형님? 아니면 친구?

이 순간은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의 구멍(hole in the Symbolic)'이었다. 언어가 현실을 완전히 포착하지 못하는 지점. 우리 관계를 규정할 적절한 기표가 없었다.

나는 당황했다. 25년간 직장에서는 간단했다. 직급이 높으면 '님'을 붙이고, 낮으면 직급만 부르면 됐다. 나이가 많아도 직급이 낮으면 존댓말을 써야 했고, 나이가 어려도 직급이 높으면 깍듯이 모셔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럼... 김 교수님?"

"수업 시간엔 그렇게 부르시고, 밖에서는 그냥 '준영 씨'라고 하세요."

준영 씨? 동갑 교수를 이름으로?

나는 <대부>의 마이클 콜레오네처럼 신중하게 대답했다. 섣불리 행동하면 안 된다. 일단은 거리를 두고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일단... 교수님으로 부르겠습니다."

김 교수가 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이해와 배려가 담겨 있었다.

"역시 직장 생활 오래 하신 분답네요. 서열 정리가 확실하시네. 괜찮아요, 천천히 적응하세요."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의 불편함을.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것은 위니컷(Winnicott)이 말하는 '안아주는 환경(holding environment)'이었다. 상대방의 불안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

프로이트와 라캉 사이에서: 아버지 살해의 재해석

4주차 수업이었다. 김 교수는 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Totem and Taboo)』를 설명하고 있었다.

"원시 부족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 죄책감으로 토템을 만든다는 이야기, 다들 아시죠? 이것을 라캉은 어떻게 해석했을까요?"

프로이트의 원시 부족 신화는 이렇다. 전제적 아버지가 모든 여자를 독점하자, 아들들이 연합해 아버지를 살해한다. 하지만 살해 후 죄책감에 시달리고, 아버지를 토템으로 숭배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문명과 종교, 도덕의 기원이다.

한 젊은 학생이 손을 들었다.

"아버지의 이름(Nom-du-Père)으로 설명하지 않았나요?"

"맞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이 아버지 살해가 상징적 차원에서 일어난다는 거예요. 실제로 죽이는 게 아니라..."

라캉에게 '아버지의 이름'은 상징적 기능이다. 그것은 어머니와 아이의 이자 관계에 개입하는 제3항이다. 이 개입을 통해 아이는 어머니와의 상상적 융합에서 벗어나 상징계로 진입한다. 아버지의 이름은 금지와 법을 대표하지만, 동시에 욕망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때 나는 손을 들었다.

"회사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김 교수가 관심을 보였다. "어떤 의미에서요?"

"신입사원들이 처음엔 상사를 우러러보다가, 나중엔 그를 넘어서려고 하죠. 실제로 해고시키는 건 아니지만, 마음속으로는..."

"훌륭한 통찰입니다!" 김 교수가 칠판에 도식을 그리기 시작했다. "조직에서의 아버지 살해. 이거 재미있는 주제네요."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승화(sublimation)'의 예시였다. 원초적 충동(상사를 제거하고 싶은 욕망)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형태(경쟁과 승진)로 전환되는 것.


술자리의 진실: 전이와 역전이


학기 5주차 금요일, 김 교수가 수업 후 제안했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으세요? 동갑이니까 소주 한잔하죠."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 궁금했다. 동갑이 어떻게 교수가 됐는지. 그리고 왜 나같은 늦깎이 학생에게 관심을 보이는지.

이것은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전이(transference)'의 시작이었다. 전이는 과거의 중요한 인물에 대한 감정을 현재의 누군가에게 옮기는 현상이다. 하지만 라캉은 전이를 더 넓게 본다. 그것은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subject supposed to know)'에 대한 관계다.

학교 근처 '청춘포차'였다. 대학가답게 시끄럽고 활기찬 분위기였다. 우리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여기 주인아저씨가 제 논문 지도교수였어요." 김 교수가 웃으며 말했다.

"뭐? 교수가 포차를?"

"은퇴하고 하고 싶은 걸 하신대요. 원래 술을 좋아하셨거든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교수도 은퇴하면 포차를 하는구나. 나도 은퇴했는데 대학원에 왔고.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운명의 반복(repetition of fate)'이었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반복한다. 다만 형태만 바꿀 뿐.

소주가 나왔다. 김 교수가 먼저 따랐다.

"선배님, 받으세요."

"선배님이요?"

"나이로는 동갑이지만, 인생 경험으로는 선배시잖아요."

그는 진심이었다. 나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첫 잔을 비우고 김 교수가 먼저 고백했다.

"사실 저도 직장 생활 했었어요. 10년간 대기업 다니다가 때려치우고 공부했죠."

"어느 회사였어요?"

"S전자였어요. 반도체 개발팀."

나는 놀랐다. S전자라면 대한민국 최고의 회사 아닌가.

"왜 그만두셨어요? 거기면 지금쯤 임원 달았을 텐데."

김 교수가 씁쓸하게 웃었다.

"홍 선생님이랑 반대예요. 저는 30대 중반에 의미를 잃었어요. 승진, 연봉, 다 무의미하더라고요."

"무의미하다니... 그게 전부인데."

"그렇게 생각했죠. 처음엔. 매일 새벽 2시까지 일하고, 주말도 없이 살았어요. 과장 달고 나니 뭔가 허전하더라고요. '이게 다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50에 깨달은 걸 이 사람은 35에 깨달았구나.'

이것은 융(Jung)이 말한 '개성화(individuation)' 과정의 시작이었다. 페르소나(사회적 가면)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기(Self)를 찾아가는 여정.

대타자의 담론: 라캉의 네 가지 담론

두 번째 병을 주문하면서 대화는 더 깊어졌다.

김 교수가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근데 홍 선생님은 왜 이제야 정신분석을?"

"25년간 미쳐 있었는데, 이제야 왜 미쳤는지 알고 싶어서요."

"라캉식으로 말하면, 대타자의 담론에서 벗어나려는 거네요."

"대타자요?"

김 교수가 젓가락으로 테이블에 도식을 그리기 시작했다.


라캉은 『세미나 17: 정신분석의 이면』에서 네 가지 담론을 제시한다:

주인의 담론(Master's discourse): S1 → S2 / $ → a



S1(주인 기표)이 S2(지식)를 지배한다


주체($)는 억압되고, 잉여 향유(a)가 생산된다



대학의 담론(University discourse): S2 → a / S1 → $



지식(S2)이 대상(a)을 다룬다


권력(S1)은 숨겨지고, 주체($)가 생산된다



히스테리의 담론(Hysteric's discourse): $ → S1 / a → S2



분열된 주체($)가 주인(S1)에게 질문한다


지식(S2)이 생산된다



분석가의 담론(Analyst's discourse): a → $ / S2 → S1



대상 a가 주체를 분열시킨다


주인 기표(S1)가 생산된다



"회사가 대타자죠. 25년간 회사의 담론, 즉 '성공', '승진', '성과'라는 기표에 포획됐던 거예요. 라캉은 이걸 '주인의 담론'이라고 불렀어요."

"그럼 지금은요?"

"지금은 '히스테리 담론'의 상태예요. 주인의 담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단계죠. '왜 내가 이렇게 살았지?'라고 묻는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한 이론이었지만 이상하게 이해가 됐다.

"그럼 교수님... 아니, 준영 씨는 지금 자유로워요?"

김 교수가 씁쓸하게 웃었다.

"자유? 천만에요. 이제는 '학계'라는 대타자에 포획됐죠. 논문, 연구, 강의 평가... 1년에 논문 2편 안 쓰면 재임용 탈락이에요."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대타자는 바뀔 뿐 사라지지 않는군요."

"그게 라캉이 말한 '상징계'예요. 우리는 언어의 세계, 법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죠. 다만..."

"다만?"

"그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다르죠. 알면 적어도 선택할 수 있으니까."

이것이 정신분석이 제시하는 자유다. 완전한 해방이 아니라, 자신의 결정론을 아는 것.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의 목표는 이드(id)가 있던 곳에 자아(ego)가 오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역전된 관계 - 발표 수업의 긴장: 증상의 분석


6주차, 중간 과제 발표가 있었다. 주제는 '자신의 증상 분석하기'.

발표 전날 밤, 나는 PPT를 만들며 고민했다. 아니, 사실 PPT를 만들 줄 몰라서 A4 용지에 손으로 정리했다. '회사 로고를 보면 가슴이 뛴다'는 증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프로이트는 『증상의 의미(The Sense of Symptoms)』에서 증상은 무의식적 갈등의 타협 형성물이라고 했다. 억압된 욕망과 억압하는 힘 사이의 타협. 증상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만족을 제공한다.

발표 당일, 강의실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젊은 학생들은 화려한 PPT와 동영상까지 준비해왔다. 나는 구겨진 A4 용지 몇 장만 들고 있었다.

내 차례가 왔다. 교탁에 서니 25년 만에 느끼는 긴장감이었다. 회사에서 임원들 앞에서 발표할 때와는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저는... 회사 로고를 보면 가슴이 뛴다는 증상을 분석해보겠습니다."

나는 종이를 들고 읽기 시작했다.

"퇴직한 지 1년이 됐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전 직장 건물 앞을 지나면 심장이 빨리 뜁니다. 회사 로고만 봐도 손에 땀이 나고, 가끔은 그 건물에 들어가는 꿈을 꿉니다."

학생들이 조용히 듣고 있었다. 나는 계속했다.

"처음엔 이것을 트라우마라고 생각했습니다. 25년간의 스트레스가 만든 후유증이라고. 하지만 라캉을 공부하면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김 교수가 관심 있게 듣고 있었다.

"이것은 '향유(jouissance)'일 수 있습니다.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즐기는... 마치 연인과 헤어진 후에도 그 사람의 향수 냄새를 맡으면 가슴이 뛰는 것처럼."

향유는 라캉의 핵심 개념이다. 그것은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과잉의 만족이다. 프로이트의 죽음충동과 연결되는 개념으로, 주체는 고통 속에서도 어떤 만족을 얻는다.

발표를 마치자 김 교수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홍 선생님, 그건 증상이 아니라 향수 아닐까요?"

"향수요?"

"스톡홀름 신드롬처럼, 25년간 포로 생활을 하다 보니 감옥을 그리워하는..."

순간 나는 발끈했다. 내 25년을 단순한 포로 생활로 치부하다니.

"교수님은 10년 다니고 나왔으니 모르시겠지만, 25년은 달라요!"

교실이 조용해졌다. 나도 놀랐다. 동갑 교수에게 반박을 하다니. 그것도 수업 시간에.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행동화(acting out)'였다. 억압된 감정이 말이 아닌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

김 교수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제가 모르는 15년이 있네요. 좀 더 설명해 주시겠어요?"

그는 교수였다. 나이를 떠나 가르치는 사람의 태도를 알고 있었다. 화내지 않고, 방어하지 않고, 오히려 배우려는 자세를 보였다.

이것은 비온(Bion)이 말하는 '컨테이닝(containing)'이었다. 분석가가 환자의 투사적 동일시를 받아들이고 소화해서 돌려주는 것.

나는 심호흡을 하고 설명했다.

"10년은 탈출할 수 있어요. 아직 자신이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25년은... 그게 정체성이 돼요. 홍 부장이 곧 나였어요. 그걸 버린다는 건 나를 버리는 거였어요."

한 젊은 학생이 손을 들었다.

"그럼 지금은요? 홍 부장이 아닌 지금은 누구세요?"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그래서 여기 온 거예요. 나를 찾으려고."

김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상적 동일시가 완전히 굳어진 거네요. 그걸 깨는 건 정말 용기가 필요했겠어요. 홍 선생님의 증상은 애도의 과정일 수 있습니다. 25년간의 자신을 애도하는."

애도는 프로이트가 『애도와 멜랑콜리』에서 다룬 주제다. 애도는 사랑하는 대상을 잃었을 때 일어나는 정상적 과정이다. 리비도를 잃은 대상에서 철회하여 새로운 대상에 투자하는 과정.


인터넷에서 발견한 충격적인 기사: 실재계의 침입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발표 때문에 들끓던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인터넷을 뒤적였다. 그러다가 네이버 메인에 뜬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충북 수박 농부, 52세에 러시아 물리학 박사 되다 - 현재 성균관대 교수"

호기심에 클릭했다. 기사는 길었다. 공근식이라는 사람의 믿기 힘든 인생 역정이 펼쳐졌다.

이것은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의 침입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징계로 포착할 수 없는 사건. 그것은 나의 상상계적 동일시를 깨뜨렸다. '50대는 늦었다'는 나의 믿음을 산산조각 냈다.

1992년 여름, 충북 영동군의 한 수박밭. 22살 청년 공근식은 새벽부터 밭에 나와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자퇴하고 수박 농사를 시작한 지 5년째...

나는 숨을 죽이고 읽어 내려갔다.

고등학교 자퇴. 25년간 수박 농사. 그리고 40살에 러시아로 유학.

"미쳤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 '미쳤다'는 표현은 프로이트가 말한 '정상성의 병리(pathology of normality)'를 벗어난 것에 대한 반응이었다. 우리는 '정상적' 삶의 경로를 벗어난 것을 광기로 본다. 하지만 라캉은 "광기가 없다면 인간이 아니다"라고 했다.

극한의 도전 - 러시아에서의 고군분투: 죽음충동과 승화

기사의 중반부는 더욱 극적이었다.

2010년 9월 2일, 태풍 곤파스가 한반도를 강타했다. 하룻밤 사이에 20년간 가꾼 수박밭이 초토화됐다.

40살. 인생의 절반을 수박 농사에 바쳤는데, 하룻밤에 모든 게 사라졌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외상(trauma)'의 순간이었다. 정신 장치의 자극 보호막이 뚫리는 순간.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재탄생의 기회였다.

2012년, 42살의 나이에 공근식은 러시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모스크바 공항에 내렸을 때, 10월인데도 칼바람이 불었다. 러시아어는 알파벳부터 달랐다. 키릴 문자를 익히는 데만 한 달이 걸렸다.

첫 번째 입학시험은 불합격. 두 번째 도전에서 겨우 합격했다. 하지만 첫 학기 성적은 재앙이었다. 대부분의 과목이 낙제점. 결국 퇴학 통보를 받았다.

나는 안타까웠다. 그 심정이 어땠을까. 42살에 러시아까지 가서 퇴학이라니.

하지만 기사는 반전을 보여줬다.

1년 후 재입학 기회를 얻은 그는 극한의 노력을 시작했다.

아침 4시 기상. 하루 3시간 수면. 하루 한 끼 식사. 이런 생활을 1년간 지속했다. 체중이 15kg 빠졌다. 치아 두 개가 빠졌다. 영양실조 증상도 나타났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죽음충동의 역설적 표현이었다. 자기 파괴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것을 통해 새로운 삶을 창조하려는 충동. 라캉은 이를 '실재계를 향한 충동'이라고 본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여기서 포기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

눈물이 났다. 나도 모르게. 50살에 대학원 와서 힘들다고 투정부렸던 내가 부끄러웠다.


기적의 순간: 상징계의 재진입


2022년 6월, 논문 심사가 있었다.

5명의 교수 앞에서 10년간의 연구를 발표했다. 러시아어로 2시간 동안 설명하고 질문에 답했다.

"수박 농부에서 어떻게 이런 수준의 연구를 하게 됐습니까?"

심사위원장의 질문에 그는 답했다.

"농부도 자연을 연구합니다. 언제 비가 올지, 온도가 어떻게 변할지. 저는 그저 대상을 수박에서 극초음속 유동으로 바꿨을 뿐입니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승화(sublimation)'의 완벽한 예시였다. 원초적 충동(농사에 대한 열정)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형태(과학 연구)로 전환된 것.

결과는 만장일치 통과. 52세의 나이에 물리학 박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기사를 다시 읽었다. 그리고 또 읽었다.

마지막 부분이 특히 가슴에 박혔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입니다. 12년 후에는 누구나 12살 더 먹습니다. 공부를 하든 안 하든. 그럼 하는 게 낫지 않나요?"

"저는 여전히 농부입니다. 다만 밭이 바뀌었을 뿐이에요."

이것은 라캉이 말하는 '상징적 동일시의 재구성'이었다. 그는 농부라는 정체성을 버리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새로운 상징계 속에서 재해석했을 뿐.


라캉의 '네 가지 담론'과 공근식 박사의 여정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공근식 박사의 이야기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라캉의 '네 가지 담론'을 펼쳐놓고 생각했다.

공근식 박사는 이 모든 담론을 거쳤다:

주인의 담론: 농부로서 자연을 지배하려 했던 시절


대학의 담론: 러시아에서 지식을 습득하던 시절


히스테리의 담론: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던 전환기


분석가의 담론: 농부이자 과학자라는 새로운 정체성


나는 어디쯤 있을까? 아마도 히스테리 담론의 단계. '왜 나는 25년간 그렇게 살았을까?'라고 묻는 단계.


동갑 교수와의 두 번째 술자리: 동일시와 전이


7주차 금요일, 김 교수가 또 술자리를 제안했다.

"홍 선생님, 오늘도 한잔 어때요?"

이번엔 내가 장소를 정했다. 학교 근처가 아닌, 내가 자주 가던 종로의 오래된 선술집이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김 교수가 물었다.

"제가 회사 다닐 때 자주 오던 곳이에요. 25년 단골집이죠."

낡은 나무 테이블, 누렇게 변색된 메뉴판, 구석구석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공간. 이것은 위니컷이 말하는 '이행 공간(transitional space)'이었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중간 영역.

"분위기 있네요." 김 교수가 둘러보며 말했다.

막걸리를 시켰다. 이 집의 시그니처 메뉴인 파전도 함께.

"교수님, 공근식 박사 아세요?"

"아, 그 수박 농부 출신 물리학자요? 당연히 알죠. 학계에서 화제였어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40살에 러시아 가서..."

김 교수가 막걸리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홍 선생님도 대단하신데요. 50살에 정신분석 대학원이라니."

"그거랑은 차원이 다르죠. 그 사람은 언어도 안 통하는 러시아에서..."

"비교하지 마세요. 각자의 도전은 각자에게 극한이에요."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나르시시즘적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이었다. 비교가 아닌 인정을 통해.


동갑 세미나의 탄생: 집단 치료의 시작


"홍 선생님, 우리 '동갑 세미나' 하나 만들까요?"

김 교수의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동갑 세미나요?"

"73년생들끼리 모여서 중년의 정신분석을 연구하는 거예요. '73 정신분석 모임' 같은."

이것은 비온(Bion)이 말하는 '작업 집단(work group)'의 형성이었다. 공통의 과제를 중심으로 모인 집단.

일주일 후, '73 정신분석 모임'의 첫 모임이 열렸다.

장소는 학교 근처 카페의 단체석. 7명이 모였다.

• 나 (전직 부장) • 김준영 교수 (전직 회사원) • 박정희 (전직 의사, 정신과 전문의였다가 정신분석 공부) • 이수진 (전직 고등학교 국어교사) • 최민수 (전직 공무원, 국세청 20년 근무) • 한영미 (전업주부, 자녀 독립 후 공부 시작) • 정태원 (전직 스님, 절에서 20년 수행 후 환속)

이 구성은 융이 말하는 '원형(archetype)'의 다양성을 보여줬다. 치유자, 교육자, 수행자, 양육자 등 다양한 원형이 모였다.

김 교수가 모임을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전직'이에요. 저도 전직 회사원이고. 이제 '현직' 자신을 찾아가는 중이죠."

전직 스님인 정태원 씨가 말했다.

"전 20년간 산속에서 수행했는데, 결국 사람이 그리워서 내려왔어요. 불교 상담이 아니라 정신분석을 공부하는 이유는... 종교를 떠나서 인간 자체를 이해하고 싶어서예요."

이것은 프로이트가 『환상의 미래』에서 말한 종교에서 과학으로의 이행이었다.

전직 의사 박정희 씨가 이어받았다.

"저는 정신과 의사였어요. 약물 치료를 15년 했는데, 한계를 느꼈어요. 약으로는 증상은 없앨 수 있어도 마음은 치료할 수 없더라고요."

각자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모두가 각자의 '전직'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체성을 찾고 있었다.


새로운 관계의 발견 - 조교가 되다: 역할의 재정의


8주차, 수업 시간에 김 교수가 나를 지목했다.

"홍 선생님이 다음 주 '조직 정신분석' 수업을 위해 직장 경험 사례를 수집해 주세요."

"저요? 조교도 아닌데..."

"아니에요. 홍 선생님이 우리 중에서 가장 오래 조직 생활을 하셨잖아요. 실질적인 조교예요."

조교? 50대에?

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역할이 생긴 것 같아 좋았다. 이것은 에릭슨(Erikson)이 말한 '생산성 대 침체'의 발달 과제였다. 중년기에는 다음 세대에 기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열심히 준비했다. 25년간의 직장 경험을 정리했다.

• 상사의 히스테리적 리더십 • 조직의 집단 무의식 • 회식 문화의 정신분석 • 승진 시스템의 욕망 구조 • 퇴직 증후군의 정신역동

A4 용지 30장 분량의 자료를 만들었다.

김 교수가 자료를 보고 감탄했다.

"이거 논문감이네요. 홍 선생님이 쓰시죠. 제가 지도해드릴게요."

"동갑이 지도교수요?"

"나이는 같아도 저는 박사고, 홍 선생님은 석사 과정이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여기서는 학위가 계급이었다. 이것은 새로운 상징계의 질서였다.

유튜브에서 본 공근식 박사의 강연: 거울 단계의 재경험

그날 밤, 나는 유튜브에서 공근식 박사를 검색했다. 여러 강연 영상이 나왔다. 그중 조회수가 가장 많은 '성균관대 특별 강연: 수박밭에서 우주까지'를 클릭했다.

화면에 나타난 공근식 박사는 생각보다 평범해 보였다. 구릿빛 피부, 투박한 손, 순박한 표정. 농부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것은 라캉이 말하는 '거울 단계(mirror stage)'의 재경험이었다. 나는 공근식 박사라는 거울을 통해 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공근식입니다. 제가 여기 서 있는 게 아직도 신기해요."

강연은 그의 유년 시절부터 시작됐다.

"전 어릴 때부터 밤하늘 보는 걸 좋아했어요. 수박밭에서 일하다가 쉴 때면 늘 하늘을 봤죠. 별들이 왜 빛나는지, 얼마나 멀리 있는지 궁금했어요."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인식 충동(epistemophilic drive)'이었다. 알고자 하는 욕망, 세계를 이해하려는 충동.

"40살에 태풍이 모든 걸 쓸어갔을 때, 처음엔 절망했어요. 하지만 그게 기회였죠.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니까 도전할 수 있었어요."

중간쯤에서 그는 중요한 말을 했다.

"많은 분들이 묻습니다.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냐고. 사실 용기가 아니에요. 절박함이었죠. 40살에 모든 걸 잃고 나니, 이제라도 하고 싶은 걸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이것은 라캉이 말하는 '주체의 결단'이었다. 대타자의 욕망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선택하는 순간.


중간고사 준비 - 라캉과 씨름하다: 지식의 전이


9주차, 중간고사가 다가왔다.

시험 과목은 세 개. '현대 정신분석', '라캉 세미나', '임상 사례 연구'.

나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새벽 5시에 도착해서 밤 10시까지. 주변은 모두 20대 학생들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50대 아저씨가 라캉을 읽고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울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특히 라캉의 '욕망 그래프'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복잡한 도식과 수식 같은 기호들. S1, S2, $, a...

라캉의 마테마(mathema)는 정신분석을 과학화하려는 시도였다. 수학적 기호로 무의식의 구조를 표현하려는 것.

옆자리에서 공부하던 지민이가 도와줬다.

"선배님, 이건 이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S1은 주인 기표, S2는 지식, $는 분열된 주체, a는 대상 a..."

"대상 a가 뭐야?"

"욕망의 대상인데 실제로는 도달할 수 없는... 음, 선배님으로 치면 '완벽한 부장'같은 거예요. 늘 추구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아!" 갑자기 이해가 됐다. 25년간 나는 '완벽한 부장'이라는 환상을 쫓았던 것이다.

이것은 라캉이 말하는 '빈 기표(empty signifier)'였다. 의미는 없지만 욕망을 추동하는 기표.

시험 당일 - 예상치 못한 질문: 통과의례

중간고사 첫날, '현대 정신분석' 시험.

세 번째 문제가 핵심이었다.

"당신의 인생에서 '통과의례(rite of passage)'의 순간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하시오."

통과의례는 반 제넵(Van Gennep)이 제시한 개념이다. 분리-전이-통합의 세 단계를 거쳐 새로운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의식.

나는 한참 생각하다가 썼다. 퇴직이 나의 통과의례였다고. 회사라는 아버지를 상징적으로 살해하고, 새로운 주체로 태어나는 과정이었다고.


성적 발표와 새로운 시작


일주일 후 성적이 발표됐다.

현대 정신분석: A 라캉 세미나: B+ 임상 사례 연구: A-

믿을 수 없었다. 50대에 받은 첫 대학 성적표. 그것도 A라니.

김 교수가 따로 불렀다.

"홍 선생님, 시험 답안이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통과의례 부분. 퇴직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한 건 처음 봤어요."

"과분한 점수 주신 것 같아요."

"아니에요. 라캉은 '분석가는 자신의 무의식으로부터 배운다'고 했어요. 홍 선생님은 자신의 무의식을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계세요."

논문 주제를 정하다: 자기분석의 시작

10주차, 논문 지도교수를 정해야 했다.

나는 김 교수를 찾아갔다.

"교수님, 제 지도교수를 해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주제는 정하셨어요?"

"네. '중년 남성의 퇴직 경험에 대한 라캉적 분석: 대타자의 붕괴와 주체의 재구성'을 하고 싶어요."

이것은 프로이트가 자신의 꿈을 분석하여 『꿈의 해석』을 쓴 것처럼, 자기 경험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것이었다.


73 모임의 발전: 집단 무의식의 치유


'73 정신분석 모임'은 점점 커졌다. 이제는 12명이 모인다.

우리는 '73 마음 상담소'를 만들기로 했다.

매주 토요일 오후, 대학 근처 카페를 빌려서 무료 상담을 시작했다.

첫 상담자는 48세 남성이었다. 최근 퇴직하고 우울증에 시달린다고 했다.

"저도 그랬어요." 내가 말했다. "퇴직 후 1년간 정말 힘들었죠."

이것은 얄롬(Yalom)이 말하는 '보편성(universality)'의 치료 요인이었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주는 위로.


라캉과 공근식, 그리고 나: 세 가지 가르침


학기말이 다가왔다.

기말 리포트 주제는 '나의 정신분석 여정'이었다.

나는 썼다:

"라캉은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했다. 25년간 나는 회사의 욕망을 내 욕망으로 착각하고 살았다.

공근식 박사는 40살에 자신의 진짜 욕망을 발견했다. 별과 우주에 대한 어린 시절의 호기심을.

나는 50살에 발견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다는,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다는 욕망을.

프로이트는 '리비도는 나이를 모른다'고 했다. 무의식에는 시간이 없다. 그래서 50살에도 20살처럼 시작할 수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 공근식 박사의 이 말이 이제는 내 삶의 모토가 되었다."


학기를 마치며: 새로운 정체성의 탄생


기말고사가 끝나고 종강 파티가 있었다.

김 교수가 건배사를 했다.

"이번 학기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특히 홍 선생님, 50대의 도전에 박수를 보냅니다."

나는 일어나서 답사를 했다.

"제가 여기 올 수 있었던 건... 공근식 박사 같은 분들이 먼저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40살에 러시아로 간 수박 농부가 있었기에, 50살의 회사원도 대학원에 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밭을 갈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물리학의 밭을, 누군가는 정신분석의 밭을.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고 씨를 뿌리는 거죠."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승화'의 또 다른 형태였다. 농사라는 원초적 활동이 지식 생산이라는 문화적 활동으로 전환되는 것.


새벽 4시, 각자의 책상에서


지금은 새벽 4시다.

창밖은 아직 어둡다. 하지만 곧 동이 틀 것이다.

책상 위에는 라캉의 『에크리』가 펼쳐져 있다. 옆에는 공근식 박사의 책도 있다. 그리고 내가 쓰고 있는 논문 초고.

프로이트는 새벽을 '자아가 가장 약해지는 시간'이라고 했다. 검열이 느슨해지고 무의식이 활발해지는 시간. 그래서 꿈을 꾸고, 창조적 사고가 일어난다.

어제 공근식 박사의 새로운 인터뷰를 봤다. 이제 그는 우주 농업을 연구한다고 했다. 화성에서 작물을 재배하는 프로젝트. 여전히 농부인 셈이다. 다만 밭이 지구에서 우주로 확장됐을 뿐.

이것은 라캉이 말하는 '싱톰(sinthome)'이었다. 증상이 아니라 자신을 지탱하는 고유한 방식. 공근식 박사에게 농부는 싱톰이다.

나도 여전히 직장인이다. 다만 회사가 대학원으로 바뀌었을 뿐. 보고서 대신 논문을 쓰고, 회의 대신 세미나를 한다.

김 교수는 다음 학기에 새로운 과목을 개설한다고 했다. '중년의 정신분석'. 나더러 조교를 맡아달라고 했다. 50대 조교. 웃기지만 이제는 자연스럽다.

휴대폰이 울렸다. 73 모임 단톡방이었다.

"오늘도 화이팅! - 전직 스님 정태원" "새벽부터 논문 쓰는 중. 다들 힘내세요! - 전직 의사 박정희" "저도 일어났어요. 오늘 발표 준비 끝! - 전직 교사 이수진"

모두가 깨어 있었다. 새벽 4시, 각자의 책상에서, 각자의 씨를 뿌리고 있었다.

융은 이를 '개성화(individuation)'의 과정이라고 불렀다. 집단 무의식에서 개인 무의식으로, 페르소나에서 자기(Self)로 나아가는 여정.

나는 답장을 보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 오늘도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시 라캉을 읽기 시작했다.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

이제 나는 안다. 그 타자가 회사에서 나 자신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창밖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말했다. "어둠을 응시하는 자만이 빛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각자의 빛을 찾아가고 있었다.


"인생의 오후를 인생의 오전의 프로그램으로 살 수는 없다." - 칼 구스타브 융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 - 공근식

"그래도 우리는 계속 간다." - 50대 정신분석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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