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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내 인생 2막은 정신분석 2화

by 홍종민

동기들이 다 젊다, 그날이 다가오면 이상해지는 나


화석이 된 기분: 나르시시즘의 상처


나는 나이 콤플렉스가 없다고 생각했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대학원 첫 주가 지나자 나는 스스로를 '화석'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20대 동기들이 BTS를 이야기할 때 나는 비틀즈를 떠올렸으니까. 그러다 보니 영화 <인턴>의 로버트 드 니로가 점점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70세에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그의 어색함이 남 일 같지 않았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 서론(On Narcissism)』(1914)에서 자아가 받는 상처에 대해 설명한다. 인간은 세 번의 큰 나르시시즘적 상처를 입는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중심설을 깨뜨렸고, 다윈이 인간의 특별함을 부정했으며, 프로이트 자신이 의식의 주권을 무너뜨렸다.

나에게도 네 번째 상처가 있었다. 바로 '시간적 중심성'의 상실이었다. 회사에서 나는 '경력자'로서 시간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대학원에서 나는 변방으로 밀려났다. 20대들이 만드는 현재의 흐름에서 나는 과거의 잔재처럼 느껴졌다.

두 번째 주 월요일,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이다. 내가 라캉 원서를 복사하려고 복사기 앞에서 씨름하고 있었다. 스마트폰 앱으로 결제해야 한다는데, 도통 방법을 모르겠었다.


복사기 앞의 굴욕: 거세 콤플렉스의 재현


"아저씨, 도와드릴까요?"

24살 막내 동기 지민이었다. 심리학과를 갓 졸업한 이 청년은 나를 '홍 선배님'이 아니라 '아저씨'라고 불렀다가 당황했다.

"아, 죄송해요. 홍 선배님..." "아니야, 아저씨 맞아. 도와줘."

지민이 능숙하게 QR코드를 찍고 결제를 완료했다. 30초도 안 걸렸다.

이 순간은 프로이트가 말한 거세 콤플렉스(castration complex)의 상징적 재현이었다. 거세는 단순히 성적 능력의 상실이 아니라, 권력과 능력의 상실을 의미한다. 복사기 앞에서 나는 '기술적 거세'를 경험했다. 25년간 쌓아온 직장에서의 전문성이 여기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라캉은 거세를 더 넓게 해석한다. 그것은 상징계에 진입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다.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 우리는 직접적 만족을 포기하고 기표의 세계로 들어간다. 나는 디지털 언어라는 새로운 상징계에 진입하기 위해, 아날로그적 자부심을 거세당해야 했다.

"선배님, 스마트폰 쓰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한... 10년?" "10년 동안 앱 안 쓰셨어요?" "전화랑 카톡만..."

지민의 표정이 묘해졌다. 마치 <쥬라기 공원>에서 공룡을 처음 본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그 시선 속에서 나는 라캉이 말한 '응시(gaze)'를 경험했다. 응시는 단순한 보기가 아니다. 그것은 나를 대상으로 만드는 타자의 시선이다. 나는 주체에서 대상으로, 관찰자에서 관찰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날부터 지민은 나의 'IT 과외 선생'이 되었다. 대신 나는 지민에게 '인생 상담'을 해주기로 했다. 적절한 거래였다. 프로이트가 말한 '교환의 경제학'이 작동한 것이다.


4월이 오면 이상해지는 나: 기념일 반응의 정신분석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4월 중순이 되자 나는 갑자기 극도로 예민해졌다.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수업 시간에도 집중이 안 되고, 밤에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프로이트는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The Psychopathology of Everyday Life)』(1901)에서 우리의 무의식이 시간을 어떻게 기록하는지 설명한다. 의식은 잊어버려도, 무의식은 기억한다. 특정한 날짜, 시간, 계절이 되면 몸과 마음이 먼저 반응한다.

이를 '기념일 반응(Anniversary Reaction)'이라 부른다. 조지 폴락(George Pollock)은 이 현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트라우마가 발생한 날짜나 시기가 되면, 의식적 기억 없이도 신체적, 정서적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정교한 시계를 가지고 있다. 의식적으로는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은 날짜들을, 무의식은 놀랍도록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마치 스마트폰의 알람처럼, 특정한 시간이 되면 저절로 작동하는 것이다.

정신분석 수업에서 배운 대로, 나는 내 무의식을 탐색해봤다. 자유연상(free association) 기법을 사용했다. 4월... 봄... 시작... 끝... 승진... 탈락... 아버지...

그리고 깨달았다. 4월 15일. 그날은 25년 전 내가 처음으로 부장 승진에서 탈락한 날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기도 했다.


중첩된 상실: 프로이트의 중층결정


프로이트는 '중층결정(overdetermination)' 개념을 제시한다. 하나의 증상은 여러 무의식적 원인들이 중첩되어 나타난다. 나의 4월 우울증도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 층: 아버지의 죽음 (원초적 상실) 두 번째 층: 승진 탈락 (나르시시즘적 상처) 세 번째 층: 매년 반복되는 인사고과 시즌 (구조적 불안)

이 세 층이 겹쳐지면서, 4월은 내게 '상실의 달'이 되었다. 라캉식으로 말하면, 4월은 나에게 '상실의 기표(signifier of loss)'가 된 것이다.


발표 수업의 반전: 분석가가 되는 순간


3주차, '정신분석 사례 연구' 수업이었다. 각자 사례를 하나씩 발표하는 시간. 젊은 동기들은 하나같이 PPT에 화려한 애니메이션을 넣어 발표했다.

내 차례가 왔다. PPT는 없었다. 대신 A4 용지 한 장을 들었다.

"저는 25년간 관찰한 직장 상사의 사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수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 상사는 매년 4월이면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승진을 해도, 연봉이 올라도 마찬가지였죠. 왜일까요?"

나는 칠판에 라캉의 욕망 그래프를 그렸다.

라캉의 욕망 그래프는 주체가 어떻게 대타자의 욕망 속에서 자신을 구성하는지 보여준다.

첫 번째 층: 욕구(need) - 생물학적 필요


두 번째 층: 요구(demand) - 언어로 표현된 욕구


세 번째 층: 욕망(desire) - 요구와 욕구 사이의 간극


"이 상사는 타자의 인정을 욕망했습니다. 하지만 인정은 채워질 수 없는 구멍이죠. 왜? 인정받는 순간, 더 큰 인정을 원하게 되니까요."

이것이 라캉이 말하는 '욕망의 환유(metonymy of desire)'다. 욕망은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과장이 되면 부장을, 부장이 되면 임원을 욕망한다. 욕망의 대상은 계속 바뀌지만, 욕망 자체는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교수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왜 하필 4월입니까?"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 상사가 처음 승진에서 탈락한 날이 4월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잃은 날도 4월이었죠. 프로이트가 말한 기념일 반응입니다. 무의식은 시간을 기억합니다."

"실제 사례입니까?"

"네. 그 상사는 결국 임원이 되었지만 더 우울해졌습니다. 정년 3년 전에 스스로 퇴직했죠."

"그 분이 누구신지 물어도 될까요?"

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접니다."


자기분석의 용기: 프로이트의 유산


교실이 조용해졌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자기분석(self-analysis)의 순간이었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꿈을 분석하며 정신분석을 창시했다. 특히 "이르마의 주사" 꿈을 통해 자신의 직업적 불안과 죄책감을 발견했다.

나도 내 자신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이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자신의 무의식을 공개한다는 것은, 가장 취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자기분석입니다. PPT보다 훨씬 인상적이네요."

그날 이후 동기들 사이에서 나는 '아저씨'에서 '홍 선배'로 호칭이 바뀌었다. 라캉이 말하는 '인정(recognition)'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인정은 대타자의 욕망을 충족시켜서가 아니라, 나의 결핍을 인정함으로써 얻은 것이었다.


오후 5시 30분의 비밀: 시간의 무의식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후 5시 30분이었다. 문득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 시간은 25년 동안 회사에서 퇴근하던 시간이었다.

프로이트의 '반복강박(repetition compulsion)' 개념이 여기서도 작동한다. 우리는 특정 시간에 특정 감정을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에 침을 흘리듯, 나는 5시 30분에 퇴근의 안도감을 기대하는 몸이 되어 있었다.

조지 폴락의 연구 사례가 떠올랐다. 13세에 아버지를 잃은 한 여성이 매일 오후 5시 30분, 남편이 퇴근하는 시간에 우울해진다는 사례. 어린 시절 아버지의 귀가를 기다리던 설렘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바뀐 것이다.

라캉은 이를 '상징적 반복'으로 설명한다. 시간은 단순한 물리적 흐름이 아니라, 상징계에 기입된 의미의 연쇄다. 5시 30분은 나에게 '귀환(return)'의 기표였다. 하지만 이제 돌아갈 곳이 없었다.


떡볶이와 기념일 반응: 구강기적 퇴행


그날 저녁, 나는 또 신촌의 그 분식집으로 향했다. 4월의 우울감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아저씨, 또 왔네?" 주인 아주머니가 반겼다. "네, 떡볶이 하나요."

매운 떡볶이를 먹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매운 음식을 찾는 것도 일종의 기념일 반응인지 모른다. 25년간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회사 근처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었으니까.

프로이트의 정신성 발달 이론에서 구강기(oral stage)는 생후 18개월까지의 시기다. 이 시기의 만족과 좌절은 평생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손톱을 물어뜯는 것은 모두 구강기적 퇴행(oral regression)이다.

특정한 냄새나 맛이 과거의 기억을 불러내는 것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묘사한 '무의식적 기억(mémoire involontaire)'과 같다. 마들렌 과자의 맛이 어린 시절 전체를 되살리듯, 떡볶이의 매운맛은 나의 25년을 소환한다.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후각과 미각은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변연계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특히 편도체(amygdala)와 해마(hippocampus)는 정서적 기억을 저장한다. 떡볶이의 매운맛은 나에게 25년간의 직장 생활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그 시절을 애도하는 의식이 되어주었다.


나이를 까먹은 날: 상상계적 동일시의 해체


4주차 금요일, 동기들과 술자리가 있었다. 막걸리집이었는데, 20대들이 막걸리를 마시는 게 신기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막걸리를 마셔?" "네, 힙해요."

'힙하다'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 나는 라캉이 말하는 '상상계적 동일시(imaginary identification)'의 균열을 경험했다. 나는 '막걸리=아저씨 술'이라는 등식에 갇혀 있었는데, 젊은이들은 그 등식을 깨뜨렸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분위기가 풀렸다. 30대 여자 동기가 물었다.

"선배님, 회사에서 제일 힘들었던 게 뭐였어요?" "나이 먹는 거." "나이요?" "35살까진 '젊은 피'야. 40 넘으면 '아저씨'. 45 넘으면 '올드'가 돼. 실력은 그대로인데 호칭만 바뀌지."

이것은 라캉이 말하는 '기표의 폭력'이다. 기표는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주체를 특정한 위치에 고정시킨다. '올드'라는 기표는 나를 과거의 존재로 만들고, '영'이라는 기표는 미래의 가능성으로 만든다.

25살 남자 동기가 말했다. "저는 나이 들고 싶어요. 어려 보여서 무시당하거든요."

나는 웃었다. "5년 후에 그 말 취소하고 싶을 거야."


아버지의 나이에 도달하다: 동일시와 초월


그때 지민이 물었다. "선배님은 우리랑 있을 때 불편하지 않으세요?"

"처음엔 불편했어. 근데 이제는 오히려 편해." "왜요?" "너희는 나를 평가하지 않잖아. '홍 부장님 요즘 왜 이러세요?' 이런 거 안 물어보잖아."

다들 웃었다. 하지만 나는 문득 깨달았다. 올해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와 같은 해라는 것을.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Totem and Taboo)』(1913)에서 원시 부족의 아버지 살해 신화를 분석한다. 아들들은 전능한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를 토템으로 숭배한다. 이것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동일시를 통한 아버지의 내면화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가 세상을 떠난 나이에 가까워지면 막연한 불안을 느낀다. 이것을 '연령 동일시(age identification)'라고 부른다. 무의식적으로 부모의 운명을 반복할 것 같은 두려움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니콜라이 고골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43세에 똑같이 세상을 떠났다. 무의식이 만들어낸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이 나이는 초월의 기회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나이를 넘어서는 것은, 상징적으로 아버지를 초월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진정한 해결은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되고 그를 넘어서는 것이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내가 멍하니 있자 지민이 물었다.

"아, 응. 그냥 생각이 많아서."

평등한 더치페이: 상징적 거세의 수용

술자리가 끝날 무렵, 나는 실수를 했다. 계산하려고 카드를 꺼냈다.

"제가 살게요."

동기들이 당황했다. "아니에요, 선배님도 학생이잖아요."

"그래도 내가 나이가..."

"선배님, 여기서는 다 똑같은 대학원생이에요."

그 말에 뭔가 울컥했다. 25년 만에 처음으로 '나이'를 잊어도 되는 곳을 찾은 것 같았다.

결국 더치페이를 했다. 1/n. 공평했다.

이것은 라캉이 말하는 '상징적 거세(symbolic castration)'의 수용이었다. 나이라는 팔루스적 기표를 포기하고, 평등한 주체가 되는 것. 거세는 상실이 아니라, 상징계에서 새로운 위치를 찾는 과정이다.


프로이트의 '아버지 살해'와 형제애


그날 밤, 집에 돌아와 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를 다시 읽었다. 원시 부족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형제들끼리 연대하는 이야기.

'우리 동기들도 비슷한가?'

나이라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평등한 동기가 된 것. 아니, 내가 스스로 '나이 아버지'를 죽인 것인지도.

프로이트에 따르면, 아버지 살해 후 형제들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아버지를 토템으로 숭배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문명의 시작이다. 법과 도덕, 종교가 여기서 탄생한다.

우리 동기들 사이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나이의 위계를 없앤 후, 우리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다. 지식의 평등, 경험의 공유, 상호 존중. 이것이 우리의 '토템'이었다.

시간의 무의식: 라캉의 논리적 시간

그런데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버지와 같은 나이가 된 지금, 무의식적으로 아버지처럼 될까 봐 두려워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완전히 다른 길, 정신분석 대학원을 선택한 건 아닐까?

라캉은 『논리적 시간과 예기된 확실성의 단언(Logical Time and the Assertion of Anticipated Certainty)』(1945)에서 시간의 세 가지 계기를 구분한다:

보는 순간(instant of seeing) - 즉각적 인식


이해하는 시간(time for understanding) - 성찰의 시간


결론의 순간(moment of concluding) - 결단의 순간


나는 지금 '이해하는 시간'에 있었다. 아버지의 나이에 도달했다는 것을 '본' 후, 그 의미를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그를 따를 것인지.

대리언 리더(Darian Leader)의 『우리는 왜 우울할까』에서 읽은 구절이 떠올랐다. "우리의 무의식은 단순히 억압된 욕망이나 트라우마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 자체를 기록하고 있다."


라캉의 '상상적 동일시'와 시간의 재구성


수업 시간에 배운 라캉의 개념이 떠올랐다. '상상적 동일시' - 타자의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

라캉은 동일시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상상적 동일시(imaginary identification) - 이상적 자아(ideal ego)와의 동일시


상징적 동일시(symbolic identification) - 자아 이상(ego ideal)과의 동일시


나는 25년간 '중년 직장인'의 이미지와 상상적으로 동일시했다. 그런데 대학원에서는 그 이미지가 통하지 않았다. 새로운 동일시가 필요했다.

'50대 대학원생 홍OO.'

이상하게도 이 정체성이 마음에 들었다. 이것은 상징적 동일시로의 전환이었다. 더 이상 이미지가 아니라, 상징적 위치와 동일시하는 것.

동시에 깨달았다. 매년 4월이 되면 나를 괴롭히던 그 우울감도, 이제는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교수님의 조언: 의식화를 통한 치유


다음 주 수업 시간, 교수가 나를 따로 불렀다.

"홍 선생님, 수업 따라오기 힘들지 않으세요?" "솔직히 이론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사례를 들으면 이해가 됩니다." "나이 차이는요?" "처음엔 장벽이었는데, 이제는 장점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요?" "젊은 친구들은 이론을 잘 알아요. 저는 사례를 많이 알고요. 서로 교환하면 되더라고요."

이것은 라캉이 말하는 '지식의 전이(transference of knowledge)'다. 분석 상황에서 지식은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 속에서 생산된다.

교수가 미소를 지었다. "지난번 발표에서 기념일 반응을 언급하셨죠? 본인의 경험이었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의식화하는 것만으로도 치유는 시작됩니다. 무의식에 갇혀 있던 것이 의식의 빛을 받는 순간,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죠."

이것이 프로이트가 말한 '의식화(making conscious)'의 치료적 효과다.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적으로 만들라"는 정신분석의 근본 원칙.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인지적 이해가 아니다. 그것은 정서적 통찰(emotional insight)을 동반해야 한다.

교수가 덧붙였다. "그게 진짜 세미나죠. 나이를 초월한 지식의 교환, 그리고 시간을 초월한 자기 이해."


새로운 별명, 새로운 기념일: 재명명의 의식


5주차가 되자 나에게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홍석사'.

아직 석사도 아닌데 왜 그렇게 부르냐고 물었더니, 지민이 대답했다.

"선배님은 이미 인생 석사잖아요. 저희는 이론 석사 준비 중이고요." "그럼 박사는?" "그건 둘 다 갖춘 사람이겠죠. 선배님이 졸업할 때쯤이면..."

다들 웃었다.

이것은 라캉이 말하는 '명명(nomination)'의 행위였다. 새로운 이름은 새로운 존재 방식을 만든다. '홍 부장'에서 '홍석사'로의 전환은 단순한 호칭 변경이 아니라, 상징계에서의 위치 변화였다.

한국에도 '액년'이라는 개념이 있다. 서른셋, 마흔둘, 쉰하나 같은 특정 나이가 되면 조심해야 한다는 믿음. 어쩌면 이것도 일종의 집단적 기념일 반응일지 모른다. 사회가 공유하는 시간의 각본.

융(Jung)이 말한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이 여기서 작동한다. 개인의 무의식뿐 아니라, 문화가 공유하는 무의식적 패턴이 있다. 액년은 한국 문화의 집단적 기념일 반응이다.

하지만 나는 쉰하나를 새롭게 시작하는 나이로 만들기로 했다. 상처의 기념일을 성장의 기념일로, 상실의 시간을 배움의 시간으로.


벚꽃이 피는 계절: 반복과 차이


5월이 되자 캠퍼스에 벚꽃이 만개했다.

프로이트는 반복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병리적 반복 - 트라우마의 강박적 재현


작업을 통한 반복(working through) - 치유를 위한 반복


한 중년 남성은 매년 벚꽃이 필 무렵이면 극심한 공황발작을 경험한다고 했다. 스무 살 봄, 벚꽃이 만개한 날 첫사랑과 이별했기 때문이라고. 이것은 병리적 반복이다.

나에게 벚꽃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보니 25년 전 봄, 처음 회사에 입사한 날도 벚꽃이 만개한 날이었다. 그리고 작년 봄, 퇴직한 날도.

들뢰즈(Deleuze)는 『차이와 반복』에서 "반복 속에는 항상 차이가 있다"고 했다. 같은 벚꽃이지만, 매년 다른 벚꽃이다. 같은 계절이지만, 다른 의미다.

"홍 선배, 같이 벚꽃 구경 가실래요?"

지민과 동기들이 제안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벚꽃, 다른 의미. 이제는 새로운 시작의 꽃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을 친구로 만들기: 능동적 수용


정신분석가들은 말한다. '통찰(insight)'이 일어나는 순간, 무의식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마치 어둠 속의 괴물이 불을 켜면 그저 그림자였음이 밝혀지는 것처럼.

"아, 내가 4월에 우울한 것은 아버지 기일이자 첫 승진 탈락의 기억 때문이구나."

이렇게 깨닫는 순간, 그 우울은 정체불명의 괴물에서 이해 가능한 슬픔으로 바뀐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통찰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작업을 통한 치료(working through)'가 필요하다. 반복적으로 그 통찰을 경험하고, 정서적으로 소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때로는 적극적으로 기념일을 챙기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것을 '의례화(ritualization)'라고 부른다. 나는 이제 매년 4월 15일이 되면 아버지가 좋아하던 막걸리를 마시고, 회사 근처 그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는다. 무의식적 반응을 의식적 의례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위니컷(Winnicott)은 '이행 현상(transitional phenomena)'을 통해 상실을 극복한다고 했다. 아이가 엄마와 분리될 때 곰인형을 안듯, 나는 떡볶이와 막걸리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한다.


나이는 숫자일 뿐? 시간은 흔적일 뿐?


아니다. 나이는 숫자가 아니다. 경험이고, 지혜이고, 때로는 한계다. 시간도 단순한 흐름이 아니다. 우리 마음속에 새겨진 지도이고, 무의식의 달력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은 시간을 모른다"고 했다. 무의식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구분되지 않는다. 20년 전의 상처도 지금 일어난 것처럼 생생하다.

하지만 라캉은 다르게 본다. 시간은 상징계의 구조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선형적 시간은 언어와 함께 만들어진다. 우리는 이 구조 속에서 의미를 만든다.

하지만 대학원에서 배웠다. 나이도 하나의 '기표(signifier)'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는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회사에서 50대는 '퇴물'의 기표였다. 대학원에서 50대는 '경험'의 기표가 되었다. 4월은 상실의 달이었다. 이제는 성찰의 달이 되었다.

같은 나이, 다른 의미. 같은 시간, 다른 해석.

시간의 재구성: 크로노스에서 카이로스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두 가지로 구분했다:

크로노스(Chronos) - 양적이고 선형적인 시간


카이로스(Kairos) - 질적이고 의미 있는 시간


회사 생활 25년은 크로노스의 시간이었다. 출근과 퇴근, 월초와 월말, 분기와 연도. 측정 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시간.

대학원에서의 시간은 카이로스다. 통찰의 순간, 깨달음의 순간, 변화의 순간. 측정할 수 없지만 의미로 가득한 시간.

라캉이 말했다. "주체는 기표의 효과다." 프로이트가 말했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

나도 이제 안다. 홍 부장이 아니라 홍 대학원생으로 사는 법을. 그리고 시간의 상처를 안고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에필로그: 시간의 순례자가 되다


다음 주부터 본격적인 라캉 세미나가 시작된다. 어렵겠지만, 지민이가 옆에서 PPT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다고 했다. 대신 나는 지민에게 '회사에서 살아남는 법'과 '시간과 친구가 되는 법'을 가르쳐주기로 했다.

이것은 라캉이 말하는 '상호주체성(intersubjectivity)'이다. 주체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나는 지민을 통해 젊음을 배우고, 지민은 나를 통해 경험을 배운다.

적중률? 이제는 중요하지 않다. 틀려도 다시 배우면 되니까. 기념일 반응? 이제는 두렵지 않다. 이해하면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그것이 학생의 특권이고, 시간의 순례자가 되는 지혜다.

50대에 다시 얻은 특권. 늙어서 좋은 점이 하나 있다면, 젊은이들 앞에서 틀려도 덜 창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의 흔적을 가진 사람만이 줄 수 있는 위로가 있다는 것이다.

"홍 선배, 모르면 물어보세요!" "그래, 묻고 또 물을게."

프로이트는 말년에 이렇게 썼다. "정신분석의 목표는 히스테리적 불행을 일상적 불행으로 바꾸는 것이다."

나는 이제 '일상적 불행'과 함께 살아간다. 4월의 우울, 5시 30분의 공허함, 나이의 무게. 하지만 이것들은 더 이상 나를 압도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내 삶의 일부이고, 나라는 주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우리 모두는 시간의 순례자다. 기쁨과 슬픔의 기념일들을 지나며, 매 순간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조금씩 더 깊은 사람이 되어간다.

그날이 다가오면 이상해지는 나.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것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그리고 동기들이 다 젊어도, 우리는 모두 같은 시간의 여행자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프로이트가 빌헬름 플리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로 끝을 맺는다:

"시간은 치유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시간과 함께 변할 뿐이다."


참고문헌

폴락, 조지. "Anniversary Reactions, Trauma, and Mourning." Psychoanalytic Quarterly 39 (1970): 347-371.


리더, 대리언. 『우리는 왜 우울할까』. 서울: 동녘사이언스, 2011. 109-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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