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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깨달음의 길인가 달콤한 아편인가

by 홍종민

나는 왜 앉아 있는가


서울 강남의 한 대기업 교육센터.
점심시간이 지나자 직원들이 조용히 회의실로 모여든다. 가운데에는 둥근 명상방석이 줄지어 놓여 있고, 스피커에서는 바다 파도 소리가 흐른다. 한 명은 눈을 감고 깊은 호흡에 집중하고, 다른 이는 어깨에 힘을 뺀 채 몸을 앞으로 숙인다. 강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지금 이 순간, 아무 생각도 하지 마세요. 당신은 안전합니다. 모든 것이 괜찮습니다.”

나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문득 묻는다.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가?


요즘 명상은 단순한 수행법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이 됐다. 유튜브에는 명상 음악과 ASMR 영상이 하루에도 수백 개씩 올라오고, 앱스토어에는 ‘10분 명상’ 앱이 상위권을 차지한다. 카페 한쪽에는 ‘마인드풀니스 클래스’ 안내문이 붙어 있고, 여행사는 발리·네팔·티베트를 배경으로 한 ‘명상 리트릿 패키지’를 판다.

나 역시 처음 명상을 접했을 때, 그 고요함과 안정감에 깊이 매료됐다. 눈을 감고 호흡에만 집중하다 보면 머릿속이 텅 비고, 마음이 포근해지며, 마치 모든 문제가 사라진 듯했다. 그런데 어느 날, 자현 스님의 한마디가 내 귀를 때렸다.

“부처님은 명상주의를 멀리한다. 명상은 아편이자 임시 방편이다.”

그 말은 내 안에 작은 균열을 만들었다. 명상이 단순한 힐링 도구가 아니라 ‘달콤한 마취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 왜 스님은 명상을 이렇게까지 경계했을까? 그리고 부처님이 말한 깨달음의 길은, 우리가 상상하는 고요한 호흡 속에만 있는 것일까?


명상과 마취: 왜 아편인가


명상은 우리 뇌의 화학작용을 바꾼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명상은 전두엽 활동을 증가시키고, 편도체의 과잉 반응을 줄이며, 세로토닌·도파민 분비를 촉진한다. 결과적으로 불안이 완화되고, 기분이 안정된다. 문제는 이 효과가 통증 완화제처럼 작용한다는 점이다.

라캉의 주이상스(jouissance) 개념을 빌리자면, 명상은 결핍과 불편함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부드러운 쾌락 속에 잠시 숨겨놓는다. 통증을 아편으로 누르는 것과 같은 원리다.

실제 상담 장면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한 내담자는 매일 30분 명상을 하며 불안을 조절했지만, 회사를 그만두게 되자 그 불안이 이전보다 더 강하게 돌아왔다. 그는 말했다.
“명상할 때는 괜찮았는데, 막상 큰일이 생기니 숨을 아무리 고르고 집중해도 마음이 안 가라앉아요.”

아편이 통증을 없애주는 동안 원인 치료는 지연된다. 마찬가지로, 명상에 의존하면 불편한 감정과 직면할 기회가 줄어든다. 자현 스님의 말처럼, 명상은 ‘아편’이 될 수 있다. 달콤하지만, 그 달콤함이 병을 깊게 만든다.


부처가 멀리한 ‘주의’의 함정


불교는 특정 방법론을 절대화하는 것을 경계한다. 명상도 예외가 아니다. 부처가 설한 ‘팔정도(八正道)’는 올바른 견해·사유·말·행동·생활·정진·마음챙김·집중을 포괄한다. 명상은 이 중 ‘정념(正念)’과 ‘정정(正定)’에 해당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초기경전 《맛지마 니까야》에는 한 제자가 깊은 명상 삼매에 들었다가 부처에게 꾸중을 듣는 장면이 있다. 부처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깊은 물속에 잠겨 있다. 그러나 물 밖으로 나와 길을 걸어야 한다.”

이 말은 명상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임을 드러낸다. 명상 삼매에 머무르면 현실의 고통과 관계를 직시하는 힘이 약해진다. 깨달음은 고요함 속에서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고요함이 깨졌을 때의 알아차림에 있다.


임시 방편의 의미


불교의 ‘방편(方便)’은 목적지로 가기 위해 임시로 쓰는 수단이다. 다리는 강을 건너기 위해 필요하지만, 강을 건넌 뒤에는 그 위에 집을 짓지 않는다.

명상은 방편이다. 불안이나 분노에 휩쓸릴 때 숨을 고르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르면 그 평온이 오히려 족쇄가 된다.

심리치료에서도 ‘대처기술(coping skills)’과 ‘근본치유(healing)’는 다르다. 대처기술은 불편한 감정을 관리하는 법을 알려주지만, 근본치유는 그 감정이 생겨난 삶의 역사와 무의식을 다룬다. 부처의 수행은 이 근본치유의 길과 더 가깝다.


명상주의의 현대적 변형


현대 자본주의는 명상을 소비재로 만들었다.
명상 앱 ‘캄(Calm)’과 ‘헤드스페이스(Headspace)’는 연간 수백억 원의 매출을 올린다. 기업은 ‘마음챙김 리더십’으로 직무 스트레스를 줄인다며 직원 교육을 한다. 여행사는 ‘럭셔리 명상 리트릿’을 고급 패키지로 판다.

이 과정에서 명상은 고통을 직시하는 수행이 아니라, 정신적 스파 서비스가 된다. 더 심각한 건, 명상 상품이 사회 구조의 불평등을 가리고, 개인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도구로 쓰인다는 점이다.
“당신이 불행한 건 세상 때문이 아니라, 당신 마음 때문”이라는 메시지가 은근히 깔린다.


진짜 수행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불교 수행의 핵심은 **무상(無常), 무아(無我), 고(苦)**를 직시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깨닫는 과정에서 우리는 불안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있는 법을 배운다.

라캉에 따르면, 결핍은 인간 존재의 구조적 조건이다. 이를 없애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오히려 그 결핍을 인정하는 것이 성숙이다. 명상의 위험은, 결핍을 없앨 수 있다는 착각을 강화하는 데 있다.

진짜 수행은 명상방석 위보다 삶의 현장에서 드러난다. 누군가의 말에 상처받을 때,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깨어있음을 연습한다.


고요함 뒤의 불편함을 붙잡아라


명상이 끝난 뒤의 고요함은 소중하다. 하지만 그 고요함이 깨지는 순간이 더 중요하다. 바로 그때가 수행의 시작이다.

자현 스님의 말처럼, “명상은 약이지만, 약에 취하면 병은 깊어진다.”
명상은 삶의 고통을 직시하기 위한 준비운동이지, 고통을 지우는 마법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명상 후 고요함이 사라질 때, 그 불편함과 함께 있는 연습을 한다. 그 순간, 명상은 더 이상 아편이 아니라, 나를 현실로 데려오는 나침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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