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볶이와 나프탈렌 냄새
면접을 앞둔 50대 남자가 대학가 골목을 걷고 있었다.
정장은 오래전 장롱 속에 묻혀 있던 것이었다. 오랜만에 꺼내 입으니 팔꿈치와 어깨가 낯설게 조였다. 천 사이로 스며 나오는 나프탈렌 냄새가 묘하게 고향 냄새처럼 느껴졌다. 그건 '오래된 시간'의 냄새였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과거가 아니라, 어떤 낯선 미래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긴장감이 목을 죄고 있었다. 속이 살짝 메스꺼워질 때, 코끝을 자극하는 또 다른 향이 스며들었다. 고추장과 설탕이 섞여 만든, 달콤하고도 매운 떡볶이 냄새였다. 골목 모퉁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작은 분식집.
"아저씨, 떡볶이 하나요!"
대학생들 사이에 섞여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철판 위에서 떡과 어묵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첫 입을 넣는 순간, 매운맛이 혀를 때렸고, 동시에 달콤한 맛이 뒤따랐다. 이마에 작은 땀이 맺혔다. 신기하게도, 아침부터 나를 짓누르던 긴장감이 조금씩 풀렸다.
실재계의 틈입: 언어 너머의 경험
그 순간 나는 몰랐지만, 나중에 라캉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이건 실재계(the Real)의 침투였다.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에서 인간의 정신은 세 가지 차원—상상계(Imaginary), 상징계(Symbolic), 실재계(Real)—으로 구성된다. 이 세 영역은 보로메오 매듭처럼 서로 얽혀 있으면서도 각자의 고유한 특성을 지닌다.
상상계는 우리가 거울 단계(mirror stage)를 통해 형성하는 자아의 영역이다. 생후 6-18개월 사이, 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저게 나다"라고 인식한다. 하지만 이 인식은 근본적으로 오인(méconnaissance)이다. 거울 속 이미지는 통합되고 완전해 보이지만, 실제 아이의 몸은 여전히 파편화되고 통제되지 않는다. 이 간극에서 자아는 탄생하지만, 동시에 소외(aliénation)도 시작된다.
상징계는 언어와 법, 문화의 영역이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던져지는 기호와 규칙의 세계다. 아버지의 이름(Name-of-the-Father)으로 대표되는 금지와 질서가 작동하는 곳이다. 회사, 직급, 연봉—이 모든 것이 상징계의 구조물이다.
그런데 실재계는 이 두 영역으로 포착되지 않는 차원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사물 자체(Das Ding)'와 비슷하다. 언어로 완전히 표현할 수 없고, 이미지로도 온전히 담을 수 없는, 하지만 우리를 강렬하게 흔드는 무언가다.
떡볶이 냄새와 매운맛은 내 머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데, 몸은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긴장을 풀고, 무의식 깊숙한 곳의 어떤 회로를 자극하며, 내가 '살아있다'는 감각을 되살리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실재계의 침투다. 상징계의 질서가 잠시 무너지고, 날것의 감각이 나를 덮치는 순간.
주이상스: 쾌락 너머의 충동
라캉은 프로이트의 쾌락원칙(pleasure principle)을 넘어서는 **주이상스(jouissance)**를 말한다.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넘어서(Beyond the Pleasure Principle)』(1920)에서 인간 정신의 두 가지 충동을 구분했다. 쾌락원칙은 불쾌를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며, 흥분을 최소화하려 한다. 하지만 그는 전쟁 신경증 환자들이 악몽을 반복하고, 아이들이 불쾌한 놀이를 되풀이하는 것을 보며, 쾌락원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바로 죽음충동(death drive)이었다.
라캉은 이 개념을 주이상스로 재해석한다. 주이상스는 단순한 기쁨(plaisir)이 아니다. 그것은 고통과 즐거움의 경계가 무너지는 지점, 주체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과잉의 경험이다. 혀를 찌르는 매운맛, 땀을 타고 흐르는 화끈함—그 고통이 나를 묘하게 안정시키는 경험. 이건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감각과 정서가 한꺼번에 폭발하는 작은 사건이었다.
프로이트가 말한 구순기(oral stage)의 만족과도 연결된다. 생애 초기, 입과 혀를 통한 만족은 단순한 영양 섭취를 넘어선다. 그것은 세계와의 첫 번째 관계 맺기이자, 쾌락의 원형이다. 떡볶이를 먹는 행위는 이 원초적 만족을 환기시키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주이상스의 차원으로 나를 이끌었다.
30분 후, 나는 정신분석 대학원 면접장 문을 열었다.
머릿속에는 떡볶이 향이 남아 있었고, 마음 한쪽에는 이런 생각이 자리 잡았다.
'그래, 25년간 미친 듯이 살았는데, 이제야 왜 미쳤는지 알아보자.'
퇴직 후 찾아온 우울의 리듬
우울의 정신분석학: 상실과 멜랑콜리
퇴직 전, 나의 우울은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손님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유 없이 마음이 무거운 날이 있었지만, 그럴 때도 회의와 보고서, 마감이 우울을 밀어냈다. 일을 하느라 우울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멜랑콜리(Mourning and Melancholia)』(1917)에서 우울의 메커니즘을 설명한다. 애도(mourning)는 사랑하는 대상을 잃었을 때 일어나는 정상적인 반응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실을 받아들이고, 리비도(libido)를 잃은 대상에서 철회하여 새로운 대상에게 투자한다.
하지만 멜랑콜리(melancholia), 즉 병리적 우울은 다르다. 여기서 주체는 잃어버린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림자가 자아 위에 드리운다"고 프로이트는 표현했다. 상실한 대상에 대한 양가감정(ambivalence)—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감정—이 자기 자신에게로 향한다. 그래서 우울한 사람은 자기비난과 자기처벌에 빠진다.
2024년 봄, 나는 퇴직했다.
마지막 출근 날, 부서 사람들은 작은 케이크와 함께 "이제 편히 쉬세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쉰다는 게 뭔지, 나는 몰랐다. 쉰다는 행위는 계획표에 없었다. 25년 동안 상징계—즉 회사라는 질서—가 내 하루를 조직해 주었는데, 그 질서가 사라진 순간, 나는 '무규칙 상태'라는 실재계의 문 앞에 서게 됐다.
대타자의 시선과 주체의 소외
퇴직 후 첫 월요일, 평소처럼 6시에 눈이 떠졌다. 갈 곳이 없었다. 커피를 타서 거실에 앉았지만,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어색했다.
라캉 식으로 말하면, 나를 움직이게 하던 '대타자(the Other)의 시선'이 사라진 자리였다. 대타자는 단순히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상징적 질서 자체, 우리를 주체로 호명하는 거대한 타자다. 회사는 내 시간을 통제했고, 그 속에서 나는 '좋은 직원'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았다.
라캉은 주체가 대타자의 욕망 속에서만 자신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Che vuoi?"(너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대타자의 질문 앞에서, 주체는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 회사라는 대타자는 내게 "성과를 내라", "효율적이 되라", "경쟁에서 이겨라"고 요구했고, 나는 그 요구에 응답하며 나를 구성했다.
가면이 벗겨진 자리에는, 정체 모를 허무와 불안이 피어올랐다. 이것이 라캉이 말하는 '불안(angoisse)'이다. 불안은 대상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대상의 너무 가까운 접근에서 온다. 대타자의 욕망이 사라지자, 나는 내 자신의 욕망이라는 낯선 대상과 맞닥뜨려야 했다.
이후 우울의 주기는 짧아졌다. 2~3주에 한 번, 때로는 일주일에 한 번. 특히 예전 동료들의 소식을 들을 때 심해졌다.
"김 부장이 승진했대."
내가 없어도 회사는 잘 돌아간다는 사실이 서운했다. 그 서운함은 단순한 질투가 아니었다. 라캉의 시각으로 보면, 대타자의 장(場)에서 나를 보장해 주던 '자리'가 지워졌다는 상실감이었다.
팔루스적 기표의 상실
라캉 이론에서 팔루스(phallus)는 단순한 남성 성기가 아니라, 욕망의 기표(signifier)다. 그것은 충만함과 권력, 완전성의 상징이다. 직장에서의 지위, 연봉, 직함—이 모든 것이 팔루스적 기표로 작동했다. 퇴직은 이 기표들의 거세(castration)였다.
프로이트의 거세 콤플렉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핵심이다. 아이는 어머니를 욕망하지만, 아버지의 금지와 거세 위협 앞에서 그 욕망을 포기한다. 이 포기를 통해 초자아(superego)가 형성되고, 아이는 상징계로 진입한다.
나의 퇴직은 두 번째 거세였다. 첫 번째가 유아기의 상징적 거세였다면, 이번은 사회적 거세였다. '홍 부장'이라는 팔루스적 기표를 잃고, 나는 다시 결핍의 주체가 되었다.
통계는 이 변화를 뒷받침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50대 남성의 우울증 진료 인원은 5년 새 43% 늘었다. 특히 퇴직 후 1~2년이 가장 위험하다 한다. 나는 통계 속 '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라캉이 말하듯 **우울은 단순히 기분이 가라앉는 상태가 아니라, '상실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이다. 상실이란 물건을 잃는 것만이 아니다. 나를 설명해 주던 언어, 나를 불러주던 명칭, 나를 필요로 하던 구조가 사라질 때도 상실은 찾아온다.
떡볶이의 발견: 증상과 싱톰
지난해 11월, 목요일이었다.
아침부터 기분이 가라앉았다. 퇴직 후 자주 찾아오는 그 '회색빛 하루'였다. 점심이 되어도 입맛이 없었다.
"뭐 먹을래?" "그냥… 아무거나."
아내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거나가 뭐야. 나가서 뭐라도 먹자."
시장을 지나던 중, 코끝에 익숙하면서도 강렬한 냄새가 스쳤다. 고추장을 기름에 볶는 냄새, 설탕이 눌어붙는 달큰함, 그 위로 김이 피어오르는 장면까지 한꺼번에 몰려왔다.
대상 a와 욕망의 원인
라캉의 이론에서 대상 a(objet petit a)는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원인이다. 그것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원히 잃어버린 대상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원초적 만족의 대상,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떡볶이 냄새는 나에게 대상 a로 작동했다. 그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무언가 잃어버린 것, 하지만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을 환기시켰다. 어린 시절 학교 앞 분식집, 친구들과의 수다, 걱정 없던 시절—이 모든 것이 응축된 하나의 기표.
"떡볶이 먹을래?"
첫 입을 넣는 순간, 혀끝이 찌릿했다. 매운맛이 혀를 세게 때렸고, 곧이어 달콤함이 입안을 감쌌다. 이마에 땀이 맺히자, 아침 내내 나를 짓누르던 무거움이 조금씩 풀려나갔다.
반복강박과 죽음충동
프로이트는 반복강박(repetition compulsion)을 죽음충동의 표현으로 봤다. 트라우마를 입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경험을 꿈에서 반복하듯, 우리는 불쾌한 것조차 반복한다. 이는 쾌락원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라캉은 이를 다르게 해석한다. 반복은 상징계에 완전히 기입되지 않은 실재계의 귀환이다. 트라우마는 언어로 온전히 상징화되지 못한 채 구멍으로 남아, 계속해서 반복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
나의 떡볶이 먹기도 일종의 반복이었다. 우울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강박적으로 분식집을 찾았다. 이 반복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무언가 상징화되지 않은 것을 처리하려는 무의식적 시도였다.
증상에서 싱톰으로
라캉은 후기 이론에서 증상(symptom)과 싱톰(sinthome)을 구분한다. 증상이 해석되고 치료되어야 할 것이라면, 싱톰은 주체를 지탱하는 고유한 방식이다. 조이스의 글쓰기처럼, 싱톰은 주체가 붕괴하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네 번째 고리다.
떡볶이는 나의 싱톰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우울을 달래는 수단이 아니라, 실재계와 상징계, 상상계를 엮어주는 나만의 매듭이었다. 매운맛(실재계), 분식집이라는 장소(상징계), 위로받는 나의 이미지(상상계)가 하나로 묶이는 지점.
심리학자 제임스 고먼의 연구에 따르면, 매운 음식은 엔돌핀과 도파민 분비를 촉진해 일시적으로 기분을 끌어올린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이 행위가 가진 의미 작용이다. 떡볶이는 나에게 일종의 이행대상(transitional object)이었다. 위니컷(Winnicott)이 말한 것처럼, 이행대상은 내적 현실과 외적 현실 사이의 중간 영역에서 작동하며, 불안을 달래고 자아를 지탱한다.
정신분석 대학원의 문을 두드리다
지식에 대한 전이
나는 원래 호기심이 많다. 잘 고쳐지지 않는 성질이다.
특히 사람의 심리를 읽는 걸 좋아한다. 25년간 기획팀에서 일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순간은 회의실에서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할 때였다. 누가 피곤한지, 누가 화를 참는지,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표정의 미세한 움직임과 손끝의 떨림이 많은 것을 말해 주었다.
프로이트는 이를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Psychopathology of Everyday Life)'이라 불렀다. 말실수, 깜빡함, 실수 행위—이 모든 것이 무의식의 메시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미 정신분석가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던 셈이다.
퇴직 후, 우울감이 심해진 어느 날이었다. 떡볶이를 사러 집 근처 시장에 갔다가 우연히 대학 게시판을 보았다.
'라캉 정신분석 석사과정 모집'
라캉이 누군지도 몰랐다. 그러나 '정신분석'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크게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 바로 라캉이 말하는 '지식을 가진 주체에 대한 전이(transference to the subject supposed to know)'의 시작이었다.
무의식의 언어
집으로 돌아와 검색을 시작했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 – 프랑스 정신분석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명제로 유명. 난해하기로 악명 높음.
라캉의 이 명제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을 구조주의 언어학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소쉬르(Saussure)의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 개념을 빌려, 라캉은 무의식이 기표들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은유(metaphor)와 환유(metonymy)는 무의식의 두 가지 기본 작동 방식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압축(condensation)과 치환(displacement)과 같다. 꿈에서 여러 인물이 한 사람으로 압축되거나, 중요한 것이 사소한 것으로 치환되는 것처럼.
내가 회의실에서 관찰하던 표정, 말의 뉘앙스, 대답과 침묵 사이의 간격… 그것이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무의식의 구조를 드러내는 언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침묵도 하나의 기표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주체의 질문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25년간 미친 듯이 살았는데, 이제야 왜 미쳤는지 알아보자.'
이 문장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라캉이 말하는 주체의 질문에 가까웠다. 주체의 질문이란, 대타자가 준 답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던지는 물음이다.
프로이트는 자기분석(self-analysis)을 통해 정신분석을 창시했다. 그의 『꿈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Dreams)』은 자신의 꿈을 분석한 기록이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느낀 죄책감, 어머니에 대한 억압된 욕망—이 모든 것을 그는 스스로 분석했다.
나도 이제 나 자신의 분석가가 되려 했다. 회사와 사회가 내게 던진 질문은 항상 "성과를 냈는가?"였지만, 이제 나는 나에게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고 있었다.
며칠 뒤, 나는 원서 접수를 했다.
그 순간은 단순한 지원 절차가 아니라, 라캉식으로 말하면 '명명(nomination)'의 행위였다. 명명은 주체가 상징계 속에서 새로운 자리를 얻는 사건이다.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했듯, 명명은 존재를 상징계에 기입하는 행위다.
면접장의 충격: 무의식의 발화
면접 날, 나는 25년 동안 몸에 밴 습관대로 정장을 입었다. 다림질이 잘 된 셔츠, 무겁게 떨어지는 재킷, 반짝이는 구두. 그러나 대기실 문을 열자, 나는 순간 제 자리를 잘못 찾은 줄 알았다.
타자의 시선과 불안
'나는 여기서 어떤 사람으로 보일까?'
라캉은 시선(gaze)을 대상 a의 한 형태로 본다. 우리는 타자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지만, 동시에 그 시선에 의해 소외된다. 사르트르(Sartre)가 말한 '시선의 지옥'처럼.
내 차례가 왔다. 교수 세 명이 앉아 있었다.
"지원 동기가 무엇입니까?"
준비했던 말이 있었지만, 입 밖으로는 전혀 다른 문장이 튀어나왔다.
"25년간 직장에서 미친 듯이 살았습니다. 이제야 왜 그렇게 미쳐 있었는지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진실의 순간
프로이트는 이를 '돌파(breakthrough)'라고 부를 것이다. 억압된 것이 검열을 뚫고 의식으로 올라오는 순간. 라캉은 이를 '충만한 말(full speech)'과 '공허한 말(empty speech)'의 대비로 설명한다.
공허한 말은 상상계적 자아가 하는 말, 타자를 의식하고 꾸며진 말이다. 반면 충만한 말은 주체의 진실이 드러나는 말, 무의식이 말하는 순간이다. 나는 면접용 대본을 버리고, 진실을 말해버린 것이다.
"라캉을 아십니까?" "모릅니다. 프로이트는 들어봤습니다."
무지의 설정
이 대화는 나의 무지를 드러냈지만, 동시에 나를 자유롭게 했다. 정신분석에서 분석가는 '무지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아는 전문가가 아니라, 내담자의 무의식이 말하도록 돕는 조력자다.
소크라테스의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정신분석의 근본 태도다. 분석가가 모든 답을 알고 있다면, 내담자의 무의식은 말할 기회를 잃는다.
"정신분석 받아본 적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하지만 25년간 직장 상사들에게 정신적 분석은 충분히 당했습니다."
이 농담은 의외로 정확했다. 인사고과는 일종의 왜곡된 분석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무의식을 듣는 게 아니라, 의식적 성과만을 평가하는 체계였다.
대타자의 욕망을 깨닫다
욕망의 변증법
3월, 첫 수업이었다. 과목명은 '라캉 세미나 읽기'.
교수가 칠판에 분필을 꾹 눌러 쓰기 시작했다.
"대타자의 욕망이 주체의 욕망이다."
이 명제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 변증법에서 출발한다. 헤겔은 자기의식이 타자의 인정을 통해서만 성립한다고 봤다. 코제브(Kojève)는 이를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에 대한 욕망"이라고 해석했다.
라캉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우리는 단순히 타자가 가진 것을 욕망하는 게 아니라,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더 정확히는, 타자가 나에게 욕망하기를 바라는 것을 욕망한다.
"홍 선생님, 직장에서 가장 원했던 게 무엇이었습니까?" "부장 승진이었습니다." "왜 부장이 되고 싶었습니까?" "그게… 성공한 직장인의 기준이니까요." "누구의 기준입니까?"
상징적 동일시
프로이트는 동일시(identification)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째는 사랑하는 대상과의 동일시, 둘째는 잃어버린 대상과의 동일시, 셋째는 욕망을 공유하는 타자와의 히스테리적 동일시다.
내가 추구한 '부장'이라는 지위는 상징적 동일시의 산물이었다. 나는 회사라는 대타자가 제시한 이상적 자아(ideal ego)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것이 진정 내가 원한 것인지 묻지 않고.
라캉은 자아 이상(ego ideal)과 이상적 자아를 구분한다. 자아 이상은 상징계적 동일시의 지점, 내가 대타자의 시선에서 사랑받기 위해 도달하려는 지점이다. 이상적 자아는 상상계적 이미지, 내가 되고 싶은 이상화된 모습이다.
소외와 분리
라캉은 주체의 구성을 소외(alienation)와 분리(separation)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소외는 주체가 언어에 진입하면서 일어난다. 아이가 "나"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언어라는 타자의 체계에 포획된다. "나"라는 기표는 모든 사람이 쓰는 것이지, 진정 '나만의 것'이 아니다.
분리는 이 소외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다. 주체는 대타자도 결핍되어 있음을, 대타자도 모든 답을 갖고 있지 않음을 발견한다. 이 발견을 통해 주체는 자신만의 욕망을 구성할 가능성을 얻는다.
수업이 끝나고, 카페에 앉아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내 욕망이 아닌, 회사의 욕망을 살았다.'
이 깨달음은 분리의 시작이었다. 대타자의 욕망에서 벗어나, 나만의 욕망을 찾아가는 여정의 첫걸음.
동기들과의 만남: 전이와 역전이
나이의 전복
금요일 저녁, 입학 후 첫 회식이 열렸다.
동기 15명 중 내가 최고령이었다. 막내는 24살,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었다.
"선배님이 제일 열심히 하실 것 같아요. 절실하잖아요."
이 말은 일종의 전이(transference)를 담고 있었다. 프로이트가 발견한 전이는 과거의 중요한 인물에 대한 감정을 현재의 누군가에게 옮기는 현상이다. 하지만 라캉은 전이를 더 넓게 본다. 그것은 '지식을 가진 주체(subject supposed to know)'에 대한 가정이다.
동기들은 내 나이와 경험에 '무언가 아는 것'을 투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들 중 가장 무지한 사람이었는데도.
스터디와 배움의 전도
20대 막내 동기가 스터디 그룹에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이게 무슨 말이야?" "아, 그건요…"
24살의 막내가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이 장면은 분석 상황의 전도를 보여준다. 전통적 위계—나이, 경험, 지위—가 무너지고, 순수한 지식 앞에서 평등해지는 순간.
프로이트는 「분석에서 끝나는 것과 끝나지 않는 것」에서 분석가도 계속 분석받아야 한다고 했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경계는 유동적이다. 무의식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떡볶이 의식의 공유
스터디가 끝나면 우리는 늘 신촌의 그 분식집으로 갔다.
"선배님은 왜 맨날 떡볶이 드세요?" "우울할 때 이거 먹으면 좀 나아져." "그것도 일종의 자가 치료네요?"
막내의 이 말은 위니컷의 '충분히 좋은 어머니(good enough mother)'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완벽한 어머니가 아니라, 적당히 실패하면서도 아이의 욕구를 채워주는 어머니. 떡볶이는 내게 '충분히 좋은 위로'였다. 완벽하지 않지만, 견딜 만하게 해주는.
영화관에서 울다: 억압된 것의 귀환
스크린이라는 무의식
학기 중 어느 토요일 오후, 아내와 영화를 보러 갔다.
"아들아, 미안하다. 내가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해서…"
그 순간, 목구멍이 뜨겁게 막혔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적 동일시'였다. 스크린 속 아버지는 나였고, 동시에 내 아버지였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서 꿈은 '억압된 소망의 충족'이다. 영화도 비슷하다. 어둠 속에서, 현실이 중단된 공간에서, 우리는 무의식의 환상을 마주한다.
눈물의 정신분석학
아들이 말없이 아버지의 손을 잡는 장면에서 눈물이 터졌다.
라캉은 눈물을 대상 a의 한 형태로 본다. 눈물은 상징화할 수 없는 것,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신체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실재계의 작은 조각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정동(affect)'의 표출로 봤다. 억압된 것은 표상(representation)과 정동으로 나뉘는데, 표상은 억압되어도 정동은 다른 형태로 표출된다. 불안, 눈물, 신체 증상으로.
카타르시스를 넘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는 정화(purification)다. 비극을 보며 감정을 배출하고 정화되는 것. 하지만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눈물은 단순한 정화가 아니다.
그것은 무의식의 편지다. 프로이트는 "증상은 무의식의 편지"라고 했다. 눈물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아직 읽히지 않은, 해독되기를 기다리는 메시지다.
그날 밤, 나는 깨달았다. 울고 싶을 때와 땀을 흘리고 싶을 때의 느낌은 묘하게 비슷하다. 둘 다 안에 쌓인 것을 밖으로 내보내는 행위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 그 메시지를 어떻게 읽느냐다.
우울의 정체를 마주하다
애도 작업
한 학기가 지난 어느 날, 정신분석 세미나 시간이었다.
"우울은 상실에 대한 반응입니다."
프로이트의 『애도와 멜랑콜리』로 돌아가자. 애도는 정상적 과정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잃었을 때, 우리는 그 대상과 연결된 기억들을 하나씩 점검한다. 그 과정에서 리비도를 조금씩 철회한다. 시간이 걸리지만, 결국 새로운 대상에게 투자할 수 있게 된다.
멜랑콜리는 다르다. 여기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무엇을 잃었는지는 알지만, 그것과 함께 무엇을 잃었는지는 모른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직장을 잃은 것은 알지만, 그것과 함께 잃은 자기 자신의 어떤 부분은 모른다.
상실의 구조
퇴직 후 내가 잃어버린 것들:
직장인이라는 정체성 (상상계적 자아)
동료들과의 관계 (상징계적 유대)
규칙적인 일상 (상징계적 구조)
성과와 성취감 (팔루스적 향유)
사회적 지위 (대타자의 인정)
라캉은 상실을 세 차원에서 본다:
상상계적 상실 - 자아 이미지의 손상
상징계적 상실 - 기표의 연쇄에서 이탈
실재계적 상실 - 주이상스의 상실
우울의 선물
"라캉은 상실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는 정신분석의 역설이다. 증상은 고통이지만 동시에 해결책이다. 우울은 상실의 고통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의 문이다.
클라인(Melanie Klein)의 우울적 자리(depressive position) 개념도 비슷하다. 편집-분열적 자리에서 우울적 자리로의 이행은 성숙이다. 대상을 선과 악으로 분열시키지 않고, 전체로서 받아들이는 능력. 상실을 인정하고 애도하는 능력.
우울과 함께 살아가기: 싱톰의 발견
증상에서 싱톰으로의 전환
2024년 가을 학기, 나는 2학기생이 되었다.
라캉의 후기 이론에서 싱톰(sinthome)은 혁명적 개념이다. 그는 조이스를 분석하며 이 개념을 발전시켰다. 조이스의 글쓰기는 정신병을 막는 싱톰이었다.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보로메오 매듭이 풀릴 때, 싱톰이 네 번째 고리가 되어 구조를 유지한다.
나에게 떡볶이와 정신분석 공부는 싱톰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들은 단순한 취미나 관심사가 아니라, 나를 붕괴로부터 지켜주는 구조적 장치였다.
주체의 재구성
우울이 찾아오면, 이제 나는 세 가지 방법을 쓴다:
떡볶이 의식 - 실재계적 개입. 감각을 통한 주이상스의 경험
운동 - 신체적 방출. 죽음충동의 승화
라캉 읽기 - 상징계적 재구성. 새로운 기표의 연쇄 만들기
이는 프로이트가 말한 '작업을 통한 치료(working through)'다. 단순한 통찰이 아니라, 반복적 작업을 통해 무의식의 매듭을 푸는 과정.
분석의 윤리
라캉은 "정신분석의 윤리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 양보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욕망을 충족시키라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고유한 욕망을 인정하고, 그것을 따르라는 것이다.
대타자의 욕망(승진, 연봉, 지위)에서 벗어나, 나만의 욕망(앎, 이해, 의미)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정신분석이 제시하는 윤리적 주체의 길이다.
정신분석적 삶을 향하여
전이의 해소와 새로운 시작
정신분석은 전이의 해소로 끝난다고 한다. 분석가에게 투사했던 '아는 주체'의 환상이 깨지고, 분석가도 결핍된 주체임을 받아들일 때.
하지만 라캉은 다르게 본다. 분석의 끝은 분석가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무의식을 들을 수 있는 자, 타자의 무의식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자가 되는 것.
나이 50, 새로운 주체되기
프로이트는 50세 이후엔 정신분석이 어렵다고 했다. 리비도가 경직되어 있다고. 하지만 내 경험은 다르다. 오히려 50대는 정신분석의 최적기일 수 있다.
왜냐하면:
대타자의 욕망이 무의미해지는 시기
진짜 자신의 욕망을 물을 수 있는 시기
상실을 인정하고 애도할 수 있는 성숙함
남은 시간의 유한함을 아는 절실함
떡볶이의 정신분석학
떡볶이는 이제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 a (욕망의 원인)
이행대상 (불안을 달래는 매개)
싱톰 (주체를 지탱하는 고유한 방식)
주이상스의 통로 (쾌락 너머의 향유)
매운맛은 실재계의 침입이고, 단맛은 상상계의 위로이며, 분식집이라는 공간은 상징계의 안식처다.
우울의 변증법
우울은 이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상실을 알리는 신호
재구성의 기회
욕망의 나침반
진실의 목소리
우울과 함께 산다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인간 조건의 수용이다. 완전한 치유라는 환상을 버리고, 증상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는 것.
마지막으로
라캉은 말했다. "정신분석의 끝은 없다. 그것은 계속되는 과정이다."
나는 아직 그 과정 중에 있다. 매주 세미나에 참석하고, 동기들과 토론하며, 때로는 떡볶이를 먹으며 무의식의 메시지를 듣는다.
25년간 회사에서 미쳤던 이유를 이제 조금은 안다. 그것은 대타자의 욕망을 내 욕망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묻는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없다. 어쩌면 영원히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그 길 위에는 언제나, 매콤하고 달콤한 떡볶이의 향이 함께한다.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 - 자크 라캉
"때로는 시가는 그저 시가일 뿐이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래도 떡볶이는 언제나 떡볶이 이상이다" - 50대 정신분석학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