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수업, 라캉을 만나다 - 그리고 텔레파시적 전갈
난해함의 충격: 상징계의 균열
나는 어려운 것을 싫어한다. 잘 고쳐지지 않는다. 25년간 기획팀에서 일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쉽게 설명하기'였다.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어려운 것을 쉽게. 그러다 보니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존 내시가 칠판에 수식을 쓰는 장면을 보면 현기증이 났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지적 저항(intellectual resistance)'이었다. 자아가 무의식적 내용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방어벽. 나는 25년간 '명확성'이라는 갑옷으로 무의식의 혼돈을 차단해왔다.
그런데 라캉을 만났다. 정신분석계의 수학자,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프랑스 정신분석가.
학기 4주차 화요일, '라캉 세미나 XI' 수업이었다. 담당 교수는 60대 후반의 최 교수. 프랑스에서 라캉을 직접 만났다는 전설의 인물이었다. 첫인상은 의외로 평범했다. 작은 체구에 은발, 그리고 날카로운 눈빛.
"오늘은 주체의 분열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칠판에 수식 같은 것을 그렸다. $ ◇ a.
"이것이 환상의 공식입니다. $는 분열된 주체, a는 대상 a, ◇는 욕망을 뜻합니다."
마테마(Mathema): 무의식의 수학
라캉은 왜 수학적 기호를 사용했을까? 이것은 단순한 현학취미가 아니었다. 라캉은 정신분석을 과학으로 만들고 싶었다. 프로이트가 신경학에서 출발했듯, 라캉은 수학적 엄밀성을 추구했다.
마테마는 라캉이 만든 용어로, 수학(mathematics)과 테마(theme)의 합성어다. 그는 무의식의 구조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려 했다. 왜? 언어는 애매하지만 수학은 명확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명확한 수학이 가장 난해한 텍스트를 만들었다.
$ ◇ a (환상의 공식)
$ (분열된 주체) : 언어에 진입하면서 분열된 주체
◇ (펀치/다이아몬드) : 욕망의 관계
a (대상 a) : 욕망의 대상-원인
이 공식은 주체가 어떻게 자신의 결핍을 환상적 대상으로 메우려 하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노트에 그대로 그렸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었다. 25년간 PPT와 엑셀로 살아온 나에게 이 기호들은 외계어였다.
최 교수가 계속했다.
"라캉에게 주체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뭔가 결여된 존재죠. 그 결여를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대상을 찾아 헤맵니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원초적 상실(primal loss)' 개념과 연결된다. 아이는 태어나면서 자궁이라는 완전한 세계를 잃는다. 이 상실이 모든 욕망의 원천이 된다.
나는 손을 들었다.
"교수님, 그럼 우리는 평생 부족한 존재란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 정신분석의 시작입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와 통한다. 하지만 정신분석에서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결핍을 안다는 의미다.
수식 공포증과 첫 번째 깨달음: 욕망의 환유
옆자리의 20대 동기 수진이 능숙하게 필기하고 있었다. 심리학과 출신인 그녀는 이미 라캉을 공부한 듯했다.
쉬는 시간, 나는 수진에게 다가갔다.
"이거 무슨 뜻인지 알아?"
"환상의 공식이요? 주체가 자신의 결여를 대상 a로 메우려는 구조를 나타낸 거예요."
"...한국어 맞아?"
수진이 웃었다. "아저씨... 아니, 홍 선배님. 쉽게 설명해드릴게요."
그녀는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선배님이 25년간 원했던 게 뭐였어요?"
"승진?"
"그게 대상 a예요. 선배님($)은 자신에게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고(분열), 그걸 승진(a)으로 채우려 했던 거죠."
"그런데 승진해도 행복하지 않았어..."
"그게 포인트예요! 대상 a는 환상이거든요. 잡으면 사라지고, 다른 대상 a가 나타나죠."
이것은 라캉이 프로이트의 '욕동의 변천(Vicissitudes of the Drive)' 개념을 재해석한 것이다. 욕동은 결코 만족되지 않고, 계속해서 대상을 바꿔가며 순환한다.
수진이 덧붙였다.
"라캉은 이걸 '욕망의 환유(metonymy of desire)'라고 불렀어요. 욕망은 끊임없이 미끄러져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죠."
환유는 언어학 용어다. "청와대가 발표했다"에서 청와대는 대통령을 환유한다. 욕망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승진 자체가 아니라, 승진이 환유하는 무언가다.
"그럼 우리는 평생 만족할 수 없다는 거야?"
"아뇨, 그 구조를 이해하면 달라져요. 욕망에 끌려다니는 게 아니라, 욕망과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죠."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작업을 통한 통찰(working through)'이다.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이해하는 과정.
최 교수의 일갈: 무의식의 언어
5주차, 나는 용기를 내어 질문했다.
"교수님, 라캉은 왜 이렇게 어렵게 썼습니까? 쉽게 쓰면 안 됐나요?"
최 교수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나를 봤다. 그의 눈빛에는 묘한 온기가 있었다.
"홍 선생님은 25년간 기업에 계셨죠?"
"네."
"기업에서는 모든 걸 명확하게, 효율적으로 전달하려 하죠. KPI, ROI 같은 것들."
"맞습니다."
"그런데 무의식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무의식은 애매하고, 모호하고, 다의적입니다. 라캉이 어렵게 쓴 건 무의식의 언어를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꿈의 언어가 일상 언어와 다르다고 했다. 압축, 치환, 상징화... 무의식은 자신만의 문법을 가진다.
나는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독자를 배려해야..."
"홍 선생님, 25년간 회사에서 '배려받은' 적 있습니까?"
"..."
"없죠? 그저 '성과 내라', '효율적으로 하라'는 명령만 받았을 겁니다. 그게 바로 상징계의 폭력입니다. 모든 걸 명확하게 하라는."
이것은 푸코(Foucault)가 말한 '담론의 권력'과도 연결된다. 명확성의 요구 자체가 권력의 작동 방식이다.
최 교수가 칠판에 썼다.
"진리는 반쪽만 말해질 수 있다(La vérité ne peut se dire qu'à moitié). - 라캉"
"무의식의 진리는 PPT 한 장으로 정리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라캉은 일부러 난해하게 쓴 겁니다. 독자가 스스로 의미를 구성하도록."
이것은 바르트(Barthes)의 '저자의 죽음'과도 통한다.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가 아니라 독자가 만든다.
"홍 선생님, 회사에서 '창의적이 되라'고 하면서 동시에 '매뉴얼을 따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그게 바로 이중구속(double bind)입니다.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이죠. 라캉은 이런 모순을 정면으로 드러냅니다."
베이트슨(Bateson)의 이중구속 이론은 정신분열증의 원인을 설명한다. 모순된 메시지를 동시에 받으면 정신이 분열된다.
돌발 해석 - 엘리베이터 꿈: 꿈의 작업
6주차, '꿈의 해석' 시간이었다. 최 교수가 갑자기 나를 지목했다.
"홍 선생님, 최근에 꾼 꿈 하나 말씀해 보세요."
당황스러웠지만 어젯밤 꿈을 떠올렸다.
"회사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계속 올라가기만 하고 멈추지 않는 꿈이었습니다."
"느낌은?"
"무서웠습니다. 내릴 수가 없어서."
프로이트는 꿈을 '무의식으로 가는 왕도(royal road to the unconscious)'라고 했다. 꿈은 억압된 욕망이 검열을 피해 나타나는 통로다.
최 교수가 동기들을 보며 물었다. "누가 해석해볼까요?"
30대 남자 동기가 손을 들었다. "승진에 대한 강박 아닐까요? 계속 올라가야 한다는."
이것은 '상승'이라는 명백한 내용(manifest content)에 대한 해석이다.
20대 여자 동기가 덧붙였다. "퇴직했는데도 아직 회사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요."
이것은 잠재적 내용(latent content)을 찾으려는 시도다.
수진이 말했다. "엘리베이터는 팔루스적 상징이에요. 수직적 위계, 남성적 성취욕..."
프로이트의 상징 해석이다. 길고 뾰족한 것은 남성 성기를, 둥글고 빈 것은 여성 성기를 상징한다는.
전직 스님이 조용히 말했다.
"불교에서는 그런 걸 '업(業)'이라고 합니다. 과거의 행위가 만든 관성이죠. 몸은 회사를 떠났지만 마음은 아직 그 틀 안에 있는 겁니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반복강박'과 유사하다. 과거의 패턴이 무의식적으로 반복된다.
최 교수가 정리했다.
"홍 선생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다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근데 그냥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꿈일 수도..."
모두가 웃었다. 최 교수도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해석입니다. 때로는 시가는 그냥 시가일 뿐이죠. 프로이트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실제로 "때로는 시가는 그냥 시가일 뿐(Sometimes a cigar is just a cigar)"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최 교수가 덧붙였다.
"다만 홍 선생님,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수 없어서' 무서웠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나는 잠시 생각했다.
"아... 제가 스스로 만든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바로 그겁니다. 대타자의 욕망에 갇혀있는 거죠."
프로이트의 텔레파시적 전갈: 오컬트적 관심
바로 그때, 최 교수가 화제를 바꿨다.
"프로이트 하면, 여러분은 그의 '텔레파시적 전갈(Telepathische Botschaft)'에 대해 아십니까?"
학생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처음 듣는 말이었다.
프로이트는 과학적 합리주의자였지만, 말년에 오컬트 현상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꿈과 텔레파시(Dreams and Telepathy)』(1922)와 『정신분석과 텔레파시(Psychoanalysis and Telepathy)』(1941, 사후 출판)에서 이를 다뤘다.
"1920년대, 프로이트는 환자들로부터 이상한 보고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멀리 떨어진 가족의 죽음을 예감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위기를 감지하는 사례들이었죠."
최 교수가 책을 펼쳤다.
"한 환자는 파리에 있으면서 빈에 있는 어머니의 임종 순간을 정확히 감지했습니다. '잘 있거라, 내 아들아'라는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죠. 나중에 확인해보니 정확히 그 시각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직접 기록한 사례다. 그는 과학적 설명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교실이 조용해졌다.
"또 다른 환자는 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딸의 출산 순간을 감지했습니다. 아기 울음소리까지 들었다고 했죠."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그게 정말 가능한가요?"
"프로이트는 과학자였기에 이런 현상을 인정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사례가 보고되자, 그는 이를 '텔레파시적 전갈'이라고 명명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이를 '사고 전이(thought transference)'라고도 불렀다. 무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직접적 소통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최 교수가 독일어로 설명했다.
"Botschaft는 단순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중요한 소식, 특별한 전언을 의미합니다. 프로이트는 이것이 무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직접적인 소통일 수 있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증명할 수 없었나요?" 수진이 물었다.
"프로이트는 '언젠가 과학이 발전하면 설명될 것'이라고만 했습니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답을 모릅니다."
죽음과 무의식 - 도서관에서의 발견: 정현채 교수의 연구
수업이 끝나고 도서관에 갔다. 최 교수가 언급한 텔레파시적 전갈이 너무 궁금했다. 죽음과 무의식에 관한 책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흥미로운 책들을 발견했다.
첫 번째는 정현채 교수의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였다.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가 쓴 책이었다. 그는 임사체험과 죽음에 대해 15년간 연구하고 755회의 강의를 해온 '죽음학 전도사'였다.
정현채 교수는 의학적 관점에서 임사체험(Near-Death Experience, NDE)을 연구했다. 그의 연구는 프로이트가 설명하지 못했던 현상들에 과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책을 펼치니 놀라운 내용이 있었다.
"심정지 상태에서 자신의 몸을 떠나 천장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경험들이 수없이 보고됩니다. 한 40대 남성은 심장마비로 응급실에 실려갔는데, 심폐소생술을 받는 동안 자신의 몸을 떠나 천장에서 의사들이 자신의 가슴을 압박하는 모습을 봤다고 합니다. 특히 한 간호사가 그의 지갑을 빼서 서랍 두 번째 칸에 넣는 것까지 정확히 봤죠. 깨어난 후 이를 그대로 말했고, 실제로 지갑은 서랍 두 번째 칸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지형학적 모델(topographical model)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의식, 전의식, 무의식의 구분을 넘어서는 무언가.
정현채 교수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뇌가 정지한 상태에서 이런 선명한 지각이 가능하다는 것은 의식이 뇌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의식은 뇌가 만들어내는 부산물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무언가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융이 제시한 '정신적 실재(psychic reality)'의 개념과 연결된다. 정신은 물질적 뇌를 넘어서는 독자적 실재를 가진다는 것.
동양학의 시각 - 조용헌의 통찰: 회광반조
다음으로 집어든 책은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였다. 건국대 석좌교수이자 동양학자인 그는 독특한 시각을 제시했다.
"회광반조(回光返照)는 꺼져가는 촛불이 마지막 순간에 가장 밝게 타오르는 것처럼, 죽음을 앞둔 사람이 일시적으로 정신이 맑아지고 기력이 회복되는 현상입니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변증법'과 유사하다. 죽음충동(타나토스) 앞에서 삶충동(에로스)이 마지막 저항을 하는 것.
그는 계속해서 썼다.
"이는 단순한 의학적 현상이 아닙니다. 영혼이 육체를 떠나기 전, 이승에서의 마지막 소임을 다하기 위해 잠시 머무는 시간입니다. 많은 임종 환자들이 며칠 전 갑자기 호전되었다가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평화롭게 떠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조용헌은 또한 동시성(synchronicity)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융이 말한 동시성은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알려진 현상입니다. '천인감응(天人感應)'이라고 하죠.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현상이 자주 일어납니다."
이것은 라캉의 '상징계의 구멍'과 연결될 수 있다. 평소에는 상징계가 차단하지만, 특별한 순간에 실재계가 뚫고 나오는 것.
박청화의 저승사자론: 죽음의 의인화
그리고 박청화의 『실전명리학』에서는 더욱 구체적인 내용을 발견했다. 부산의 사주명리학자인 그는 35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썼다.
"죽음을 앞둔 사람 곁에는 한 달 전부터 저승사자가 서성입니다. 이것은 미신이 아니라 수많은 임종 현장에서 관찰되는 현상입니다. 환자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와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협상을 합니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의인화(personification)'다. 추상적인 죽음을 구체적인 인물로 표상하는 방어기제.
박청화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었다.
"제 친구의 아버지가 폐암 말기였습니다. 의사들은 일주일도 버티기 힘들 것이라고 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가족들을 불러 모으고 각자에게 필요한 말을 전했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준비한 것처럼 조리 있게 말이죠. 그리고 3일 후, 미국에서 급히 귀국한 막내딸이 병실 문을 열고 '아빠!'라고 외치는 순간, 평화롭게 눈을 감으셨습니다."
이런 현상을 박청화는 '시간의 유예'라고 불렀다.
"저승사자도 인간의 간절한 소망 앞에서는 자비를 베풉니다. 특히 가족과의 마지막 인사를 위해서는 며칠의 시간을 허락하죠."
이것은 라캉이 말한 '상징적 부채(symbolic debt)'의 청산일 수 있다. 죽기 전에 반드시 갚아야 할 상징적 빚.
스터디 모임에서의 토론: 집단 정신분석
그날 저녁, 라캉 스터디 모임이 있었다. 우리 73 동기들이 모였다. 전직 의사, 교사, 스님, 회계사 등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비온(Bion)이 개발한 '집단 정신분석(group psychoanalysis)'의 형태였다. 개인의 무의식이 집단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관찰하는 장.
나는 도서관에서 읽은 내용을 공유했다.
"정현채 교수 책에 보면,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떠나 천장에서 내려다봤다는데..."
전직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학적으로는 '체외이탈경험(Out-of-Body Experience, OBE)'이라고 합니다. 뇌의 측두엽이 자극받을 때 일어난다는 설명도 있지만, 완전히 설명되지는 않아요."
이것은 프로이트가 경계했던 '야생 정신분석(wild psychoanalysis)'의 위험을 보여준다. 과학적 근거 없이 무의식을 설명하려는 시도.
"그럼 정말 영혼이 있는 건가요?" 전직 교사가 물었다.
전직 스님이 조용히 말했다.
"불교에서는 '중음신(中陰身)'이라고 합니다. 죽음과 다음 생 사이의 중간 상태죠. 49일 동안 떠돈다고 하는데,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의식의 전이 과정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일차 과정(primary process)'과 '이차 과정(secondary process)'의 구분과 유사하다. 죽음은 이차 과정(논리적 사고)에서 일차 과정(무의식적 사고)으로의 회귀일 수 있다.
회계사 출신 동기가 의외의 말을 했다.
"저도 경험이 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서 전화했더니 병원에 계셨어요. 그날 밤 돌아가셨죠."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융의 동시성과 양자물리학: 과학과 정신분석의 만남
다음 주, 최 교수가 융의 이론을 소개했다.
"융은 프로이트보다 더 과감했습니다. 그는 '동시성(Synchronicity)'이라는 개념으로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의미 있는 우연들을 설명하려 했죠."
융은 1952년 물리학자 파울리(Wolfgang Pauli)와 함께 『동시성: 비인과적 연결 원리(Synchronicity: An Acausal Connecting Principle)』를 출간했다. 정신분석과 양자물리학의 만남이었다.
최 교수가 칠판에 그림을 그렸다.
"융 자신도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1949년 어느 날 밤, 꿈속에서 돌아가신 이모를 만났는데, '칼, 이제 떠날 시간이야'라고 했다고 합니다. 꿈에서 깬 시각이 새벽 2시 15분이었는데, 다음날 확인해보니 정확히 그 시각에 이모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수진이 손을 들었다.
"그건 우연의 일치 아닐까요?"
"융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것이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봤죠. 모든 인간의 무의식은 깊은 곳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집단무의식은 개인무의식보다 더 깊은 층위다. 인류가 공유하는 원형(archetype)들이 저장된 곳.
최 교수가 현대 물리학 이야기를 꺼냈다.
"흥미롭게도 양자물리학의 '얽힘(quantum entanglement)' 현상이 이와 유사합니다. 한 번 상호작용한 입자들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즉각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죠."
아인슈타인은 이를 '으스스한 원거리 작용(spooky action at a distance)'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현대 실험은 이것이 실재함을 증명했다.
"그럼 인간의 의식도 양자적 특성을 가질 수 있나요?" 내가 물었다.
"일부 과학자들은 그렇게 주장합니다. 로저 펜로즈(Roger Penrose)와 스튜어트 해머로프(Stuart Hameroff)는 의식이 뇌의 미세소관(microtubule)에서 일어나는 양자적 과정일 수 있다고 했죠. 이것이 사실이라면, 의식은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양자 의식 이론(Quantum Consciousness Theory)'이다. 아직 증명되지 않았지만, 프로이트의 텔레파시적 전갈을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
라캉과 죽음충동: 상징적 죽음
학기 중반, 라캉의 죽음충동 개념을 배웠다.
"프로이트는 에로스(삶충동)와 타나토스(죽음충동)를 구분했습니다. 라캉은 여기서 더 나아가 죽음충동을 상징계로의 진입과 연결시켰죠."
프로이트의 이원론적 충동 이론은 『쾌락원칙을 넘어서』(1920)에서 제시됐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목격한 후, 그는 인간 정신의 파괴적 측면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 교수가 칠판에 복잡한 도식을 그렸다.
"주체가 언어의 세계(상징계)에 들어오는 순간, 실재계와의 연결은 끊어집니다. 이것이 일종의 죽음이죠. 우리는 언어를 획득하면서 직접적인 존재에서 분리됩니다."
이것은 하이데거(Heidegger)의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와도 연결된다. 언어는 존재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은폐한다.
"그럼 우리는 이미 죽은 거네요?" 누군가 물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습니다. 라캉은 이를 '상징적 죽음(symbolic death)'이라고 불렀죠. 우리는 언어의 세계에 들어오면서 실재를 잃어버립니다."
안티고네 신화가 좋은 예다. 그녀는 상징적 질서(크레온의 법)를 거부하고 실재계(오빠의 시신)를 선택한다. 이것이 그녀의 비극이자 숭고함.
수진이 손을 들었다.
"그럼 임종 순간에는 다시 실재계와 만나는 건가요?"
"흥미로운 해석입니다. 죽음의 순간, 상징계의 그물에서 벗어나 실재와 대면한다... 어쩌면 그래서 임종을 앞둔 사람들이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지도 모릅니다."
최 교수가 잠시 멈추고 창밖을 봤다.
"라캉은 죽음을 '마지막 시니피앙(final signifier)'이라고 했습니다. 더 이상 의미화할 수 없는 지점, 상징계의 한계점이죠."
증상으로서의 텔레파시: 억압된 것의 회귀
"그런데 텔레파시적 전갈을 라캉적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될까요?" 최 교수가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라캉에게 증상은 억압된 것의 회귀입니다. 텔레파시적 전갈도 일종의 증상일 수 있죠. 평소에는 억압되어 있던 타자와의 근원적 연결이 위기 상황에서 돌파하는 겁니다."
프로이트는 『억압(Repression)』(1915)에서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고 했다. 다만 변형된 형태로.
"그럼 우리는 원래 연결되어 있었다는 건가요?" 내가 물었다.
"라캉의 '거울 단계(mirror stage)' 이론을 기억하세요. 아이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통합된 하나로 인식하게 되지만, 그것은 환상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파편화되어 있고, 타자와 뒤섞여 있죠."
거울 단계 이전, 아이는 어머니와 분리되지 않은 상태다. 이 원초적 융합의 기억이 무의식에 남아있다.
최 교수가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텔레파시적 전갈은 그 원초적 연결성의 흔적일지도 모릅니다."
스티브 잡스와 실재계: 마지막 순간의 비전
어느 날, 최 교수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스티브 잡스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뭔지 아십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의 『어느 요기의 자서전(Autobiography of a Yogi)』입니다. 이 책은 인도의 영적 전통과 환생, 그리고 의식의 불멸성에 대해 다룹니다."
"IT 혁명가가 왜 그런 책을?" 누군가 물었다.
"잡스는 평생 '현실 왜곡장(Reality Distortion Field)'으로 유명했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능력. 어쩌면 그는 실재계의 힘을 직관적으로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현실 왜곡장은 라캉의 환상($◇a)과 유사하다. 현실을 자신의 욕망에 맞게 재구성하는 능력.
최 교수가 계속했다.
"2011년 10월 5일, 잡스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여동생 모나 심슨(Mona Simpson)은 추도사에서 그의 마지막 말을 전했죠."
칠판에 크게 썼다.
"OH WOW. OH WOW. OH WOW."
"그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실재계?" 수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죠. 라캉은 실재계를 '상징화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OH WOW' 외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을지도."
실재계는 숭고(sublime)와 연결된다. 칸트가 말한 숭고는 표상 불가능한 것 앞에서 느끼는 감정.
교실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죽음 준비 교육: 애도 작업
스터디 모임에서 우리는 정현채 교수의 '죽음 준비 교육'에 대해 토론했다.
"정현채 교수는 죽음을 '소멸'이 아닌 '옮겨감'으로 본대." 전직 의사가 말했다.
"그게 더 위로가 되긴 하지." 전직 교사가 동의했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애도와 멜랑콜리』에서 말한 '애도 작업(work of mourning)'과 연결된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 자체가 치유다.
전직 스님이 덧붙였다.
"티베트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죽음 후 49일 동안의 여정을 자세히 설명하죠. 서구에서는 『티베트 죽음의 책』으로 알려져 있고요."
융은 이 책에 서문을 썼다. 그는 동양의 지혜가 서구 정신분석을 보완할 수 있다고 봤다.
"근데 그게 사실일까요?" 회계사 출신이 물었다.
"중요한 건 사실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주는 의미 아닐까요?" 내가 말했다. "라캉도 말했잖아요. 진실보다 중요한 건 주체의 진리라고."
텔레파시적 전갈을 받는 법: 무의식의 수용
어느 날, 수진이 흥미로운 자료를 가져왔다.
"정현채 교수 책에 텔레파시적 소통을 위한 방법이 나와 있어요."
우리는 귀를 기울였다.
"첫째, 고요함이 필요하대요. 현대인의 바쁜 일상에서는 미세한 신호를 감지하기 어렵다고."
이것은 프로이트의 '고르게 떠 있는 주의(evenly suspended attention)'와 유사하다. 분석가가 환자의 무의식을 듣는 자세.
"명상 같은 거?" 내가 물었다.
"그렇죠. 둘째는 직관을 신뢰하는 거예요. 갑자기 누군가가 떠오르면 연락해보라고."
프로이트는 이를 '자유연상(free association)'이라 불렀다. 의식의 검열을 풀고 떠오르는 대로 따라가는 것.
전직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런 경험 많아요. 환자가 갑자기 생각나서 전화했더니 응급상황이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죠."
"셋째는 꿈에 주목하는 거예요. 많은 텔레파시적 소통이 꿈을 통해 일어난다고."
프로이트는 꿈을 '검열이 느슨해진 상태'라고 했다. 그래서 무의식의 메시지가 더 쉽게 전달된다.
전직 스님이 말했다.
"불교에서도 꿈을 중요하게 봅니다. 특히 새벽 꿈은 '진몽(眞夢)'이라고 해서 예지적 성격이 있다고 하죠."
라캉의 편지: 무의식의 메시지
학기 말이 다가오자, 최 교수가 라캉의 유명한 명제를 소개했다.
"편지는 항상 목적지에 도착한다(A letter always arrives at its destination)."
이것은 라캉이 포의 『도둑맞은 편지』를 분석하며 제시한 명제다.
"무슨 뜻인가요?" 내가 물었다.
"무의식의 메시지는 결국 전달된다는 뜻입니다. 때로는 꿈으로, 때로는 증상으로, 때로는... 텔레파시적 전갈로."
최 교수가 우리를 둘러봤다.
"여러분이 이 수업을 듣게 된 것도 일종의 편지가 도착한 것일 수 있습니다. 무의식이 보낸 메시지가."
"그럼 우리가 여기 모인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건가요?" 수진이 물었다.
"라캉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무의식의 구조 속에서 일어나죠."
이것은 프로이트의 '정신적 결정론(psychic determinism)'과 같다. 모든 정신 현상에는 원인이 있다.
상징계의 구멍: 죽음과 실재
"죽음은 상징계의 구멍입니다." 최 교수가 말했다.
"상징계는 언어로 이루어진 질서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언어로 포착할 수 없죠.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은유와 환유로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은유: 잠, 여행, 이별... 죽음의 환유: 관, 묘지, 장례식...
칠판에 도식을 그렸다.
"텔레파시적 전갈은 이 구멍을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일 수 있습니다. 상징계의 질서가 무너지는 순간, 실재가 침입하는 거죠."
"그럼 임종 환자들이 보는 환영도..." 누군가 말했다.
"그것도 실재의 침입일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상징계가 차단하던 것들이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거죠."
우리 모두의 연결: 집단무의식과 양자 얽힘
학기말 리포트를 쓰면서, 나는 깊은 성찰에 빠졌다.
프로이트의 텔레파시적 전갈, 라캉의 상징계와 실재계, 융의 동시성, 그리고 정현채, 조용헌, 박청화가 말하는 동양적 죽음관.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나는 리포트에 썼다:
"현대인은 개인주의의 환상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각자 독립된 개체라고 믿는다. 하지만 텔레파시적 전갈은 이 환상을 깨뜨린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연결은 죽음조차 끊을 수 없다.
프로이트는 과학의 한계 앞에서 텔레파시를 인정했다. 융은 동시성으로 의미 있는 우연을 설명했다. 라캉은 실재계의 침입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포착했다.
정현채 교수는 죽음이 '소멸'이 아닌 '옮겨감'이라 했다. 조용헌은 회광반조를 영혼의 마지막 인사라 했다. 박청화는 저승사자와의 협상을 말했다.
이들의 통찰은 라캉의 이론과 맞닿아 있다. 죽음은 상징계의 종말이지만, 동시에 실재계로의 회귀다. 우리가 언어를 획득하면서 잃어버린 그 무언가로 돌아가는 것이다.
양자물리학은 이를 과학적으로 뒷받침한다. 얽힘 현상은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입자들이 실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의식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라캉이 어렵다고? 그래도 계속 읽는다. 왜냐하면 라캉은 우리가 느끼지만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을 말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산 자와 죽은 자, 의식과 무의식, 상징계와 실재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메시지가 오간다.
그것이 바로 인간 존재의 신비다."
새벽 3시 15분의 기적: 동시성의 경험
지금은 새벽 3시 15분이다.
나는 라캉의 『에크리』를 읽다가 잠시 멈췄다. 창밖을 보니 별이 빛나고 있다.
이 시각은 프로이트가 말한 '마법적 사고(magical thinking)'가 활발해지는 때다. 의식의 검열이 느슨해지고, 무의식이 표면으로 올라온다.
이 시각,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메시지가 오가고 있을 것이다.
휴대폰이 울렸다. 73 모임 단톡방이었다.
"새벽 3시인데 다들 깨어 있네요?" - 전직 의사 "라캉 읽다가 잠이 안 와요." - 전직 교사
"저는 텔레파시적 전갈 생각하고 있었어요." - 나 "우리 모두 연결되어 있는 거죠." - 전직 스님 "이 시각에 다 깨어있다는 것도 동시성 아닐까요?" - 수진 "아니면 집단 무의식?" - 회계사 출신
우리는 각자의 집에서, 각자의 삶을 살면서도 이렇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이 융이 말한 동시성인지, 프로이트의 텔레파시인지, 라캉의 실재계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편지는 도착했다
한 학기가 끝났다.
나는 라캉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여전히 그의 텍스트는 난해하고, 그의 수식은 복잡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우리가 찾던 답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우리 사이에 있었다는 것.
최 교수가 마지막 수업에서 말했다.
"라캉을 읽는 것은 자신의 무의식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것은 라캉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다. 우리는 자신을 마주하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라캉이 어려운 것이다.
프로이트는 말했다. "정신분석의 목표는 이드가 있던 곳에 자아가 오게 하는 것(Wo Es war, soll Ich werden)."
하지만 라캉은 다르게 해석한다. "주체가 있던 곳에 내가 와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의식화가 아니다. 무의식의 주체를 인정하고, 그와 대화하는 것이다.
내일은 '라캉 세미나 XX: 앙코르' 첫 수업이다. 여성적 향유라는 주제인데... 또 머리 아플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다.
우리가 함께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편지는 이미 도착했으니까.
텔레파시적 전갈로.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 - 자크 라캉
"때로는 시가는 그저 시가일 뿐이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 칼 구스타브 융
"그리고 편지는 항상 도착한다." - 50대 정신분석학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