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방랑, 언더핸드로 인생을 던지다
20년 방랑 속에서 마주한 고독과 자유
- 김병현, 언더핸드로 쓴 20년 방랑기
돌멩이와 운명
"어린 시절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데모하는 대학생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돌을 너무 못 던져서 제가 돌을 던졌어요. 잘 던진다고 칭찬받았죠. 계속 돌을 던지던 중 언더스로로 던지면 더 멀리 나간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 김병현,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인터뷰 중
1979년 광주에서 태어난 소년 김병현. 5.18의 도시에서 자란 그는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던진 돌멩이로 자신의 재능을 발견했다. 운명의 장난일까. 그 돌멩이는 훗날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향한 공이 되었다.
무등중학교 3학년, 유격수에서 투수로 전향한 그가 장난삼아 언더핸드로 공을 던지고 있을 때, 해태 타이거즈 투수 방수원이 다가왔다.
"너는 언더핸드로 던지는 것에 재능이 있구나."
그 한마디가 한 소년의 인생을 바꿨다. 라캉이 말하는 '타자의 욕망'이 주체를 형성하는 순간이었다. 김병현은 그렇게 언더핸드 투수가 되었고, 그것은 축복이자 저주가 되었다.
제1막: 스무 살, 225만 달러의 무게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중국과의 준결승전에서 김병현은 6이닝 동안 퍼펙트 피칭을 하며 8타자 연속 삼진이라는 전설을 썼다. 그때 그는 박찬호가 던지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찬호형이 이 정도 하는데 잘하는 거면, 나도 잘할 수 있겠다."
당돌했다. 그리고 그 당돌함은 현실이 되었다. 1999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는 한국 아마추어 선수 사상 최고액인 225만 달러를 들고 김병현을 찾아왔다.
메이저리그 데뷔전. 1999년 5월 30일, 뉴욕 메츠전.
당대 최고의 공격형 포수 마이크 피아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김병현의 언더핸드 공이 피아자의 방망이를 헛돌게 했다. 삼진. 그리고 세이브. 메이저리그 데뷔전에서 세이브를 기록한 아시아 투수의 탄생이었다.
팀 동료이자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좌완 파이어볼러 랜디 존슨이 말했다.
"삼진을 잡는 능력만큼은 나보다도 뛰어나다."
'BK(Born to K)', 타고난 삼진 투수라는 별명이 붙었다. 2002년에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전에서 한 이닝 9구로 3탈삼진을 잡아내며 전설이 되었다.
제2막: 2001년 10월, 양키스타디움의 악몽
2001년 월드시리즈. 애리조나는 2승 1패로 앞서고 있었다. 4차전, 양키스타디움.
3-1로 앞선 8회말, 김병현이 마운드에 올랐다. 스펜서, 브로셔스, 소리아노.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완벽했다.
9회말. 첫 타자 데릭 지터를 땅볼로 잡았다. 폴 오닐에게 안타를 맞았지만, 버니 윌리엄스를 다시 삼진으로 잡았다. 두 아웃, 원 온.
그리고 티노 마르티네즈.
"홈런을 맞는 순간, 다른 것보다 마이크 모건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은퇴를 앞둔 베테랑 투수 모건이 저를 무척 예뻐했거든요. 저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데... '지금까지 한 번도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했는데 드디어 우승 반지를 받고 은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좋아했어요. 동점 홈런을 맞는 순간 모건의 얼굴이 떠올라 주저앉았던 거예요."
- 김병현, 2018년 스포티비뉴스 인터뷰
동점. 그리고 연장 10회, 데릭 지터에게 끝내기 홈런. 패배.
5차전. 다시 9회말 마운드. 2-0으로 앞서고 있었다. 호르헤 포사다에게 2루타를 맞았지만, 두 아웃까지 잡았다.
그리고 또 스캇 브로셔스.
동점 투런 홈런. 김병현은 마운드에 주저앉았다. 카메라가 그 모습을 전 세계에 중계했다. 한국인 최초로 월드시리즈에 등판한 투수의 좌절. 그것은 영웅 신화의 균열이었다.
하지만 애리조나는 이겼다. 6차전과 7차전을 내리 이기며 창단 첫 월드시리즈 우승. 7차전 9회말, 양키스의 전설적 마무리 마리아노 리베라를 상대로 역전승을 거둔 그 드라마틱한 우승은 김병현의 실패가 있었기에 더 극적이었다.
커트 실링이 김병현에게 말했다.
"우리는 BK가 아니었으면 월드시리즈 진출도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 애리조나를 책임질 젊은 투수가 될 것이다."
2002년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사진 촬영 때 김병현 바로 뒤에 섰다. 마치 그를 감싸안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때 야구선수를 꿈꿨던 부시는 젊은 투수가 겪었을 상실감을 이해했던 것일까.
제3막: 방랑, 그리고 잃어버린 반지
2002년 36세이브로 올스타가 된 김병현. 하지만 발목 부상과 함께 하락세가 시작됐다. 2003년 보스턴으로 트레이드. 펜웨이파크에서 홈 팬들에게 법규를 날린 사건. 감독은 그를 포스트시즌 엔트리에서 제외했다.
2004년, 보스턴은 86년 만에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했다. 김병현도 우승 반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엔트리에 없었다. "1+1"이라고 그는 농담처럼 말한다. 하나는 피와 땀으로, 하나는 보너스로.
"원래 물건을 소중하게 다루지 않는 편이라 반지를 어디에 뒀는지 기억을 못했어요. 분실한 줄 알았는데 광주에 계시는 아버지가 다행히 나중에 찾아주셨어요."
- 김병현, 2018년 인터뷰
콜로라도, 플로리다, 일본 라쿠텐... 그는 계속 떠돌았다. 라캉이 말하는 '욕망의 환유'. 진짜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없어 계속 다른 대상으로 미끄러지는 욕망.
정규시즌 98이닝을 구원으로 던진 2001년. 그것은 명백한 혹사였다. 스물둘의 어린 투수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고, 그 대가로 영광과 좌절을 동시에 맛봤다.
제4막: 귀향, 그리고 불혹의 집착
2012년, 서른넷의 김병현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넥센 히어로즈. 첫 승은 두산전에서 왔다. 6이닝 1실점. 여전히 던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2014년 KIA 타이거즈. 고향팀. 하지만 방어율은 8점대를 찍었다. 2015년, 서재응과 최희섭이 은퇴를 선언했다. 광주일고 트리오 중 홀로 남은 김병현.
"지금까지 던진 건 내가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왜 그는 마운드를 떠나지 못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방수원 코치의 그 한마디, "너는 언더핸드로 던지는 것에 재능이 있구나"가 만든 운명의 굴레였을 것이다.
2016년, 임창용이 KIA에 합류했다. 1998 방콕 아시안게임 드림팀의 투수 생존자들이 한 팀에 모였다. 하지만 김병현의 몸은 더 이상 따라주지 않았다.
제5막: 호주, 마침내 찾은 것
2018년, 마흔을 앞둔 김병현은 호주 멜버른 에이시즈에 있었다. 한국, 미국, 일본, 도미니카공화국에 이어 다섯 번째 나라.
거기서 그는 무언가를 찾았다.
"원하던 모습을 다시 봤으니 이제 물러날 때가 됐다."
2019년 1월 3일, 은퇴 선언.
그가 찾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완벽한 언더핸드 투구? 아니면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평온함?
에필로그: 광주제일햄버고의 사장님
은퇴 후 김병현은 광주 금남로에서 햄버거 가게를 운영한다. '광주제일햄버고'. 여전히 '제일'을 추구하는 그의 욕망이 담긴 이름.
MBC 해설위원으로, '뭉쳐야 찬다'의 출연자로, 그는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더 이상 'BK'가 아닌 '법규형'으로 불리는 그. 트라우마는 웃음이 되었고, 실패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2019년, 류현진이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을 때 김병현이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 아프지만 않다면 미국에 있는 한국인 선수 중에 가장 걱정하지 않아도 될 선수다."
후배를 향한 따뜻한 응원. 자신이 겪은 아픔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진심 어린 격려였다.
2023년, 애리조나가 22년 만에 다시 월드시리즈에 올랐을 때, 마무리 폴 시월드가 9회 동점 홈런을 맞고 무너졌다. 언론은 2001년 김병현을 소환했다. 하지만 애리조나 감독 토레이 로불로는 담담했다.
"팬들은 김병현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난 전혀 아니다."
시간이 흘렀다. 상처는 역사가 되었고, 실패는 전설이 되었다.
마지막: 영원한 언더핸드
김병현의 삶은 한 편의 대서사시다.
타자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정체성. 월드시리즈라는 거대한 무대에서의 좌절. 끊임없는 방랑. 불혹의 나이에도 놓지 못한 집착. 그리고 마침내 찾은 평온.
아직도 애리조나 체이스필드에는 김병현의 기록이 남아있다. 구원투수 통산 탈삼진 1위 - 345개. 애리조나 명예의 전당에 영원히 새겨진 그의 이름.
랜디 존슨이 인정한 삼진 능력. 커트 실링이 믿어준 젊은 에이스. 마이크 모건이 꿈꿨던 우승 반지. 부시 대통령이 감싸준 어깨.
그 모든 것이 김병현이다.
언더핸드로 던진 공 하나하나에는 광주 소년의 꿈이, 스무 살 청년의 패기가, 마흔 남자의 집념이 담겨 있었다.
"너는 언더핸드로 던지는 것에 재능이 있구나."
방수원 코치의 그 한마디가 만든 20년 여정. 그리고 그 여정을 끝까지 완주한 한 남자.
이제 김병현은 더 이상 공을 던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언더핸드는 우리 기억 속에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그런 우리들의 이야기.
"지금까지 던진 건 내가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원하던 모습을 다시 봤으니 이제 물러날 때가 됐다."
2019년 1월 3일, 호주 멜버른에서 김병현의 마지막 언더핸드가 멈췄다.
그리고 비로소, 평온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