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에서 후련함으로-라캉적 시선으로 본 한 사람의 기억
by 홍종민 Aug 28. 2025 brunch_membership's
정신분석의 핵심 도구인 자유연상을 통해 자기분석을 시도하던 중, "오늘은 지금, 현실에 지난날의 과오가 후회돼네"라는 문장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 순간적인 대사를 곱씹어보니, 과거의 경험이 현재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전이반복'의 개념과 맞닿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과 그것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모두 과거의 '전이'가 현재에 출현하는 것일까? 우리의 현재는 과연 과거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1부. 후회라는 말의 무게
“오늘은 지금, 현실에 지난날의 과오가 후회돼네.”
그날, 나는 무심히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무도 듣지 않는 공간에서 흘러나온 말이었지만, 내 몸은 즉각 반응했다. 후회의 단어가 목에 걸려, 마치 삼키지 못한 음식처럼 답답하게 막히는 느낌. 말은 분명 밖으로 나왔는데, 동시에 내 안에 갇힌 채 흐르지 못하는 듯했다.
후회란 언제나 과거에 묶여 있는 감정처럼 보인다.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하지만 이번에 느낀 후회는 조금 달랐다. 과거의 장면을 떠올린 것도 아니었는데, 말은 “오늘은 지금”이라는 현재 시제로 시작됐다. 언뜻 어색한 이 겹말 속에는 사실 무의식의 구조가 드러나 있었다. “오늘”이면 이미 “지금”인데, 굳이 겹쳐 쓴 것은 현재가 현재답지 못하다는 무언의 고백이었다.
라캉은 무의식을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했다. 무의식은 우리의 말실수, 반복, 억양, 사소한 표현 속에서 고개를 내민다. 내가 굳이 “오늘은 지금”이라고 겹쳐 말한 것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재라는 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흔적이었다. 지금을 살고 있는데, 여전히 지난날의 그림자가 겹쳐지는 상태. 후회란 그렇게 현재와 과거가 동시에 눌러앉은 자리에서 솟아난다.
목에 걸린 응어리는 그 사실을 신체로 알려주고 있었다. 후회라는 단어는 이미 입 밖으로 나왔지만, 그것이 지칭하는 내용은 여전히 말로 붙잡히지 않았다. 언어는 말해졌으나, 의미는 비어 있었다. 그래서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정신분석에서는 이런 현상을 흔히 본다. 말로 표현되지 못한 무의식적 진실은 몸을 통과해 나타난다. 위장이 조여오거나, 목이 막히거나, 가슴이 답답해지는 식으로.
후회의 말은 그래서 단순히 심리적 현상이 아니라, 신체의 사건이기도 하다. 목이 막힌다는 건 아직 말해지지 않은 기억, 붙잡히지 않은 감정이 있다는 뜻이다. 언어의 빈틈이 몸에 남긴 흔적, 그게 바로 내가 처음 경험한 ‘후회의 무게’였다.
그 순간 나는 자문했다.
“과연 내가 후회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왜 지금, 왜 오늘에 와서야 이 말이 튀어나온 걸까?”
후회는 단순한 자기비난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아직 언어로 붙잡지 못한 기억이 다시 나를 찾고 있다는 신호였다. 내가 목으로 느낀 그 응어리는, 무의식이 던져준 작은 열쇠였다.
2부. 다섯 살의 장례식
후회의 응어리를 더듬어가자, 오래 묻어두었던 장면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다섯 살 무렵, 할머니의 장례식.
나는 장례식장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 조문객들 사이에 끼지도 않았고, 할머니의 관 앞에 제대로 서 있지도 않았다. 대신 친구들과 함께 바깥에서 뛰어놀았다. 검은 옷을 입은 어른들의 흐릿한 얼굴, 울음소리와 향 냄새, 분주한 발걸음들. 그 모든 것이 내겐 너무 낯설고 무거웠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를 가볍게 지나쳐 버렸다. 아이의 몸은 본능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을 피해간다.
어른이 된 지금, 나는 그 장면을 “과오”라 불렀다. 장례식에서 놀았던 아이, 너무 무심한 아이. 그 기억은 늘 후회의 그림자로 남았다. 하지만 정신분석적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것은 잘못이라기보다 생존의 방식이었다. 다섯 살의 아이가 죽음이라는 실재를 감당할 언어를 갖고 있을 리 없다. 라캉이 말한 실재(Real)는 상징화되지 못한 채 갑자기 닥쳐오는 사건이다. 그것은 아이의 세계를 뚫고 들어오지만, 말로 붙잡을 수 없어 몸은 즉각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간다.
그때 나에게 그 다른 방향은 ‘놀이’였다. 뛰어노는 몸짓은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죽음의 무게로부터 벗어나려는 본능적 탈출이었다. 죽음을 모르고 논 것이 아니라, 죽음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논 것이다. 후회는 뒤늦게 덧씌워진 감정일 뿐, 그 순간의 아이에게 놀이는 생존의 언어였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의 장면에서 가장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엄마의 모습이다. 분주히 움직이며 사람들을 맞이하고, 절차를 챙기느라 내 곁에 머물지 못했던 엄마. 내 눈은 자꾸만 그 바쁜 몸짓을 좇았다. 엄마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던 나는, 결국 친구들 곁으로 달아나듯 숨어들었다.
여기서 중요한 전이가 발생한다. 나는 장례식의 무게를 온전히 기억하지 않는다. 대신 “엄마가 나를 보지 못한 순간”을 각인했다. 할머니의 죽음은 실재의 사건이었지만, 아이의 무의식에는 그것이 “엄마의 부재”라는 상징으로 치환되어 새겨졌다. 그래서 훗날 나는 그 기억을 후회로 불러냈다. 사실 후회의 정체는 죽음의 과오가 아니라, 엄마의 시선에서 놓여났던 쓸쓸함이었다.
이 지점에서 정신분석의 통찰이 스며든다. 우리가 “후회”라고 부르는 것 중 많은 부분은 실제 잘못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아직 언어로 이름 붙이지 못한 결핍, 그 결핍이 남긴 쓸쓸함 때문이다. 다섯 살의 나는 죽음을 피해 달아난 것이 아니라, 엄마의 시선에서 떨어져 쓸쓸하게 남겨졌던 것이다. 후회는 바로 그 쓸쓸함의 재현이었다.
3부. 엄마의 바쁨과 쓸쓸한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