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액체 이불을 걷어차라: 불편함이 주는 자유
상징계의 붕괴
"위스키가 뒤섞인 토사물을 뒤집어쓴 채 고통과 함께 깨어났다."
마이클 이스터의 『편안함의 습격』에 나오는 이 문장 앞에서 나는 멈춰 섰다. 그는 계속 쓴다. "그런 모양새로 맞는 이틀째 아침이었고, 이전에도 숱하게 경험했던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날 아침은 뭔가 달랐다."
이스터는 낮에는 저명한 건강 저널리스트였다. "꽤 이름 있는 잡지의 건강 저널리스트로서 더 나은 삶을 사는 방법을 전파해왔다. 남부럽지 않은 경력을 가졌으며 일도 꽤나 잘했다." 하지만 밤이 되면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는 내가 끼적여댄 지혜에 따라 살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로 술에 취했다가 또다시 술에 집착하는 상황을 반복하며 살았다."
이 이중생활의 아이러니. 그는 "일종의 직업적 위선자"였다. 사람들에게 건강한 삶을 설교하면서 자신은 "주말마다 이어지는 폭음의 굴레 속에서 여러 해를 허비했다."
무엇이 달랐을까? 그날 아침, 이스터는 설명한다. "머릿속이 또렷했다... 내 삶이 있는 그대로 보였다. 스스로 혀를 깨물 만큼 멍청한 주정뱅이에다 직업 사기꾼이 되어버린 상황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이런 순간을 '실재와의 조우'라고 부른다. 평소 우리는 상징계의 베일 속에서 산다. '적당히 마시는 것', '스트레스 해소', '사교 생활'이라는 기표들로 진실을 가린다. 특히 이스터처럼 '전문가'라는 가면을 쓰고 있을 때, 상징계의 베일은 더욱 두꺼워진다.
하지만 토사물 속에서 깨어나는 순간, 모든 기표가 무너진다. 상징적 질서가 붕괴하고 날것의 실재가 드러난다. 건강 전문가라는 페르소나와 알코올 중독자라는 진실 사이의 간극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실재는 견딜 수 없이 충격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 그것을 회피한다. 이스터가 술을 "편안한 이불"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여기 있다. "알코올은 인간이 당연히 겪어야 할 불편함들, 즉 불안한 상황, 생각, 감정 등으로부터 나를 잠재우고 덮어주었다."
향유의 역설
라캉은 '향유(jouissance)'라는 개념으로 중독을 설명한다. 향유는 단순한 쾌락(pleasure)이 아니다. 쾌락 원칙을 넘어선 과도한 만족, 고통과 쾌락이 뒤섞인 상태다.
이스터의 삶이 정확히 그랬다. "마시지 않을 때는 주말까지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금요일 밤부터 다시 술을 들이마셨다." 아침이면 "깨질 듯한 머리를 감싸쥐고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술을 끊고 다시는 고주망태가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어금니를 악무는 고난의 행군은 딱 월요일부터 금요일 낮까지만 이어졌다."
알코올 중독자는 술을 마시며 고통받는다. 건강이 망가지고 관계가 파괴된다. 이스터도 인정한다. "어, 내 차가 어디 있지?" 하는 몇 번의 순간들, 여기저기 부러진 뼈, 파탄으로 치달은 관계... 한번은 술이 떡이 돼서 접이식 스쿠터로 지상 최고 속도를 깨는 시도를 하던 중 체포당했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왜? 그 고통 자체가 일종의 만족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쾌락 원칙을 넘어서』에서 말한 '죽음 충동'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이스터는 금주 후 겪은 고통을 상세히 묘사한다. "온몸이 말라버리는 것 같은 끔찍한 지옥이 며칠 동안 이어졌다. 두통, 메스꺼움, 탈진, 오한, 땀, 그리고 몸속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다양한 고통들." 하지만 육체적 고통보다 더 힘든 것은 향유의 박탈이었다. "알코올에 절여 있던 뇌가 재부팅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이 일어났다. 마치 단단한 고무공이 대포에서 발사되어 콘크리트 방 안을 사방으로 튕겨 다니는 것 같았다."
향유를 빼앗긴 주체는 존재 자체가 흔들린다. 왜냐하면 향유는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주체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나는 마신다, 고로 존재한다.'
옵션 1과 옵션 2
이스터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옵션 1,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냥 이대로 산다. 안일함과 무감각한 생활 방식은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하겠지만 대신 계속 술독에 빠져 지낼 수 있다. 옵션 2, 불편해진다."
대부분은 옵션 1을 택한다. 상징계 안에 머물면서 상상계의 환상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술, 마약, 게임, SNS... 이 모든 것이 실재와의 대면을 피하는 방법이다. 특히 '전문가'라는 가면을 쓴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이미지를 유지해야 하니까.
하지만 이스터는 옵션 2를 선택한다. "안락했던 액체 이불을 걷어차 버린다." 이것은 단순한 금주가 아니다. 상징계의 균열을 직시하고 실재와 대면하는 용기다. 자신이 "직업 사기꾼"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토사물에 덮여 깨어나는 일이 흥미로웠던 점은, 나를 이렇게 만든 것과 정반대되는 일을 하겠다는 결심을 더 쉽게 만들어줬다는 점이다. 누구도 금요일 저녁에 술을 끊겠다고 결심하지 않는다. 나의 결심은 일요일 아침, 전부 무너져 내린 것 같은 순간에 이루어졌다."
나도 나만의 액체 이불이 있다. 새벽까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 스트레스받으면 자동으로 열게 되는 배달 앱. 불안할 때마다 찾는 달콤한 간식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실재를 회피한다.
나도 낮에는 무언가의 전문가 행세를 한다. 조언하고, 가르치고, 설득한다. 하지만 밤이 되면? 유튜브 알고리즘에 끌려다니는 중독자가 된다. 이스터의 이중생활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진정한 변화는 그 이불을 걷어차는 순간 시작된다. 하지만 그것은 "두 번째 옵션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내가 해낼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어 더럭 겁이 났다"는 이스터의 고백처럼, 두려운 선택이다.
그럼에도 그는 선택했다. "나는 이 바보 같던 삶에 백기를 들었다."
우리는 언제 백기를 들 수 있을까?